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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49화 (49/264)

49화

애리얼은 그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다시 걸음을 돌렸다. 아무리 렉시우스와 스카이라의 사이에 끼기 싫다 해도, 데본시아는 더 아니었다. 그는 스카이라와 관련하여 상황을 악화시키는 불화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와 애리얼이 함께 있으면 스카이라가 지금보다 더 날뛸 것은 명명백백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태자의 의견은 애리얼과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애리얼에게로 몸을 향하고서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대로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애리얼은 제 뒤로 불길한 기운이 접근하는 것을 느끼고 옅게 몸을 떨었다. 걸음은 절로 빨라졌다.

멀지 않은 곳에 붉은 줄이 얼기설기한 결계가 보였다. 그 내부에선 여전히 강한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폭압을 느끼게 하던 전투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격해진 상태였다.

애리얼은 결계 주변으로 향하다가 황급히 길을 바꾸었다.

결계 쪽으로 다가가면 데본시아에게 금방 붙잡히게 될 거였다. 심지어 스카이라의 눈앞에 데본시아를 데려다 놓는다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거의 달리는 수준에 가깝게 발을 옮긴 애리얼은 다급하게 실습장의 계단 아래로 들어갔다. 좌석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모여 길게 연결된 곳이었다. 지하처럼 서늘하고 그림자 진 길에는 드문드문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애리얼은 점점이 이어진 주황색 조명 빛을 따라 걸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내부 실습장 - 계단 밑 통로』

‘아니, 미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데본시아가 애리얼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느린 듯 빠르게, 그러나 그녀를 아예 따라잡지는 않을 듯한 속도로 그의 초상화가 움직였다.

애리얼은 다시 휴대폰을 옷 속에 숨기고서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통로의 그림자에 가려진 데본시아의 인영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누가 봐도 그녀를 추적하는 모양새였다.

밝은 조명 아래 있던 애리얼은 그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속도를 높여 걸었다. 그러자 그도 걷는 속도를 높였다. 방금까지 애리얼이 있던 주황색의 조명 빛 아래로 그가 들어섰다. 환한 금발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어두워 보이지 않던 우아한 얼굴이 말끔하게 드러났다.

애리얼은 데본시아를 제대로 확인하자 기겁하여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데본시아도 그녀의 뒤를 쫓아 속도를 올렸다. 그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둘 사이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얼마 못 가 애리얼은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녀는 힘에 부쳤지만, 데본시아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애리얼이 먼저 지쳐서 그녀의 뒤를 쫓아오는 데본시아에게 꼼짝없이 따라잡힐 터였다.

애초에 애리얼과 데본시아의 기초 체력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바람에 날리는 종잇장처럼 가늘고 허약한 체질로 방 안에서만 살아온 백작 공녀가 뜀박질로 황태자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소모전을 더 지속해 봐야 애리얼만 불리했다. 차라리 잡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녀는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웃기게도 데본시아 역시 속도를 줄였다. 애리얼을 따라오던 발소리가 천천히 느려졌다. 그는 장난을 치듯이 거리를 조절하며 애리얼과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혹시…… 날 놀리고 있는 거야?’

의아함을 느낀 애리얼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눈웃음을 짓는 데본시아의 얼굴과 마주하자, 그녀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애리얼 역시도 자신을 향하는 데본시아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았다. 장난인 듯 진지한 듯, 은밀한 이채로 빛나는 그의 오드 아이. 빨려 들 것같이 신비한 색채를 띤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밀회하는 연인을 만난 것처럼 매혹적이고, 일면으론 음습한…….

점차 느려지다 어느새 걷기를 나란히 멈춘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바깥의 소란함마저 벽에 막혀 한층 작게 들리는 격리된 통로. 그 속에서 정말 밀회라도 하듯이 애리얼을 바라보는 데본시아.

침묵 속에 이어지던 정체 상태를 깨며 데본시아가 한 발짝 애리얼에게 다가섰을 때였다.

콰앙!

황자와 대공자가 싸우며 나는 굉음이 실습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충격이었다. 땅이 뒤흔들리나 싶더니 삽시에 조명이 꺼지며 긴 통로가 암흑에 잠겼다.

갑자기 벼락처럼 내리친 소음에 애리얼은 세뇌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데본시아와의 기이한 시선 교환 속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매혹에 가려진 그의 음험한 욕망이었다.

데본시아가 한 발 다가선 순간, 알게 모르게 숨겨져 있던 그의 욕구가 마침내 자신을 향해 이빨을 세우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애리얼이 늦기 전에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불이 꺼졌다. 그랬기에, 그녀가 이 어둠을 틈타 행할 것은 오로지 도망뿐이었다.

새카맣게 암흑으로 잠긴 통로에서 애리얼의 마음속엔 두려움이 치솟았다. 너무 어두운 바람에 데본시아가 보이지 않아서 더 그랬다.

애리얼은 그가 있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어느 정도 멀어져도 붙잡히는 일이 없자 그녀는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상대가 방심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명백한 오산이었다.

얼마 뛰지도 못한 애리얼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강제로 다리가 멈췄다. 달리던 몸이 갑작스러운 정지에 무너졌다. 부드러운 품이 그녀를 기껍게 받아 냈다.

“이렇게 애태워 놓고 도망가지 마.”

남자의 감미로운 음성이 투정을 부리듯이 속삭였다. 데본시아. 피하려던 그가 어느새 애리얼을 앞질러 온 것이었다.

애리얼은 졸지에 데본시아의 품으로 뛰어든 꼴이 되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당기고 있었다. 다가오는 그를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밀어냈다.

“애태우다니, 그런 적 없어요.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말은 침착하게 하는 주제에 애리얼은 빠져나가려고 다급히 바르작거렸다. 그녀의 몸짓에는 상당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 봐야 데본시아에겐 마치 병아리가 하는 발버둥처럼 하찮고 미약하게 다가왔다. 그 가냘픈 몸을 손쉽게 봉쇄한 그가 낮게 웃었다.

“네 술래잡기에 더 어울려 주고 싶었는데, 도망치는 널 보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황태자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

“더 놀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데본시아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마가 애리얼의 이마에 닿았다.

미지근한 숨결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애리얼은 다급히 얼굴을 숙였다. 그 바람에 그의 가슴팍에다 안면을 묻고 말았다. 영락없이 그에게 안긴 모양새였다.

데본시아의 품에선 블랙 오키드와 시더우드가 뒤엉킨 듯한 고혹적인 향기가 났다. 숨을 들이켜자 폐부로 스민 향기에 애리얼은 머리가 아찔했다. 고개라도 돌리려 했으나 데본시아가 허락지 않았다. 그의 손이 애리얼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애리얼은 이미 한 번 피했던 그의 얼굴과 억지로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근거리로 다가온 오드 아이가 희미하게 빛났다. 바다 같고 얼음 같은 눈동자의 주인이 그녀에게 조곤조곤 물었다.

“어떤 식으로든 날 거절하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었나?”

지난 일을 상기시켜 주며 자상하게 타이른 그가 얼굴을 기울이며 다가왔다.

애리얼의 콧등으로 그의 숨결이 스쳤다.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뭘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다가온 그의 입술을 황급히 막았다. 손가락에 닿은 그의 입술의 감촉이 부드럽고 보송했다.

“……전하.”

애리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깝습니다. 제가 전하께 예를 갖출 수 있도록 부디 거리를 벌려 주세요.”

좋게 꾸며 낸 말이나 실상은 거절의 표현이었다. 일전에 황태자가 거절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녀는 곧장 그를 거절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도 데본시아는 화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웃기만 했다. 애리얼의 손가락에 닿은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 감촉이 간지럽고 무척 신경 쓰여서 애리얼은 무심코 손을 떼려다 겨우 멈췄다. 그랬다간 그와 입이 닿을 판이었다.

데본시아는 그대로 애리얼의 손가락에 입술을 붙인 채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 말을 안 듣네.”

데본시아의 나지막한 음성에서는 애리얼을 향한 흥미가 가득 묻어났다. 그가 애리얼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콰앙! 쾅!

굉음이 계단을 뚫고 울렸다. 막혀 있던 자리에 거대한 구멍이 났다. 부서진 자리로 잔해가 우수수 떨어졌다. 뚫린 곳으로 바깥바람이 밀고 들어와 데본시아의 망토가 흩날렸다.

붉은 망토가 부드럽게 위로 휘날렸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망토가 가라앉은 자리로 빛이 쏟아졌다. 훤히 뚫린 벽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붕괴한 통로의 한쪽 벽면에 깜짝 놀란 애리얼이 파르르 떨었다.

데본시아는 그런 애리얼을 다독거리듯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향한 곳에서 잔해를 헤치고 스카이라가 나타났다. 데본시아가 반갑게 웃었다.

“대련은 어떡하고 여길 왔어?”

“남이야 뭘 하든.”

“렉스한테 졌어?”

“…….”

침묵하는 스카이라의 꼴은 패배자라 보기엔 상당히 멀쩡했다. 머리칼과 교복이 좀 흐트러지고 흙먼지가 묻은 것을 제외하면 다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겼다고 말하지 않았다.

“중간에 뛰쳐나온 모양이구나.”

데본시아에게 정곡을 찔렸는지 스카이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호기롭게 고문 결계를 펼쳐 놓을 땐 언제고 우습게도 중간에 포기를 했다니, 스카이라.”

“…….”

“꼴이 멀쩡한 걸 보니, 엉뚱한 데에 정신이 팔려서 대련을 할 수 없었나 보지?”

“……애리얼을 놔.”

반박 한번 없던 스카이라가 억눌린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그가 꺼낸 요구가 너무나 솔직한 것이어서 데본시아는 소리 내 웃어 버렸다.

“너무 맹목적이잖아, 스카이라. 개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그에게 속내를 꿰뚫린 스카이라는 어색하게 얼굴을 굳혔다.

“알면 놔.”

“내가 왜.”

데본시아는 능청스럽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스카이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고르며 제 형에게 섬뜩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불쾌하니까.”

그렇게 답하며 스카이라는 오른손을 들어 데본시아에게 향했다. 무심하게 뻗어진 그의 손이 레이피어를 들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데본시아에게 겨눠졌다.

아무리 실습장이라지만 황태자에게 날붙이를 향하다니,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저, 저하!”

애리얼이 놀라 외쳤다.

그러나 스카이라는 물러섬이 없었고, 그제야 데본시아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하극상이라……. 생각보다 기분이 더럽네.”

데본시아가 품에서 애리얼을 놓아줬다. 그의 팔에서 풀려난 애리얼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번만큼은 둘 사이에 끼어선 안 된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말해 봐, 스카이라. 나한테 감히 칼을 겨눌 정도로 내가 널 오냐오냐해 줬니?”

“여기 실습장이야. 대련 중이었다는 걸로 넘어가고자 하면 표면적으로라도 계단식 수평성을 표방하는 아카데미는 나를 징계할 수 없을 거야. 여기선 너나 나나 동 계급 취급이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불리하지 않은 상황을 골라 틈을 찔러서 나에게 기어오르겠다는 거잖니.”

데본시아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제 어깨를 주무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진압의 준비를 하듯.

스카이라 역시 그의 움직임을 따라 태세를 갖췄다.

“그게 싫으면 그렇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책임 전가도 잘하고. 착하구나.”

데본시아가 확연한 조롱을 뱉었고, 두 형제의 사이에는 걷잡을 수 없이 살기등등한 전운이 번졌다.

같은 공간에 낀 애리얼은 뒷걸음질 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휘말렸다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대련 때문에…… 여기서 게임 오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애리얼은 혹여 게임이 여기서 끝을 맺을까 봐 전전긍긍 떨었다.

망할 렉시우스가 제 수업도 아닌 마공전에 끼어들었을 때부터 문제였다. 그런데 정작 이 원흉의 당사자는 어디 있는지…….

애리얼이 한창 원망하고 있는데, 그 원망의 대상이 뚫린 벽면으로 태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불량한 걸음걸이로 부서진 벽 잔해를 툭툭 발로 차 치우던 그가 대치하던 두 형제를 맞닥뜨렸다.

“너희 지금 뭐…….”

렉시우스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듯 음흉한 미소를 짓다가, 칼을 든 스카이라를 보고서 기함했다.

“너 미쳤어? 여기서 진심으로 나오면 어쩌자는 건데.”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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