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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50화 (50/264)

50화.

렉시우스의 대찬 추궁에도 스카이라는 묵묵부답이었다. 애초에 그의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스카이라의 눈과 몸은 데본시아에게로 향한 채 지금의 하극상을 무를 뜻이 없음을 밝혔다.

렉시우스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둘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평소엔 난봉꾼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기 좋아하더니, 여기선 중재자 노릇을 할 모양인 듯싶었다.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중이던 애리얼은 칼끝을 등지고 선 렉시우스를 보고서 잠시 멈췄다. 그와 눈이 맞았기 때문이다.

렉시우스는 그녀의 존재를 예상치 못했던 건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넌 뭐냐, 묻듯이 보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한 듯 시큰둥한 눈을 했다.

“너, 어쩌다 왔어?”

“제 담당 기사분께서 기절하셔서 대련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려다 중간에 쫓기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이곳에 왔습니다.”

요컨대 담당 기사가 기절하게 된 것이 최초의 원인이란 소리였다.

애리얼의 답변에 렉시우스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의 눈이 제 등으로 칼을 겨눈 스카이라를 슬쩍 흘겼다.

빛을 등진 스카이라는 과묵한 얼굴이었다. 추궁의 의미가 가득한 렉시우스의 눈빛에도 그는 묵묵부답으로 데본시아만 주시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렉시우스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블레이저의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애리얼에게 던졌다.

그 순간 데본시아와 스카이라가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애리얼은 날아온 것을 받아 들었다. 손바닥으로 가죽에 감싼 단단한 물체가 만져졌다. 단검이었다. 애리얼은 툭 튀어나온 손잡이를 쥐고서 물었다.

“단검을 왜 주셨나요?”

애리얼이 렉시우스를 똑바로 보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 때문에 싸우는 건데, 너도 끼면 어때?”

“렉시우스! 이 개새끼!”

애리얼을 끌어들이는 렉시우스의 행동에 스카이라가 격분해 소리쳤다. 드디어 데본시아만 향하던 그의 눈이 렉시우스에게 향했다.

그러나 렉시우스는 태연한 태도로 스카이라에게 검지를 치켜들었다.

“난 애리얼한테 권유만 한 거야. 흥분하지 마.”

“그게 무슨 개소리……!”

“권유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스카이라가 언성을 높이던 중에 애리얼이 단검을 툭 떨구며 말했다. 그녀는 규칙을 따라 스스로 무장 해제를 하며 대련의 포기 선언을 했다.

“저 애리얼 허클리는 대련을 포기합니다.”

이 일에 개입하기 싫다는 명확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녀의 발언에 스카이라의 눈이 흔들렸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그녀를 향한 안심, 혹은 실망. 반면 데본시아의 눈은 늘 그렇듯 알쏭달쏭한 이채를 띨 뿐이었다. 아니, 약간이지만 화가 난 것도 같고.

그 사이서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향해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웬일로 둘 다 버리네? 끼어들 자리가 아닌 건 아나 봐?’

렉시우스는 픽 웃음소리를 내곤 냉정하게 표정을 가라앉혔다. 거칠 것이 없어진 두 황족 형제의 심기가 아주 일촉즉발이었다. 이대로면 정말 그녀까지 휘말릴 기세다.

“알았어. 애리얼, 넌 가 봐.”

렉시우스의 허락에 애리얼은 가볍게 묵례만 하고 빠르게 통로를 뛰어나갔다.

***

애리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달음에 도망쳤다.

긴 통로를 빠져나오자 대련 한 번에 난장판이 된 실습장이 보였다. 결계는 사라졌고, 땅은 엉망진창. 심지어 계단 벽마저 부서져 내렸다.

애리얼은 걸음을 재촉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대피한 상태였다. 조교 한 명만 불안해하며 철문 앞을 지키고 기다리다가 애리얼을 보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있으셨습니까! 빨리 나오세요!”

“죄송합니다!”

부름에 바쁘게 달려 나간 애리얼이 철문을 빠져나갔다.

주변에서 대기하던 아카데미의 사용인들이 애리얼을 알아보고 차량을 준비해 주었다. 애리얼은 주변에서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보고자 했으나, 위험하다는 사용인들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차는 곧장 내달려 제1 기숙사로 그녀를 데려갔다.

차에서 내리자, 녹음의 향기를 싣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그 미풍에 흐드러진 분꽃나무의 하얀 꽃잎이 날려 왔다. 애리얼은 교복 리본에 내려앉은 흰 꽃잎을 손가락으로 떼어 냈다. 보드랍고 보송보송한 촉감이었다. 마치 아까 닿았던 데본시아의…….

아찔한 생각에 애리얼은 들여다보던 꽃잎을 얼른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맑은 하늘에 조각구름이 느리게 떠갔다. 방금 물을 줬는지 잔디밭의 풀 잎사귀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정교하게 어우러진 정원의 초목에서 상쾌한 향기가 났다.

실습장과는 전혀 다른, 느리고 고요한 분위기가 이곳을 감싸고 있었다.

애리얼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온몸을 채우던 긴장과 두려움의 응어리가 여기에 와서야 겨우 풀려나는 것 같았다. 억눌린 긴장을 풀어내는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애리얼은 제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정원을 거닐었다. 그쪽이 더 진정됐다.

바람에 초목이 스치는 소리, 분수에 물보라가 이는 소리, 간간이 울리는 새의 지저귐. 폭발음에 지친 청각이 잔잔한 자연의 소리에 드디어 휴식을 취했다. 평화로웠다.

잔뜩 굳었던 심신은 어느새 절로 나른해져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애리얼은 적당한 나무 아래의 그늘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망친 뒤로 통로의 일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애리얼로선 알 길이 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떠날 때까지 실습장에서 굉음이 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누가 죽지는 않았겠지?’

애리얼은 혹시나 하며 휴대폰을 켰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 북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교사 동 - 별관』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애리얼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이렇게 안도할 만큼 아까의 황족 형제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레이신만 빼고 전부 황성에 있네.’

다들 징계라도 받으러 간 건가 싶었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들리는 말로는 실습장이 부서지는 일은 자주는 아니라도 종종 있어서 징계받을 일은 아니라 했다. 무기를 사용해 돌발적인 대련을 펼치는 것 또한 마공전 수업의 특성상 빈번한 일이었다.

스카이라가 아무리 황태자를 노렸다 한들 둘러싼 상황을 생각하면 그를 징계하기는 어려우리라. 이유인즉, 황태자가 실습장의 관전석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한창 대련이 일어나는 중에 관전석을 벗어나는 것은 대련에 휘말릴 위험을 감수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게 싫었다면 위험하지 않게 관전석을 지키고 있었어야 했다. 그러니 빌미를 준 것은 데본시아라 몰아간다면 스카이라의 행동을 책잡기는 어려워졌다.

결국 스카이라는 영악하게 틈을 잘 노려 실패해도 잃을 게 없는 하극상을 펼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데본시아가 그렇게 열받은 건가…….’

애리얼은 평소답지 않게 스카이라의 페이스에 말려든 데본시아를 떠올렸다. 늘 미소만 짓던 그의 얼굴에 짜증이 서린 그 순간을.

“……무서웠어.”

그때를 다시 떠올렸더니 애리얼은 소름이 돋았다. 괜스레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그녀는 팔을 문지르며 움츠렸다.

데본시아도 데본시아지만 스카이라도 만만치 않았었다. 실습장에서 제 형에게 칼을 들이밀던 그 모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감정에 치우쳐 우발적으로 한 행동이라기엔, 그는 평소 화낼 때보다 냉철했다.

다짜고짜 멱살을 붙잡지 않고 말로써 데본시아의 맹점을 찌르고 드는 스카이라는 처음 봤다. 애리얼에겐 처음이었다.

‘스카이라는 아까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돌발적인 행동의 원인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데본시아가 저를 쫓아 통로로 들어간 것을 봤겠지. 그래서 스카이라는 통로를 부수고 들어온 거였다. 어제 렉시우스를 따라오던 것처럼.

“나한테 따지고 싶을까? 해명을…… 바랄까?”

잘 알 수 없었다.

애리얼은 저번처럼 데본시아와 붙어 있던 걸 스카이라에게 보이고 말았다. 도망치다 붙잡혔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스카이라는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웬일로 그의 호감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데본시아에게 붙들린 애리얼을 볼 때도 황성에서처럼 눈빛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스카이라의 눈은 오롯하게 데본시아만을 증오하며 바라보았다.

그러니 아마도 이번 일은 애리얼이 매개이기는 해도 큰 원인은 아닐 것이다.

스카이라는 빼앗기는 것, 특히나 데본시아에게 빼앗기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는 늘 데본시아를 증오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의 일은 그간 쌓인 것이 폭발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감정이 예민해진 상황이라면 당분간은 아예 만나지 않는 게 더 좋을까?’

애리얼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거리를 두는 중이긴 하지만 조금 더 거리를 벌려야 되는지. 아니면 이대로도 괜찮은지. 공략을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유리할지 판단이 어려웠다.

자꾸만 애리얼을 유혹하려 드는 데본시아, 그런 데본시아에게 분노를 느끼는 스카이라, 그런 스카이라의 반응에 흥미를 느끼고 데본시아와 덩달아 스카이라를 자극하는 렉시우스,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레이신.

균등한 공략이라는 게 애초에 가능할까 싶은 라인업이었다. 이래선 뭐 하나를 선택해도 다른 한쪽이 꼬일 것 같았으니까.

애리얼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수업을 듣는 중인 것 같은 레이신을 제외하면 모두 황성에 있었다. 만날 만한 상황인 사람도 없었고, 만날 구실도 방법도 없었다.

‘아직 학기 초라 적응하는 것만도 힘든데, 공략은 잠시만 좀 쉴까…….’

환경에 적응해야 좋은 공략도 나오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애리얼이 막 자리서 일어나려 할 때, 휴대폰의 시스템 창이 바뀌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정문』

스카이라의 위치가 변했다.

애리얼은 일어나려다 말고 움직이는 그의 초상화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중앙 동 - 입구 길』

『▷현재 위치: 아카데미 중앙 동 - 정원 길』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초입』

점점 가까워지는 중인 그의 위치 문구가 실시간으로 바뀌며 떴다. 그의 초상화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정원』

스카이라와의 거리가 불과 몇십 미터로 좁혀졌다. 애리얼은 교복 치마 주머니에 얼른 휴대폰을 숨기고 정원을 주시했다.

멀지 않은 길에 멈춘 검은색 차에서 스카이라가 내렸다. 그는 나무 그늘에 앉은 애리얼을 보지 못한 채, 기숙사 건물을 보고 섰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정원을 샅샅이 훑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애리얼은 그의 눈에 발견되었다. 파란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은 애리얼을 보고서 스카이라가 놀란 듯이 다가왔다. 빠른 걸음에서 그의 초조함이 엿보였다.

“왜 이러고 있어? 어디 다쳤어?”

다급하게 오더니 꺼낸 첫말이 애리얼을 향한 걱정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애정에 가까운 감정이 뚝뚝 떨어졌다. 그게 부담스러워서 애리얼은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너는?”

스카이라는 고개를 숙이는 애리얼에게 못마땅해하는 얼굴을 하려다 말았다. ‘너는’ 하고 딸려 온 그를 향한 걱정 한마디, 그 짧은 말이 너무 기꺼운 나머지.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안 다쳤어? 괜찮아?”

애리얼이 제 무릎을 끌어안고서 스카이라에게 계속해서 조곤조곤 물었다. 명백하게 그를 걱정하고 있는 어투였다.

그 순간 스카이라의 속에서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열을 받은 그것은 가슴속에서 급격하게 크기를 키웠다. 턱턱 숨이 막혔다. 그는 말 못 하게 벅차오른 속을 숨기고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보면 알잖아.”

“…….”

“날 봐, 애리얼.”

두 번 반복하니, 결국 애리얼이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흑발에 가려졌던 하얀 얼굴이 그를 향했다. 짙은 빛깔, 검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담았다.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애리얼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한, 약간은 안쓰러운 미소였다.

스카이라는 그 미소 짓는 얼굴에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에 붙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의 움직임에 서린 동요가 머리칼을 타고 애리얼의 피부에 스몄다. 숨길 수 없었던 감정의 잔떨림.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상태가 묘한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저러지, 그녀가 의문을 담고서 바라본 그때,

우우우웅-

치마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자주 생각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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