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애리얼은 스카이라와 마주 본 채 휴대폰의 진동음을 들었다. 몇 번이고 들었던 익숙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그녀가 모른 체하던 그의 표정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혼몽한 눈동자,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 옅게 달아오른 눈가. 스카이라의 얼굴에 떠오른 모든 것이 감정의 발로가 되었다. 그가 말로 내놓지 않았던 것들. 질투나 돌발 행동, 종종 베푸는 친절함으로만 비치던 것들. '황자비'라는 단어로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던 것들이 드디어 명확해져서 애리얼의 앞에 드러났다. 이제는 단순한 호감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애리얼은 노골적인 시선과 마주해 긴장한 자신을 느꼈다. 이제 그녀를 보는 스카이라의 얼굴에선 냉담함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곳을 봐도 그는 열에 젖어 있었다. 심지어 그의 눈동자조차도 그랬다. 푸른색은 바다나 호수 같은 차가운 것들이 지니는 색이었으나, 그의 눈은 더운 열기를 품은 주제에 푸른색으로 빛났다.
그는 고백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고백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어코 애정을 목도한 애리얼의 속에서 평정이 깨졌다. 긴장한 그녀는 손가락을 말아 쥐며 눈을 깜박거렸다.
휴대폰이 진동한 순간은…… 그의 호감이 애정으로 변모한 순간이었다.
스카이라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저 애리얼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그는 무릎을 굽혀 땅에 대었다. 애리얼의 앞에 마주 앉아 상체를 가까이 붙이며 다가왔다. 그의 눈은 취한 것처럼 풀려 있었다. 귓가를 맴돌던 손이 기어코 그녀의 얼굴에 닿아 뺨을 감싸 왔을 때, 애리얼은 그가 제게 홀려 있음을 느꼈다.
“스카이라?”
애리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데본시아가 그랬듯이. 그녀는 순간적으로 겁이 났다.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따라왔다.
“황자저하.”
이번에는 격식을 갖춰 스카이라를 불렀다. 그녀의 음성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이상은 그를 받아 줄 수 없어서 밀어낸 것이었다.
깊은 물속에 잠긴 듯이 흐릿하던 파란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스카이라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다가오던 그의 움직임이 겨우 멈추었다.
애리얼은 그에게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 가까워.”
“이렇게 자세히 보지 않아도 괜찮아. 난 멀쩡해.”
애리얼은 스카이라가 무의식중에 내비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척 상황을 돌려 말했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 이성이 돌아왔다.
스카이라는 용수철이 튕겨 나가는 것같이 일어섰다. 동시에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그렇게 달아올라 붉어진 얼굴의 반을 감췄다. 제가 무슨 짓을 하려 던 건지 뒤늦게 인식한 탓이었다.
“……미안.”
그는 무뚝뚝하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잊어 줘.”
그 말을 끝으로 스카이라는 도망치듯 애리얼에게서 멀어졌다.
나무 아래 홀로 남은 애리얼은 대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부리나케 떠나는 스카이라를 줄곧 응시했다. 그러다 푹 고개를 숙이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긴장으로 바짝 조여들었던 가슴이 아직도 갑갑했다.
산들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간질이고 갔다. 주변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로웠다.
너른 기숙사 정원에 홀로 남은 애리얼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속 시스템 창에서는 두 개 반으로 오른 스카이라의 하트가 그녀를 반겼다.
목표인 하트 세 개까지 남은 수치는 이제 고작 반 개. 그거면 스카이라의 공략은 끝난다.
“이제 어쩌지……”
애리얼은 다시 제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고지를 코앞에 둔 그의 호감도 때문에 수평적 공략은 깨지기 직전 이었다. 심지어 호감도 세 개부터는 엔딩도 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몇 달 지났는데 벌써 엔딩이라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스카이라의 하트가 세 개가 되는 순간, 그녀는 언제든 엔딩을 맞을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 공략을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비슷한 속도로 공략하면서 엔딩의 가능성이 생기는 하트 세 개는 되도록 미루는 게 중요했는데.……
심란해진 애리얼의 낯빛은 그녀에게 드리운 나무 그늘만큼이나 어두워졌다.
아카데미에 오고서 고작 이 주일째.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적응을 허락지 않고 멋대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
스카이라의 옆에는 보좌관도 시녀도 없었다. 지금의 그는 타인을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뜨거운 낯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누가 볼세라 엄청난 속도로 걸었다. 간신히 체통을 지키며 달리지 않고 방에 도착한 그는 거칠게 문을 닫았다.
격앙된 호흡을 고르며 그는 문에 기댔다. 가슴이 미친 듯이 펌프질을 했다. 쿵쿵, 울릴 때마다 뭔가가 울컥울컥 나오는 느낌이었다. 호 감처럼 풋풋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충동 혹은 욕망.
희멀건 안개 같았던 호감이 어느새 잔뜩 고여 시커먼 물이 되었다. 그의 이성을 가볍게 몰아내는 그 검은 물이 그의 안에 가득 차올랐다. 울렁울렁 흔들리는 감정의 물결이 형태를 갖추고 제대로 된 문장으로 머릿속에서 출력되었다.
애리얼.
그는 그녀를 보고 싶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고, 그녀에게 닿고 싶고, 그녀를 ..... 가두고 싶었다. 데본시아가 건드리지 못하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입 안을 깨물었다. 선을 넘어 버릴 것 같아서 점막의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씹었다. 기어코 비린 피 맛을 느끼자 그나마 조금 욕구가 죽었다.
상당히 구체적이고 파괴적인 욕구에 시달린 스카이라는 지독한 자괴감을 느꼈다. 도피처를 찾듯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다 거울에서 그의 두 눈이 멈췄다.
“미친 …….”
스카이라는 거울을 보고서 욕을 짓씹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타는 듯 달궈진 제 안면이 보였다. 누가 불이라도 지른 것 같았다. 감정이 드러나다 못해 폭발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성난 듯이 노려보던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감정을 몽땅 드러낸 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온몸이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애리얼에게 이런 꼴을 보였다는 게 창피해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개같네.”
스카이라는 제 상황을 비하하며 서슴없이 거친 말을 내뱉었다. 바깥에서 멀쩡하게 품위를 지키던 것이 가장처럼 느껴질 만큼 그의 입에서는 사나운 어투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잔뜩 익어 버린 이런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으나, 그의 머리는 그가 창피해 마지않는 아까의 상황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너무...... 가까워.”
“이렇게 자세히 보지 않아도 괜찮아. 난 멀쩡해.”
‘들키지는 않았나.’
그녀와의 대화를 되짚던 그는 한숨을 쉬며 안도했다.
스카이라는 그나마 애리얼이 눈치가 없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사실 그건 그의 착각에 불과했지만.
똑똑똑, 상념을 끊어 내는 노크 소리가 불청객이 난입하듯 울렸다. 이어 일정을 알리는 보좌관의 음성이 문을 넘어왔다.
“저하, 오후 일곱 시에 아이시온 왕족과의 외교 만찬이 있습니다. 미리 중앙관에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아서 갈 테니까.”
보좌관의 목소리에 겨우 감정을 추스른 스카이라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표정 없이 가라앉은 그의 얼굴이 원래의 차가움을 되찾았다.
***
애리얼은 한참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저녁놀이 주홍빛으로 드리우는데 그녀는 식사조차 거르고서 머리를 싸맸다.
머리에는 온통 스카이라와 관련한 일뿐이었다.
애리얼이 황자비 자리를 거절하자 스카이라는 그녀에게 거리를 두자고 말했었다. 그렇게 거리감을 형성한 것이 무색하게도 바로 다음 날 그의 호감도가 올랐다.
심리적 거리감과는 별개로 자꾸만 한 공간에서 마주친 게 화근이었다. 이제는 물리적으로도 거리를 벌리는 게 필요했다.
‘시간표도 다 바꾸고 동선도 최대한 겹치지 않게 움직여야 해.’
그걸 위해 애리얼은 이전에 레이신을 만나기 위해 자신이 황성에서 벌였던 행동을 떠올렸다. 스카이라를 피해 열린 창문을 넘어 숨고 도망쳤던 일. 돌발적이었지만 결국 스카이라를 만나지 않고 끝났던 그날의 행동은 성공이었고, 정답이었다.
꽤 극단적이긴 하지만, 당장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최소한 다른 공략 대상들의 하트가 모두 하나 이상이 될 때까지는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다행히 스카이라는 순간 이동이나 추적과는 상극인 모양이니 그녀가 영 불리한 건 아니었다.
애리얼이 이런 행동을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손에 휴대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든 그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그녀만의 치트 키. 그 덕분에 애리얼은 공략 대상과 마주치기 전에 도망 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다.
‘그건 좋은데.….. 온종일 휴대폰만 보고 다니긴 어렵단 말이지. 주변 눈치도 보이고.’
아무래도 휴대폰은 눈길을 끄는 외관이었다.
‘수시로 꺼내 보기는 조금 어려우니 접근 알림이 따로 있다면 편할 텐데.’
호감도가 오를 때와 비슷하게 진동으로 알림이 온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 접근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 기능까진 없겠지…….”
애리얼은 괜히 아쉬운 마음에 휴대폰만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그 하얀 물체를 주시한 지 몇 분,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경험이 떠올랐다.
스카이라의 브레이슬릿을 주워 준 날 황성 복도에서 울렸던 휴대폰. 그때 휴대폰이 진동하고서 곧장 레이신이 나타났었다.
‘혹시 개개인의 위치 변화나 접근에 관련한 알림이 있나?’
그런 의문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휴대폰은 공략 대상의 위치와 관련하여 따로 알림을 보내오진 않고 있었다.
‘그때가 버그였나?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건가?’
애리얼은 휴대폰 속의 작은 시스템 창들을 이리저리 누르고 관찰했다. 못 보고 지나친 부분이 있을 것도 같았다.
“설정하는 법이 있을 것 같은데…….”
중얼거리던 애리얼의 손가락이 스카이라의 프로필 창에서 위치 정보를 누른 순간이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에 대한 개별 접근 알림을 설정 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개별 접근 알림?”
애리얼은 시스템 창의 문구를 조용히 읽어 내렸다. 방금까지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기능일 게 분명했다. 설레는 기분으로 '네'라고 적힌 작은 창을 터치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에 대한 개별 접근 알림을 설정하셨습니다.
*대상과의 거리가 20m 이내로 줄어들 때 1회 진동이 발생합니다.
*대상을 눈으로 인식한 상태에선 울리지 않습니다.
*알림 설정은 원하는 대로 끄고 켤 수 있습니다.』
원하던 기능의 세부 사항을 확인하고서 애리얼은 살짝 손을 떨었다. 황성에서 스카이라를 피해 다닐 때의 긴장감이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그때의 긴장을 일상으로 달고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피곤해서 그녀는 축 처진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아프다고 드러누우면 스카이라도 안 오지 않을까? 하루…… 아니, 며칠.”
할 수만 있다면 꾀병을 부려서라도 틀어박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다른 공략 대상들, 특히나 레이신의 호감도가 너무 모자랐다. 데본시아는 확인조차 안 되는 상황이고.
침대에 누운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피하면서 레이신을 최우선으로 공략할 방도를 모색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시무룩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애리얼이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무색하게 스카이라는 아카데미에 부재했다. 데본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