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자주 생각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현재 위치: -(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둘의 위치는 대략적인 표시도 없을 만큼 멀었다.
“어딜 간 거지?”
약간 궁금증이 들었다가 금세 사고가 전환되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애리얼은 남은 두 대상의 위치를 마저 확인해 보았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1관 - 제1 교육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교사 동 - 별관』
레이신은 어제부터 계속 같은 위치였다. 연구를 하는지 아니면 독서에 골몰하는 중인지, 따로 취미 생활이라도 즐기는 중인지 알 길이 없다.
‘별관에서 대체 뭘 하는 걸까?’
애리얼은 잠깐 고민하다가 일어나 방을 나섰다.
렉시우스가 있는 1관과 레이신이 있는 별관은 거리가 가까웠다. 레이신이 안 된다면 렉시우스라도 만날 수 있으니 일단 교사 동에 가 보기로 했다.
기숙사의 입구로 내려가 행선지를 말하자 시녀가 금세 차량을 준비해 주었다.
애리얼은 정원으로 나가 대기 중이던 차에 곧바로 올랐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차가 출발하자 애리얼은 창문을 살짝 내렸다. 바깥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간질였다. 창밖에선 플라타너스 잎들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녹색의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애리얼은 조용히 그 풍경을 만끽했다.
목요일은 강의가 없이 비워진 날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다른 날보다는 느긋하게 움직여도 괜찮았다. 온전히 공략에만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 가지 않아 차는 교사 동의 별관 앞에 멈추었다.
1관과 그 주변에 몰려 있는 교사 동의 중앙 광장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반면 중앙 광장에서 벗어난 곳들은 한산했다. 고립된 듯 떨어져 있는 별관은 유달리 조용했다.
애리얼은 높은 조경수들 사이에 홀로 세워진 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별관의 외양은 여타 다른 관들과 비슷했으나 그 크기가 상당히 작았다. 애리얼이 첫날 마력학을 들으러 갔던 3관이 축구장 넓이에 3층 크기 정도였는데, 별관은 그 3관의 반의 반절도 안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근처에 있는 1관이 귀족가 저택 뺨치게 큰 탓에 유독 더 작게 느껴졌다. 다만 높이가 상당했다.
건물 입구로 다가선 애리얼은 나무 사이로 높게 솟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별관은 면적이 좁은 대신 거의 10층가량 되는 높이였다. 그 탓에 별관은 성채에 딸린 탑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꼭대기를 바라보려면 상당하게 고개를 젖혀야 했다.
‘여긴 정말 뭐 하는 델까?’
강의를 하든 뭘 하든 사람이 모이기에는 몹시 비효율적인 구조라 자연히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다가 문 앞으로 다가섰다. 굳게 닫힌 나무 문이 철문처럼 무거워 보였다. 그 중심에 쇠를 덧대어 만든 열쇠 구멍이 그녀에게 불안감을 일으켰다.
‘설마 잠겨 있진 않겠지?’
그러나 불행하게도 애리얼의 추측은 현실이 되었다. 문고리를 살짝만 당겼을 뿐인데도 턱 걸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문은 잠겨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문고리를 세게 당겨 보았다. 잠금이 헐거우면 열릴 수도 있으니까. 그런 요행을 바라며 그녀는 덜컹 소리가 울리도록 밀고 당기기를 몇 번 반복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문고리를 쥔 손만 아팠다.
애리얼은 붉게 자국이 난 손을 내려다보다가 치마 주머니에 숨긴 휴대폰을 꺼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교사 동 - 별관』
10층짜리 건물의 도면. 그 꼭대기에 자리 잡은 레이신의 초상화가 보였다. 애리얼을 약 올리듯 가장 위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애리얼은 망연한 얼굴로 저 높은 별관의 꼭대기를 보았다. 햇살이 눈 부시게 반짝이는 지붕 아래 첫 번째 층.
여기 틀어박힌 레이신은 탑에 갇힌 라푼젤이라도 되는 건지. 상황이 절묘한 탓에 애리얼은 그런 우스갯소리 같은 생각도 들었다. 긴 금발을 땋고 다니는 그에게 머리카락을 내려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상상했더니 픽 웃음이 나왔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 꽉 닫힌 문을 보고는 다시 진지해졌다.
‘이런 농담 같은 상상에 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야.’
문을 열고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애리얼은 별관에 들어가기 위해 1관으로 들어가 교사 동의 관리인을 찾았다. 열쇠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별관은 레이신의 개인 공간이 아닌 엄연한 아카데미 교사 동의 일부였다. 이곳의 학생인 애리얼이 별관에 들어가겠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진입한 다음 레이신과는 우연히 마주친 척하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1관 관리실에 있던 관리인은 애리얼이 별관에 대해 말을 꺼내자 곧장 난색을 표했다.
“별관은…… 강의가 잡혀 있지도 않은 곳인 데다 구조도 협소하여 볼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한번 보고 싶어요. 안내는 바라지 않습니다. 열쇠만 빌려주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관리인은 애리얼이 존댓말로 부탁하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애리얼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는 눈치였다. 그녀는 비록 검정 교복을 입고 일반 귀족 학생들과 같은 위치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녀의 뒤를 봐주는 이가 누구인지 알기에 관리인은 불안했다.
“하대를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하지만 저는 그냥 일반 귀족인…….”
“일반 귀족 학생도 저에게 이런 식으로 존대하지는 않습니다. 부디 하대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관리인의 반박에 애리얼의 입이 다물렸다. 왕족인 학생도 교수와 조교들에겐 깍듯하게 존대하기에 관리인에게도 그럴 줄 알았다.
“알았어. 편하게 말할게.”
“예……, 감사합니다.”
“별관 열쇠 좀 빌려줘.”
“그건 안 됩니다.”
눈치를 보며 저자세로 굴던 관리인이 별관의 이야기에는 또 단호해졌다. 애리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별관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열쇠를 내주지 않으려 하는지.
“왜?”
의문을 참지 못하고 애리얼이 묻자 관리인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자 서하께서 직접 별관 문을 잠그셨습니다.”
관리인은 파리한 낯으로 공자 서하라는 명칭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공자 서하라 불릴 이는 딱 한 명밖에 없다. 레이신.
“저희로선 그분의 의사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별관 문을 열고 나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알았어.”
애리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관리실을 나갔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녀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레이신이 대놓고 방해받기 싫다는 뜻을 밝힌 상태였다. 애리얼이 고집을 부려서 별관에 가 봤자 떨어질 것도 없는 그의 호감도가 마이너스를 향해 보이지 않는 추락을 하기나 할 것 같았다.
관리실이 있는 1층 끝자락을 빠져나와 중앙 출입문으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힘없이 터덜거렸다.
아쉬워도 방도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열쇠도 없고.
‘이럴 줄 아예 예상 못 한 것도 아닌데, 뭐.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어.’
애리얼은 실망감을 빠르게 추슬렀다. 이제 겨우 4월이었다. 아직 2년 하고도 반년이 넘게 시간이 있었다. 스카이라 쪽의 사정이 좀 위험하긴 하지만, 그도 당장은 없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애리얼은 걸음의 방향을 틀었다.
‘이왕 온 김에 뭐라도 하고 가야지.’
아쉽지만 레이신은 제쳐 두더라도 렉시우스가 마침 그녀와 같은 건물에 있었다.
애리얼은 그의 정확한 위치를 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들의 들뜬 음성. 황급히 동작을 멈춘 애리얼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복도의 한쪽, 1관의 휴게 공간으로 쓰이는 대형 홀이 북적거렸다.
애리얼은 환히 열린 홀의 더블 도어 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회백색의 거대한 대리석 벽난로를 중심으로 멋들어진 풍경화가 가득한 공간. 청록색 카우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뭔데 저렇게 모였지? 보물이라도 있나?’
상황을 가늠해 보는 애리얼의 눈이 가늘어졌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소리가 그녀의 관찰을 도왔다.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왕자님……. 나 오늘 처음 봤어.”
“어쩜 저렇게 존귀하신 외관을 타고나셨을까? 우리 오라버니와는 비교도 안 돼.”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는 건 왕자님께서 지니신 외모의 박력을 보고 생겨난 말이 아닐까?”
“응! 정말 얼굴이 권력이셔…….”
모두들 신이라도 본 것처럼 황홀하게 취한 듯한 어투였다. 여학생들의 입에서는 특히나 인물의 외관과 관련하여 감탄과 찬미가 이어졌다.
애리얼은 그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왕자님이 누구인지 잠깐 궁금해졌다. 하지만 공략 대상이 아니라면 굳이 호기심으로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물리고 홀을 지나쳤다.
인적을 피해 걸은 애리얼은 수업이 없는 빈 강의실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1관 - 1층 중앙 휴게실』
렉시우스의 구체적인 위치를 눈에 담은 애리얼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지나쳐 온 홀에 그의 초상화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 홀에.
애리얼의 머릿속에 홀의 여학생들이 들떠 말하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소설 속 왕자님이라거나 존귀한 외모라거나 얼굴이 권력이라는 등 누군가를 향한 찬양의 수식어들.
‘설마하니 렉시우스가 그 왕자라는 존재를 보러 가진 않았을 텐데?’
애초에 렉시우스는 제국의 대공자로 왕족보다 높은 계급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서 사람들이 왕자의 외모 찬양에만 열을 올리진 않았을 터였다. 하물며 렉시우스의 외모가 어디 가서 밀릴 외모던가.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던 애리얼은 문득 과거의 대화 하나를 떠올렸다.
“왕자님이라고 불러 봐라.”
렉시우스와의 좋지 않던 첫 만남에 들었던 그의 명령.
애리얼은 그때의 말을 곰곰이 되뇌어 보았다.
“왕자님……?”
그러고 보니 크레시앙 대공은 제국 산하 공국을 다스리는 왕이기도 했다. 공국에서 그를 왕이라 칭하듯 그의 아들인 대공자 렉시우스도 아마 공국에선 왕자라 불리겠지.
퍼즐이 맞춰지듯 추측의 아귀가 딱딱 맞아 갔고, 그럴수록 애리얼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인파가 몰린 홀에 떡하니 있는 렉시우스의 초상화. 그리고 여학생들이 찬미하던 왕자님.
‘그 왕자님이라는 게…… 왠지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