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불길함을 느끼며 애리얼은 다시 홀로 되돌아갔다. 아까는 그냥 지나쳤지만 렉시우스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의 초상화가 떠 있는 중앙 휴게실에 다다르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리얼은 홀의 많은 인파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곳에 몰려든 학생들 틈으로 걸어갔다. 그 중심에 렉시우스가 있을 테니까.
“역시…….”
애리얼이 작게 중얼거렸다. 한껏 들떠 가끔 꺄아 소리까지 지르는 여학생들의 가운데, 벨벳 카우치에 앉은 렉시우스가 보였다.
그가 고개를 슬쩍 젖히며 제 주변을 둘러싼 군중을 훑었다. 날렵한 눈매와 콧날, 선득한 눈빛. 서슬같이 잘 벼려진 인상이 위압적인 기운을 뿌렸다.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잘 깎아 낸 그의 모습은 약점 없이 훌륭했다.
과연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찬미하기에 모자람 없는 외관이었다.
렉시우스의 시선에 닿은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남부의 영웅. 그가 근 2년 만에 귀환해 눈앞에 있었다. 심지어 교사 동 휴게실에는 한 번도 온 적 없는 이였다. 학생들이 그의 행동에 호들갑을 떠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귀한 이가 보내는 눈길에 마주치는 족족 학생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 바람에 순간적으로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그는 별 위협 없이 차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같지 않은 고압적인 기백 탓에 주변의 기가 죽었다.
애리얼도 여러 번 경험했던 군림하는 자 특유의 위세였다.
그러던 렉시우스가 갑작스레 입꼬리를 올려 반갑게 웃음을 지었다. 애리얼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의 눈이 자신에게 와 있음을 깨닫고 움찔 놀랐다.
무리 속에 숨은 애리얼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그녀 옆의 여학생들만 오히려 신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시선을 받아 무척 황송하다는 듯.
반면 애리얼은 모르는 체하며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괜히 왔다.’
이토록 주변의 이목이 몰린 상대와 말을 나누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이렇게 눈이 많은 데서 렉시우스를 상대했다간 자칫 위험한 소문이 날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만면 가득한 웃음으로 그녀를 반기는 렉시우스의 모습이 상당히 위험하게 보였다. 마공전 수업에서 대련을 제안할 때 그의 분위기가 딱 저랬다.
애리얼은 눈을 내리깔고서 슬그머니 군중의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곳에서 조용히 피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자 렉시우스가 그녀를 곧장 뒤쫓을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주변이 놀란 듯 웅성댔다. 일부는 놀라서 작게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렉시우스가 소란스러운 무리 속에서 뒤로 빠지려는 애리얼의 팔을 잡아챘다. 그에게 붙잡힌 가느다란 팔이 속수무책으로 들어 올려졌다. 당기는 힘은 또 얼마나 억센지, 그의 손아귀에 애리얼은 강제로 까치발을 하고서 끌려 나왔다.
사방팔방의 눈들이 모두 애리얼을 향했다. 그들의 눈에 어린 것은 렉시우스의 외모를 우러를 때와 비슷한 경탄이었다.
“예쁘…… 헙!”
애리얼의 외모에 감탄하던 남학생 한 명이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렉시우스의 서늘한 시선이 그를 훑고 간 것이었다. 겁먹은 남학생의 낯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나도 알아. 얘 예쁜 거.”
렉시우스가 방금의 차갑던 눈빛을 숨기고서 쾌활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홀의 분위기가 묘하게 들떠 시끄러워졌다.
그녀가 매우 아름답다는 걸 확인하자 향하는 시선들은 굉장히 노골적으로 변했다.
설원 같은 피부에 긴 속눈썹을 드리운 애리얼의 얼굴 위로 발자국이 찍히듯 집요한 눈길이 이어졌다. 저마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애리얼을 훔쳐보고 렉시우스와의 관계를 지레짐작하며 수군거렸다.
수하, 친우. 혹은 그보다 더 깊은 관계일지도 모른다며 소문을 만들어 냈다.
다소 무례한 언행임에도 어쩐 일인지 렉시우스는 반박 없이 듣고만 있었다. 오히려 더 떠들라는 듯 관대한 모습이었다. 난무하는 짐작과 추측을 즐기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조금씩 눈치를 보던 학생들도 어느새 떠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과한 추측을 쏟아 냈다.
그러던 중 몇몇이 애리얼이 편입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편입생 아냐?”
“저번 마력전 수업에서 황자 저하 옆에 있던 사람 맞지?”
“황자 저하와 있었다고?”
“그러면 황실 쪽 사람?”
“왕자님과는 그냥 친우인 거야?”
“설마 황자비…….”
과열되는 대화에는 어느새 황자비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원래 소문이라는 게 모호하고 어정쩡한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자극적인 쪽으로 확산해 가기 마련이다. 한 명이 황자비라는 자극적인 명칭을 언급한 순간 애리얼에 관한 추측은 순식간에 그쪽으로 몸집을 부풀렸다.
“다른 수업에서도 황자 저하와 함께 앉은 걸 본 애가 있다던데…….”
“교육실에서도 그렇게 나란히 앉을 정도면 상당히 진전된 관계 아니야?”
“그렇다면 저 편입생이 새 황자비 후보가 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입학식 강단에서도 샤펠 공녀 서하의 옆에 서 있었어.”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렉시우스는 심기가 거슬린 듯 눈썹을 구겼다. 멋대로 떠들어 보라는 양 인자하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무표정해진 얼굴이 차가웠다.
애리얼 역시 꼬리에 꼬리를 다는 제 소문이 불편했다. 삽시간에 퍼져 나갈 황자비라는 이야깃거리는 지금 바로잡아 두지 않으면 후에 골치가 아플 게 분명했다. 그녀는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 가는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자 저하께서는 허클리 가문의 충성을 높이 사, 그 가문의 여식인 제가 아카데미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뿐입니다. 과한 억측은 부디 삼가셨으면 합니다.”
렉시우스에게 팔을 붙들린 애리얼의 모습은 유약해 보였으나, 그녀의 말하는 태도는 더없이 진중하고 단호했다.
하지만 한번 탄력을 받기 시작한 추측은 쉽게 수그러들 줄 몰랐다. 모인 무리는 애리얼의 확실한 해명에도 저들끼리 떠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압도적인 권력자가 나서기 전까지는.
“아니라잖아.”
렉시우스의 엄한 음성이 무겁게 떨어지자 시끄럽던 입들이 일제히 닫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애리얼을 향한 여러 눈동자를 한 번씩 마주했다. 그 위압적인 분위기에 학생들의 눈이 자동으로 내리깔렸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고개가 빠짐없이 바닥을 향하자, 그의 눈은 한곳에 고정되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제 손에 끌려 나온 애리얼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오후에 만나자고 했잖아. 못 기다리고 벌써 온 거야?”
예상치 못한 렉시우스의 언행에 애리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던진 말은 파격적인 오해와 소문거리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말은 못 꺼내도 무리를 감싼 기류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해를 키우기 전에 애리얼은 모두가 있는 앞에서 입을 열었다.
“늘 공부를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공자 저하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에 아카데미에도 순조로이 적응하고 있습니다. 황자 저하께 받은 은혜만큼이나 대공자 저하의 은혜에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마친 그녀가 푹 허리를 숙였다.
“아무쪼록 오후 수업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까와 비슷한 광경이 반복되었다. 쓸데없는 소문이 사실처럼 나돌기 전에 적극적인 해명으로 더 이상의 추측을 끊어 내는 편입생의 모습.
학생들도 이번에는 군말 없이 조용했다. 언제 또 대공자의 불호령과 같은 눈빛이 떨어질지 몰랐으니까. 그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에 렉시우스는 오히려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리얼을 보았다.
저 냉한 빛을 띠는 금색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서야 애리얼은 그의 속셈을 눈치챘다. 렉시우스는 일부러 애리얼과 자신을 두고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내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와 애리얼을 두고 떠드는 억측에는 적당히 눈감아 주고 황자비라는 소리에는 불편함을 드러냈다.
소문이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자 렉시우스는 김이 샌 표정이었다.
“전부 나가 봐. 난 얘랑 따로 할 말이 있으니까.”
그가 조용히 명했다.
학생들은 도망치듯 분란하게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공용 공간에서 일방적으로 내쫓기는데도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린 학생이 모인 아카데미라 한들 대공자의 압제를 무시할 만한 철부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북적거리던 홀이 금세 휑해졌다.
렉시우스는 그제야 애리얼의 팔을 놓고 걸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더블 도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이제 이 너른 홀에 남은 것은 애리얼과 렉시우스뿐이었다. 그는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문을 닫고서 홀로 걸어온 렉시우스가 다시 카우치에 앉았다. 그가 길게 이야기할 요량으로 자리하는 걸 보고 애리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렉스 선배, 여기서 볼일 있던 거 아니야? 나랑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
“보는 눈이 없으니까 금세 친한 척이네.”
렉시우스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애리얼은 그의 얼굴을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존대로 할까?”
“존대하라고 비꼰 게 아니거든?”
“그럼 뭐 때문에……. 혹시 내 말투나 목소리가 거슬렸어?”
“그냥 신기해서 그런 거야. 우리 후배가 공사 구분이 너무 철저하길래.”
그는 볼멘소리로 차갑게 내뱉더니 잠시 말을 쉬었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 있는 애리얼에게로 착석을 요구하는 눈짓을 슬쩍 보냈다. 그가 보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애리얼이 근처 소파에 앉았다.
“선배는 왜 여기에 있었어? 강의 같은 거라도 하고 있던 거야?”
그녀는 몰려 있던 인파를 떠올리며 질문했다. 렉시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아니, 너 기다렸어.”
“나? 내가 일 관으로 올 줄 예상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이 주변에서 황실의 차를 봤다고 떠드는 소릴 들었거든.”
애리얼은 작게, 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애리얼을 태운 차는 사람이 많은 아카데미 교사 동을 가로질러 왔다. 본 사람이 많을 게 당연했다. 그때 지나가는 차를 목격한 학생들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그가 들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황실의 차를 탄 사람이 나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걸 어떻게 몰라. 데본시아도 스카이라도 없는데 황실의 차를 이용할 사람은 애리얼, 너밖에 없지.”
그의 말을 듣고서야 애리얼은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아카데미에서 황족 외에 황실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오직 애리얼 자신뿐이라는 것.
차로 이동한 자체로 그녀는 신원이 들통난 거였다.
“그건 그런데, 선배는 왜 여기서 기다렸어? 내가 지나칠 만한 장소라서?”
“그렇다기보단 네가 어디로 가는지 파악하려고 그런 거였어. 이 근처에서 차를 부르면 여기 창문으로 바로 보이니까.”
요컨대 그는 애리얼이 차를 불러서 떠날 때쯤 붙잡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아까 그 학생들은…….”
“구경꾼.”
렉시우스는 눈을 감으며 일축했다. 닫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리며 가늘게 뜬 눈에는 권태감이 보였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서 피로하다는 인상이었다.
“남부전 승리를 이끈 제국의 영웅. 최연소 군단장인 공국의 왕자님. 그런 요란한 수식어가 딸린 사람이라니까, 궁금해서 와 보는 거지.”
자랑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는 단순하게 아까의 일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찾아와서 내 얼굴을 보면 떠들 거리가 많잖아? 곱상한 황족들이랑은 다르게 야만적이고, 흉포할 것도 같고. 좋다고 소리 지를 만큼 잘생기기도 했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렉시우스는 절대 자랑하는 투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귀찮다는 인상이었다. 그래서 더 자랑 같았지만.
“쟤들은 나 보면서 재밌을 거야.”
길게 한탄 같은 소리를 내뱉던 렉시우스가 문득 키득거리며 웃었다.
“관상동물 보는 것도 아니고 실실 처웃으면서, 사람 좆같게.”
그의 입에서 상스러운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명쾌하게 웃는 그의 입꼬리로 짙은 조롱이 배어났다.
애리얼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렉시우스의 이야기에 섣불리 말을 얹을 수 없어 그녀는 조심스러웠다. 그는 꽤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아까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의 분노도 이해는 됐다. 우르르 몰려 당사자를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수군수군 떠들던 학생들의 모습이 애리얼에게도 좋게 비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그런 학생들을 소문내는 데 이용하겠다고 싫은 걸 참고 가만히 둔 렉시우스도 소름 돋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조용해지고 그래.”
애리얼의 복잡한 심경을 들추듯 렉시우스의 여상한 목소리가 딴지를 걸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