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54화 (54/264)

54화

애리얼은 어느새 바닥으로 가 박혔던 눈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냥 선배가 무슨 심정일지 생각해 봤어.”

“그래? 내가 무슨 심정일 거 같은데?”

“갑갑하고, 화도 났다가 조금은 불안해지고……. 선배도 그러지 않을까. 시선이 쏠렸을 때 내가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니까 네 경험에 날 대입했다는 거야?”

“선배의 상황을 나에게 대입해 봤어. 그러면 내가 선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해는 무슨, 내가 욕하는 거 듣고 소름 끼쳐 했을 거 같은데.”

렉시우스가 저를 향한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을 생각해 준 그녀의 말에 기꺼워했다.

그는 웃을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으로 애리얼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일 관에 온 이유나 묻자. 나 보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모처럼 수업이 없는 날이라 아카데미 지리를 익히려고 왔어. 일 관부터 교사 동을 죽 돌아볼 계획이야.”

“시답잖은 이유네.”

무난한 대답에 렉시우스는 실망했다는 어투였다. 그러고는 시큰둥하게 침묵했다. 반면 애리얼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저…… 선배, 아까 황태자 전하와 황자 저하는 여기에 없다고 그랬잖아.”

“왜, 궁금하냐?”

“응.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어디 갔나 싶어서.”

“외교로 다른 나라에 갔어.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없을 거야.”

생각보다 꽤 긴 부재 기간에 애리얼은 슬쩍 스며 나오려는 미소를 억지로 참아 냈다. 껄끄러운 대상이 없는 지금은 균등 공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고. 그런 만큼 초연하고 냉정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 기회에 적어도 렉시우스는 하트 반 개 이상, 레이신은 한 개 이상…… 상승하게 만들어 둬야 해.’

그리고 둘 중에 공략이 더 시급한 것은 호감도가 아예 없는 레이신 쪽이었다.

‘그러려면 별관, 거기서 레이신을 끌어내든 내가 들어가든 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애리얼로선 레이신을 끌어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호감도 하락을 각오하고서라도 들어가서 접점을 만드는 게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관리실에서 열쇠도 안 빌려주는데, 어떻게?’

애리얼은 방도를 고심하다 문득 입을 열었다.

“선배, 별관은 어떻게 들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애리얼의 질문에 렉시우스가 슬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별관?”

“응. 특이하게 생겨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잠겨 있더라고.”

“관리실에서 열쇠 받아 가면 되잖아.”

“그러려고도 해 봤는데 공자 서하께서 쓰고 계시니 열쇠를 줄 수 없대.”

“아, 레이가 쓰고 있었어?”

렉시우스는 이제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크게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애리얼을 향해 무심히 통보했다.

“그럼 못 가. 포기해.”

“……어떻게 방법 없어?”

“없어. 레이가 다 막아 놨을 거야.”

렉시우스는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했다. 관리인에 이어 그까지 저런 반응이니 애리얼은 솔직히 포기에 가까운 심정이 되었다. 도대체 뭘 하기에 문을 다 막아 놓고 별관에 틀어박힌 건지, 레이신의 의중만 궁금해졌다.

“도대체 뭘 하시길래 그렇게 다 막아 놓고 독점하실까…….”

“뭐 하긴. 레이 그놈, 그냥 처자고 있을걸.”

“잔다고? 별관은…… 서하의 개인 공간이야?”

“개인 공간은 무슨. 걔가 그냥 자기 것처럼 쓰는 거지.”

렉시우스는 여러 번 있었던 일이라는 것처럼 익숙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애리얼은 더 심각해졌다. 오늘 같은 일이 일상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공략에 큰 난항이었다.

‘계속 거기서 지내진 않겠지? 최소한 수업을 들으러 나오긴 할 테니까 그때…….’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레이신에 대한 생각으로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이 약간 흐려졌다.

“뭐에 그렇게 골몰해?”

“……응?”

애리얼은 허공을 보다가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레이신에 집중하느라 공략 2순위로 밀려난 렉시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카우치에 삐딱하게 앉은 그의 표정은 이루 말할 길 없이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이제 나랑 대화할 생각은 딱히 없나 봐?”

“……뭐? 아니, 아니야.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해. 사과…….”

“애리얼 허클리.”

그가 애리얼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들어 본 적 없던 딱딱한 어투로.

거기서부터 애리얼의 입이 딱 다물렸다.

제 잘못을 시인하듯 당황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완연한 애리얼을 보며, 렉시우스의 눈은 차게 식었다.

“너, 내가 우습지.”

“…….”

“반말도 하고 이름도 부르고 하니까 쉽게 대해도 될 거 같지.”

“…….”

“황족 놈들 사정을 알고 나니까 이제 레이신 그놈에 대해 묻고, 그것도 끝나니까 날 보지도 않고 입 닫고. 꼬박꼬박 대답해 주니까 내가 네 정보책이라도 되는 거 같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부정하고 싶었으나 애리얼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해명을 듣고 싶은 얼굴이 아니었다. 애리얼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조금이라도 말을 꺼내려 들면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강제된 침묵 속에 애리얼은 눈치만 보았다.

렉시우스의 눈은 이제 애리얼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감정을 다스리는 듯, 아니면 그 감정을 곱씹는 듯 그는 모호한 불쾌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창밖을 주시했다.

“나랑 대화할 거면 나한테만 집중해야지.”

혼잣말처럼 경고를 중얼거린 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선배…….”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애리얼은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렉시우스가 홀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휴대폰이 울어 댔다.

우우우웅-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동 소리까지 울리자 애리얼은 발작하듯 소스라쳤다. 그 때문에 앞에 놓인 테이블에 정강이를 부딪치기까지 했다.

“……윽!”

뼈가 찌르르 울리는 고통이 닥쳤다. 그러나 아픈 델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몸의 통증보다 다른 게 더 중요했다. 애리얼은 아픈 다리를 대충 문지르며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큰일 났다!’

황족이 없는 기간이라는 좋은 기회에 되레 호감도를 날려 먹다니. 머리가 어질거렸다.

“만회해야 해.”

애리얼은 렉시우스를 쫓아갈 생각으로 홀을 뛰쳐나갔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테이블에 부딪쳤던 다리가 찌르르한 아픔을 호소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다급히 복도를 달렸으나 그의 모습은 1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애리얼은 뒤늦게 휴대폰에서 그의 상세한 위치를 확인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1관에서 보이던 그의 초상화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외곽(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렉시우스는 순간 이동으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허탈함에 복도에 멈춰 서 있다가 뒤늦게 주변을 인식했다. 수업이 한창인 시각이라 1관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그녀는 얼른 휴대폰을 숨겼다.

이곳에 더 있어 봐야 얻을 것이 없었다.

애리얼은 근처 사용인에게 부탁해 곧장 차를 호출했다. 별관이 걸리긴 했으나 당장은 출입할 마땅한 구실도 방법도 없었다.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렉시우스의 호감도가 떨어진 지금, 레이신의 공략은 뒤 순위로 미뤄야 할 일이 되었다.

차에 오른 애리얼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머릿속은 렉시우스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야만 뭐가 잘못됐는지 파악하고 내려간 그의 호감도를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아까 화낼 때, 내가 네 정보책이라도 되는 것 같냐고…… 그랬었지.’

그 외에도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날카롭게 토로하던 불만 전반을 되뇌었다. 자기한테만 집중하라거나, 필요한 정보를 얻었으니 더는 대화하지 않을 거냐는 등. 그는 애리얼이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인물들에게만 관심을 가진 게 아니꼬웠던 듯했다. 그렇다면 그 저의는 무엇일까.

‘질투…… 라기엔 호감도가 빈약하고.’

애리얼은 상황에 맞게 그의 본심을 찬찬히 짐작해 보았다. 하트 반 개가 떨어져 나가게 만든 그 분노의 이유.

‘고위 계급은 자의식이 강한 경우가 많으니까, 은연중에 무시당했다고 느낀 걸지도 몰라.’

귀족적 오만함 혹은 개인적인 자긍심이나 자존심. 애리얼의 무심한 태도로 인해 그런 것들에 생채기가 나서 분노했다고 보는 것이 아마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애리얼은 그렇게 추측했다.

다만 이런 경우엔 어떻게 기분을 풀어 줘야 하는가.

“으음…….”

애리얼은 작게 침음했다. 거듭된 고민으로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눈썹이 찌푸려졌다.

레이신의 공략으로 골머리를 앓던 그녀는 이제 렉시우스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고심했다.

***

렉시우스는 인적이 드문 흙길을 걷고 있었다. 버드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고 그 옆으로는 그리 깊지 않은 강이 흐르며 좋은 경치를 만들어 냈다. 운치 있고 고요한 장소였다. 간간이 산새 우는 소리와 흐르는 물소리만 들렸다.

그는 문득 걷기를 멈추고 강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의 짙푸른 풍경을 반사하는 강물이 연녹색으로 빛났다. 아카데미를 두르고 황성까지 흐르는 강이었다. 잔잔한 수면이 꼭 거울 같았다. 복잡하게 엉킨 그의 속과는 다르게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래서 그는 심사가 뒤틀렸다.

콰앙!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매끈하던 수면이 깨어지며 해일처럼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철썩, 요동치는 물결이 렉시우스가 선 곳으로 덮쳐 오려 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휙 휘둘렀다.

쾅!

물결이 더 잘게 깨져 나가며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열기와 함께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렉시우스는 그대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차가운 액체가 그의 온몸을 적시고 내려왔다. 순식간에 교복이 쫄딱 젖었다. 축축해진 적발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었다.

“후…….”

그가 긴 한숨을 쉬었다. 찬물이 머리칼을 타고 뺨으로 뚝뚝 떨어졌다. 뜨겁던 머리가 겨우 식는 느낌이었다.

렉시우스는 오늘따라 이례적인 짓을 많이 했다. 상대방의 무심함에 과민한 것, 그것 때문에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것, 결국 관대하기로 한 상대에게 화를 낸 것, 뛰어서도 따돌릴 수 있을 상대 때문에 홧김에 순간 이동을 써서 마력을 낭비한 것, 쓸데없는 화풀이로 수면 밑을 터트린 것.

그는 제가 한 일을 찬찬히 곱씹었다. 그러자 자신의 가장 첫 번째 행동부터가 이해가 안 됐다.

‘애리얼이 좀 무심했다고 내가 화가 나?’

허, 의문이 깊게 밴 숨이 터졌다. 줄줄이 이어진 행동의 시발점부터 어이가 없었다.

오늘 그의 앞에서 애리얼이 보인 행동은 계급을 따지고 보면 무례한 행동이 맞았다. 그러나 그가 용인한 무례함이 아니었던가. 반말을 쓰고 가볍게 군 것은 그가 지금껏 모두 눈감아 주고 일부는 권유까지 해 온 탓이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애리얼은 오늘도 존댓말을 쓰며 깍듯하게 굴었을 거였다. 오늘 이리 굴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은 그였다.

여태 용인해 오다 오늘따라 관대하지 못했던 그가 이상한 것이었다.

“왜 그랬지, 내가.”

렉시우스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애리얼이 보인 고작 찰나의 무심함 때문에 속 좁게 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특별히 허락한 상대에게는 너그러움과 관용을 아끼지 않는 게 그의 특징이자 장점이었다. 그걸로 상대의 존경과 신뢰를 사고 충성을 바치게 했다. 그러려면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만큼 결과는 확실했다.

애리얼은 아직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상대였다. 그런데 그는 관용을 보여야 할 그녀에게 충동적으로 감정을 쏟아 내고 나왔다.

‘이딴 식으로 구는 건 열 살도 안 된 애새끼일 때나 했던 건데.’

그는 착잡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전쟁터에서 누적된 경험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짓은 몹시 무용한 것임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열넷 이후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분노해 감정을 쏟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화를 내다 못해 애먼 데서 분풀이까지 했다.

‘내가 걔한테 뭔 기대라도 하다가 배신당하기라도 했나. 왜 거기서 화를…….’

제 속을 스스로 파헤치던 그가 문득 굳었다. 삽질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덧 정답에 다다랐다. 감정이 언뜻 정의될 것 같아지자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걔한테 기대를 했다…… 고?’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