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의 손이 닿자 애리얼은 흠칫 떨었다.
“겁먹지 마. 치료하는 거야.”
렉시우스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애리얼의 상처 부위를 단단히 감쌌다.
그에 애리얼은 강한 압박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치료라는 건 거짓말이 아닌 모양인지 오히려 욱신대던 통증이 가라앉았다. 피부에는 그의 묵직한 손과 그 체온만 느껴졌다.
“고…… 고마워!”
“오늘 감사 많이 받네. 아, 열두 시 넘었으니 다른 날인가.”
무덤덤하게 반응한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상처 부위에서 손을 뗐다. 그의 손이 거둬진 자리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심하던 멍 대신 매끈한 피부가 돌아와 있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상처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제 앞으로 다가온 그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고 말했다.
“선배는 정말 굉장한 사람 같아.”
“뭘 새삼스레.”
그는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한 손으로 애리얼을 번쩍 일으켰다.
바닥에서 순식간에 일으켜진 애리얼은 여전히 렉시우스의 손을 꼭 붙든 채였다. 렉시우스가 의아해하며 보자 그녀는 그대로 눈을 맞추었다.
“마법이랑 마력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잘 알게 됐어. 선배가 얼마나 굉장한 실력자인지. 또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내가 얼마나 큰 행운아인지.”
“갑자기 뭐냐?”
“그냥 감사 인사의 연장이야.”
애리얼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스스럼없이 말했다.
“선배는 가끔 심술궂기도 하고 무서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한텐 결국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그래서 고마워. 정말로 많이 고마워.”
그녀는 언젠가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한결 솔직해진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씩 호선을 그리며 상승했다.
“모자란 나를 지도해 주는 것도, 시간표를 짜 준 것도, 오늘 다친 걸 치료해 준 것도. 모두 다 고마워. 언젠가 나도 선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환한 미소를 내비치며 애리얼이 말을 맺었다. 공략과 관계없는 순간의 진심이었다.
렉시우스는 굳은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준 채 있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그렇게 고맙다니, 앞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지 기대할게. 잘해 봐.”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애리얼에게 붙들린 자신의 손을 휙 뺐다. 진심 어린 감사에 이어진 대답으로 보기에는 무심하다 못해 다소 삭막한 태도였다.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는 오전부터 계속 여유가 없어 보였다.
우우우웅-
주머니에서 또 한 번 휴대폰이 울렸다.
호감도가 다시 하락한 건 아닐까, 애리얼은 두려움에 송연해졌다.
“열두 시 넘었다. 빨리 들어가라.”
그가 열람실의 문간에서 애리얼에게 말했다. 그러곤 그녀를 기다리는 일 없이 먼저 도서관을 떠났다.
애리얼 역시 곧장 도서관을 나섰다.
그렇게 기숙사로 돌아온 애리얼은 방 안에서 곧장 휴대폰을 켰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호감도가 올랐다. 그것도 연달아 두 번이나.
애리얼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화면만 주시했다. 떨어졌던 하트 반 개를 만회하는 건 물론이고 황족이 없는 동안 달성하고자 했던 나머지 하트 반 개도 채웠다. 하트 하나가 하루 만에 다 오른 것이었다.
문득 주마등처럼 렉시우스가 보였던 오늘의 언행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화를 냈다가, 말을 번복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고, 평소보다 냉담하게 대꾸하고, 여유가 없던 그 모습들.
“이것 때문이었구나.”
호감도가 격변한 만큼 그의 심정도 상당히 요동쳤을 게 분명했다. 당연히 평소처럼 굴기는 어려웠을 터. 그래서 그는 결국 애리얼도 알아챌 만큼 동요하고 말았다.
‘그럼…… 이제 렉시우스는 어떻게 나올까? 호감도가 많이 올랐으니 날 대하는 것도 변하게 되려나?’
변화를 확신할 순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행동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스카이라는 하트가 두 개일 때부터 황자비에 관한 권유를 해 왔다. 렉시우스도 두 개가 되었으니 그와 같은 양상을 보일지 궁금했다. 원래라면 아무리 스카이라와 같은 호감도라도 렉시우스가 약혼을 권유하진 않으리라 봤겠지만, 일전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마공전의 대련에서 렉시우스가 ‘대공자의 부인’이라는 단어를 꺼냈던 것을, 애리얼은 선명히 기억했다.
“똑같이 그러면 안 되는데.”
스카이라랑 똑같이 그러면…….
애리얼은 불안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
야심한 시각.
렉시우스는 기숙사를 벗어나 아카데미 교사 동의 별관으로 향했다. 차도 부르지 않고 순간 이동도 쓰지 않았지만, 그가 교사 동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볍게만 뛰어도 속도가 무척 빨랐다. 장미색 벽돌 건물 사이를 그는 밤 사냥을 나선 맹수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별관의 문 앞에 선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문을 툭툭 찼다.
“레이.”
친우의 이름을 부르자 단단한 나무 문이 벌컥 열렸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늘어트린 레이신이 조금 졸린 얼굴로 나타났다. 그를 보고서 렉시우스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대우가 많이 좋아졌네. 직접 문도 열어 주고.”
“뭐 하러 왔어.”
“별건 아니고.”
저렇게 운을 떼는 걸 보니 별일이구나, 직감한 레이신이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인데.”
“들여보내 주면 말할게.”
“문 닫고 들어와.”
마지못해 허락한 레이신이 뒤도 안 보고 그대로 층계를 올라갔다. 렉시우스는 그의 부탁대로 철저히 문단속을 해 주고서 계단을 올랐다.
별관의 원형 내부를 따라 나선 계단이 이어졌다. 중간층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레이신은 방금까지 잠을 자던 매트리스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 외의 가구라곤 낮은 테이블과 작은 책장이 다였다. 벽지도 바르지 않아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벽에서는 먼지 냄새가 났다. 조명이라고 둔 것도 기름 램프 하나뿐이라 방 안은 온통 우중충했다.
렉시우스가 형편없는 내부를 눈에 담고선 혀를 찼다.
“이딴 데서 잠이 와?”
“보기보다는 괜찮아.”
“하긴 네가 뭘 가리겠냐마는.”
귀족이라면 잠깐 머물기에도 끔찍해할 만한 방이었으나 렉시우스는 별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친우인 레이신은 여기서 무려 몇 시간이고 자는 인간이었다. 레이신과 오래 알고 지낸 렉시우스는 열악한 공간을 자주 마주했었고 나름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금세 이곳에 수긍한 렉시우스가 매트리스의 귀퉁이에 털썩 앉았다.
“공작저는 아직도 네 마력에 기대고 있어?”
“이 시기에만.”
“뭘 이 시기만이야. 네가 부재하는 만큼 미리 끌어가는 거잖아. 일 년 내내 기대는 거나 다름없지.”
“좀 자면 해결돼.”
“동면 수준으로 자면서 좀은 무슨.”
“내 사정은 됐고, 무슨 일이야.”
그러자 렉시우스는 잘만 떠들던 입을 닫더니 묘한 미소를 흘렸다.
“애리얼……. 아, 이렇게 말하면 넌 모르지?”
“…….”
“네가 예쁘다던 애. 스카이라가 데려왔던 여자.”
“누군지 알아. 무슨 일인지나 말해.”
“걔가 조만간 별관을 찾아올 거거든? 내가 열쇠를 줄 거야.”
“…….”
“걔가 별관으로 오면 조금만 협조해 줘.”
“……하아…….”
레이신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일이 피곤해질 것임을 느꼈다. 졸음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지긋지긋 눌러 댄 그는 애리얼을 떠올렸다.
‘그만두라고 친히 알려 줬는데, 말을 안 들었군.’
안 그래도 피곤한 시기였다. 잘 시간까지 쪼개 가며 그녀에게 걸음했던 일이 물거품이 되어 그는 짜증이 났다.
레이신은 현재 일시적 마력 고갈 상태라 렉시우스가 휘두르는 데 무방비했다. 그래서 그는 애리얼을 일부러 찾아가 직접 경고를 남기는 이례적인 일을 한 거였다. 애리얼이라는 변수만 없다면 렉시우스가 자신을 찾을 일은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랬는데 결국 그 변수가 발목을 잡고 그가 우려하던 일을 끌고 왔다.
“왜 별관이야.”
“걔가 별관을 보고 싶대.”
“여긴 관광지가 아니야.”
“그렇다고 네 소유도 아니지.”
“사 둘 걸 그랬네.”
“야박하게 굴지 말고 구경꾼 한 명만 허락해 줘.”
“뭘 하려고 자꾸 이래.”
“비밀.”
“…….”
“장난이고, 너한테 힘든 일은 아니니까 기분 풀어.”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다른 일은 할 필요 없이 그냥 별관 진입만 허락해 주면 돼.”
“결계를 끄라는 거야?”
“아니, 그냥 둬. 들어오는 것만 허락해.”
“그럼 걔 다칠 텐데?”
레이신이 의아해하며 묻자, 렉시우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적발 아래의 진한 금색 눈동자가 의중을 드러낼 듯 말 듯 모호하게 깜박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그의 미소에 레이신은 간만에 소름이 끼쳤다.
***
「금요일
오후 2시 - 미술과 감상(특별관, 제3 전시실)」
애리얼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앉았다. 샛노란 빛의 햇살이 노곤했다. 그녀는 아직도 졸린 기운이 묻어나는 눈가를 문질렀다.
간밤의 길었던 시간 속에 애리얼의 결론은 현상 유지로 가닥이 잡혔다. 어차피 렉시우스와는 목요일과 토요일의 약속으로 계속 만나야 한다. 괜히 거리를 벌려 봤자 배움이 필요한 애리얼로선 손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약혼과 같은 권유를 할 가능성이 적었다.
대련에서 렉시우스는 황자비와 대공자의 부인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이는 그가 스카이라의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아마 스카이라가 황자비 자리를 제안했다가 애리얼에게 거절당한 것도 알 테지. 황자비 같은 제국의 중대사를 중앙 귀족인 그가 모를 리는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렉시우스는 스카이라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리얼은 집안에서만 평생을 살아오다 이제 겨우 사회에 발을 들인 존재였다. 그녀가 약혼과 같은 중대한 사회적 결합을 부담스러워하며 거절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애리얼은 어색하고 부담스럽다는 말로 스카이라의 제안을 빠져나갔다.
실패한 약혼이라는 수를 재차 쓸 만큼 렉시우스는 눈치 없지 않았다.
‘그런 만큼 선배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지만.’
애리얼은 그에 관해서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어 골치가 아팠다. 대응하기 힘든 인물은 두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스카이라는 그녀에게 그나마 가장 편한 상대였다. 행동이나 그 의도가 예측하기 쉽게 명확했으니까. 물론 예상하기만 쉽다는 거지, 실제 스카이라의 행동은 그녀에게 있어 굉장히 곤란하고 난감한 종류였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어젯밤처럼 길어지는 생각을 잘라 냈다.
인공 호수를 빙 둘러 간 차가 베이지색의 건물 앞에 멈췄다. 커다란 기둥 네 개가 삼각형의 지붕을 받치고 양옆으로 거대한 천마(天馬) 조각상이 세워진 입구가 보였다.
아카데미 건물 중에서도 웅장하기로는 최고로 칠 만한 건물이었다. 중앙 동의 강당도 이보다는 덜했다.
특별관의 거대한 입구 앞에 내린 애리얼은 소인이 된 기분이었다. 환히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에 난 창으로 햇살이 비쳤다. 사람이 없어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내리쬐는 밝은 빛줄기가 신성하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이 거대한 공간을 잠시 감상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움직이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느리게 움직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입구에 놓인 안내 지도를 발견했다. 이젤처럼 놓인 흑판에는 흰색으로 특별관의 내부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굉장히 넓으면서 상당히 복잡한 구조라 길을 모르면 우왕좌왕하기 쉬워 보였다.
애리얼은 지도로 다가가 길을 단단히 외운 뒤 걸음을 옮겼다. 공간이 너무 넓어 안쪽으로 발을 디딜 때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홀을 몇 개 지나자 곧 목적지가 보였다.
<제3 전시실>
문패를 확인한 애리얼은 섬세한 양각이 돋보이는 마호가니 더블 도어를 밀고 들어갔다. 크고 무거운 문은 생각보다 부드럽게 열렸다. 안쪽에서 짙은 나무 향이 밀려왔다.
벽도 바닥도 모두 진한 빛깔의 목재였다. 언뜻 봤을 땐 불을 켜지 않은 것처럼 어두웠다. 천장에서는 팬이 느리게 돌아가며 커다란 공간의 공기를 순환시켰다. 조각상과 그림들은 규칙성 없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전시실이라기보단 다락방 같은 분위기였다.
애리얼은 예술품에 닿지 않게 걸음을 조심하며 중간으로 걸어갔다. 바닥의 두꺼운 카펫 덕에 발소리가 가려졌다. 소파가 여러 개 놓인 중앙으로 들어서자 벽을 빙 둘러 발코니 같이 튀어나와 있는 2층이 보였다. 홀의 양쪽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의 앞에는 벨벳으로 된 줄이 쳐져 있었다.
‘올라가면 안 되는 곳인가?’
호기심에 애리얼은 발꿈치를 들고 고개를 젖히며 2층을 올려다보았다. 2.5m 남짓한 높이의 2층, 난간 사이의 널찍한 틈으로 1층과 마찬가지로 진한 목재를 쓴 바닥이 보였다. 그 위로 은빛 자수가 놓인 진녹색의 카펫이 깔려 있다. 호두나무로 만든 어두운 색의 가구들이 즐비했다. 그 가운데 누군가의 다리가 눈에 띄었다. 흰 교복을 입고 있었다.
“왔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애리얼은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허우적거리다가 빠르게 상체를 굽히며 다리에 힘을 줬다. 가까스로 몸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넘어지는 불상사를 겨우 막은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리얼은 웃음소리만 듣고도 상대의 신원을 알 수 있었다.
“렉스 선배.”
“올라와, 애리얼.”
그가 한층 다정해진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