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애리얼은 벨벳 줄을 한쪽으로 치워 두고 계단을 올랐다. 2층은 아래층보다 조명이 더 적고 어둑어둑하여 아늑한 분위기가 났다. 마호가니로 만든 난간 너머로는 1층 홀이 훤히 보였다. 유서 깊은 연극장의 발코니석 같았다.
“여기야.”
묵직한 음성이 재차 그녀를 불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애리얼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통 어두운 것투성이인 공간에 홀로 백색 옷을 입은 렉시우스가 보였다. 그가 웃으며 손짓했다. 애리얼이 오기를 기다린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애리얼은 의아해졌다.
‘기숙사에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는데?’
방을 나서기 전만 해도 렉시우스의 초상화는 분명 교사 동에 있었다. 그새 순간 이동을 한 건지 여기에 와 있는 그가 신기했다. 더군다나 그는 굳이 이 수업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교양 수업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며, 스카이라와 달리 애리얼의 수업을 따라다니거나 하는 경향도 없었다.
‘마공전을 도강하러 왔던 건 일시적인 변덕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늘 또…….’
연이은 교양 수업에서까지 그의 얼굴을 보게 되니, 애리얼은 그가 스카이라처럼 구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난밤과 비슷한 걱정을 연신 떠올리며 렉시우스에게로 다가섰다.
적갈색 가죽 소파에 앉은 렉시우스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무표정하면서도 아주 약간 올라간 입꼬리가 나른해 보였다.
“여기 앉으면 시선도 피하기 쉽고 밑에도 다 보이고, 좋아.”
렉시우스가 애리얼더러 앉으라는 말을 에둘러 했다. 애리얼은 군말 없이 그의 옆에 착석했다.
친구가 없어 외롭게 다닐 거라 예상한 것이 무색하게도 아카데미에서 애리얼의 옆자리는 비는 일이 없었다. 아카데미에 온 첫날, 강당에서 체감했던 그녀의 외로움은 이제 아이러니한 것이 되었다.
“선배도 미술에 관심 있어?”
“그러는 넌 관심 있어?”
“그림은 좋아해. 아는 건 없지만, 잘 그린 그림을 보고 싶어서 시간표에 넣었어. 이 기회에 안목도 조금 길러 보고.”
“그래서 그렇게 주렁주렁 챙겨 왔냐.”
렉시우스가 애리얼이 메고 온 가방을 슬쩍 눈짓했다. 네모난 새철 백에는 미술에 관한 서적 세 권과 공책, 필기구 따위가 가득 들어 있었다. 많은 것을 담느라 가방은 그녀의 몸집으로 들기엔 조금 컸다.
애리얼은 무릎에 올려놓은 제 가방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미술에도 문외한이라…… 마력학이나 마공학 수업처럼 적을 게 많을 것 같아서 챙겼어.”
“이 기간에 교양 수업은 거의 노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 수업은 특히 더 그렇고.”
“그럼 적을 게 없어?”
“가르치는 것도 없어.”
그럼 정말 그림이나 보고 마는 수업인가, 애리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것도 또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미술과 감상’이라는 이름이니 미술품 몇 개는 볼 수 있겠지.”
“기대하는 거 같아서 말하는데, 참고로 여기 미술품 수준 별로다.”
애리얼이 기대를 하는데 렉시우스가 초를 쳤다. 이곳 특별관의 전시 수준을 훤히 꿰고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오히려 호기심이 동했다.
“선배는 여기 특별관에 있는 예술품 본 적 있어?”
“봤지. 진품이지만 습작이 많고,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 상태도 안 좋고.”
“우리 집……? 선배네 집에 그림 같은 거 많아?”
“보고 싶으면 오든지.”
“그래도 돼?”
“대공저에다 네 이름 정도는 일러둘게.”
“고마워.”
“근데 난 없을 수도 있어.”
“……그럼 안 갈래.”
애리얼은 조금 들떠 보이던 것이 무색하게 차분해졌다. 단호히 거절하는 그녀의 모습에 렉시우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 하면 오해한다.”
애리얼은 그의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말뜻을 알아챈 그녀는 방금의 제 언행을 황급히 수습했다.
“아니, 그…… 선배와 안면이 있어 가는 건데 선배가 없으면 이상하잖아. 아는 사람도 없는데, 백작 공녀인 내가 대공저를 전시실 가듯이 하는 건 너무 건방진 것 같고…….”
“뭐 어때. 원래도 건방진데.”
“그건 선배의 허락하에 한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니까.”
“내 탓이라는 거야?”
“반쯤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애리얼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 렉시우스는 기분 나빠 하는 기색 없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져 올수록 전시실에는 학생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십여 명 정도의 소수 인원이었다. 2층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1층 홀에 자리 잡은 채로 교수를 맞았다.
애리얼은 순간 이 자리에 앉아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제 옆자리에 앉은 렉시우스를 떠올리고는 금세 안심했다. 설령 2층이 출입 불가인 자리라 하더라도 렉시우스 정도의 계급이 쓴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교수는 대강의 인원 확인도 없이 그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미술과 감상. 심미안을 만족시켜야 할 수업인데 교수의 얼굴이 이래서 미안합니다.”
교수가 우스갯소리를 던지자 아래층의 학생들 몇몇이 경쾌하게 웃었다.
“어려운 건 없는 수업이고, 또 교양이고 해서 머리 아플 건 없습니다. 다들 다른 수업에서 이미 충분히 머리 아팠을 테니 이 수업에선 아름다운 작품이나 보며 눈이나 달래도록 합시다.”
차분한 말투로 가벼운 농담을 던진 교수가 주변 미술품에 덮인 천을 걷어 냈다. 애리얼은 교수가 걷어 낸 작품을 자세히 보고 싶었으나 2층이라 여의치가 않았다.
교수는 작품을 보여 주며 예술가의 이름과 함께 간단한 흥미 위주의 설명을 덧붙였다. 몇몇 농담을 곁들이자 주변 학생들은 웃음을 터트리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렉시우스가 말했던 대로 타 수업에 비교하면 확실히 노는 것에 가까운 강의 방식이었다.
그들과 동떨어진 애리얼은 씁쓸한 거리감을 느끼며 아래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교수가 설명하는 작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아 서글펐다. 이게 뭐가 명당이라는 건지. 애리얼은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림이 안 보이는데……. 여기 좋은 자리 맞아?”
“네 시력이 나빠서 그래.”
렉시우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애리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난간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아래층을 보기 위해 열심인 모습이었다.
반면 렉시우스는 지루해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이었고, 30분 남짓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쭉 그랬다.
그래서 애리얼은 교수가 떠나자마자 렉시우스도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여겼다. 솔직히 수업 도중에 나갈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모두 떠나고 전시실이 조용해 졌다. 렉시우스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애리얼은 그에게 다른 용건이 있는 것 같아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있어. 좋은 일.”
그가 씩 웃었다.
“뭔지 물어도 돼?”
애리얼은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렉시우스가 웃는 낯으로 블레이저의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건넸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은으로 된 열쇠가 찬 기운을 뿜으며 그녀의 손안에 안착했다. 나비 모양으로 화려하게 조형된 손잡이가 눈에 띄었다.
“이게 뭐야?”
“별관 열쇠.”
“그렇구나, 별관의……. 별관이라고?”
애리얼은 뒤늦게 별관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그녀의 두 눈이 렉시우스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음성으로 답했다.
“별관, 가고 싶다며.”
“그래서 선배가 이걸……?”
“이제 갈 수 있겠네. 잘됐다.”
렉시우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왜 열쇠를 가져왔는지 알 수 없어서 애리얼은 더욱 꺼림칙했다. 어제만 해도 별관에는 못 간다고 못을 박더니, 떡하니 그 열쇠를 건네는 게 정말이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애리얼이 질문을 채 던지기도 전에 렉시우스가 자리서 일어났다. 불러 세우기도 어렵게 그는 빠른 걸음이었다. 이어 그는 있는지도 몰랐던 2층의 원형 창문으로 향하더니 창틀의 잠금을 풀고는 유리창을 밀어 올렸다. 끼긱, 뻑뻑한 소리를 내며 열린 창문으로 그가 훌쩍 뛰어내렸다.
애리얼은 열쇠를 든 채로 그가 사라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
졸지에 별관 열쇠를 획득한 애리얼은 의심에 가득 찼다. 그러면서도 교사 동으로 향하는 차의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열쇠. 그것도 관리인이 빌려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한 별관의 열쇠를 얻었다.
렉시우스가 갑자기 이걸 빌려다 애리얼에게 넘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호감도가 올라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줬다기엔 찝찝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노골적인 덫의 느낌이 났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별관으로 갔다. 두 황족 형제가 없는 가운데 레이신을 만날 절호의 기회였다. 놓치기엔 너무 아깝다.
‘최소한 선배는 나한테 하트 두 개분의 호감은 있어. 나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당장 어제 오른 호감도가 그녀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 줄 것이었다.
별관 근처에 도달한 애리얼은 차에서 내려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2관 - 제3 교육실(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교사 동 - 별관』
레이신의 초상화는 여전히 별관에 머무르는 상태. 렉시우스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눈에 띄었으나, 애리얼은 크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위치가 교육실인 걸로 보아 그는 수업을 듣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열쇠를 꺼냈다. 별관 문 앞에 선 그녀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특별히 생각해 둔 용건이나 구실은 없었다. 가문의 이름으로 쓸 수 있는 최고의 수는 이미 썼고, 그녀가 개인으로 제안할 수 있는 건 대단치 않았다. 기껏해야 미래의 허클리 백작가 가주 자리를 걸고 하는 충성 맹세뿐. 추상적인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솔렘가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거래였다. 하지만 애리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그거라도 걸어야 해.’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 맞추는 애리얼은 자못 차분했다.
끼이, 나무 문 열리는 소리가 영 매끄럽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어 안을 살폈다. 돌벽이 그대로 드러난 내부는 투박했다. 그리고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레이신은 자고 있나?’
애리얼은 바로 어제 렉시우스가 말해 줬던 정보로 그의 상태를 추측했다.
“레이 그놈, 그냥 처자고 있을걸.”
그때 렉시우스의 말투는 나태한 인간을 타박하는 듯한 말투였다. 애리얼은 레이신이 이 별관에서 그저 게으름을 피우는 중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문간을 넘어 진입하자 애리얼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둑해졌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딱딱한 바닥을 디뎠다.
인기척이 없고 먼지가 쌓인 별관의 내부는 폐가처럼 칙칙했다. 좁은 원형의 공간에는 나선 계단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애리얼은 검은색 철제 계단이 빙글빙글 꼬아져 있는 위를 바라보았다. 중간층이 없는지 계단은 끝이 없이 높았다. 천장은 시커멨고, 창문도 없는 벽에는 촛불 같은 수준의 조명만 일정 간격으로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젖히고 있자니 애리얼은 이상하게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높다란 계단을 따라 검은 뱀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그녀는 젖혔던 고개를 얼른 당겼다. 그러나 흐트러진 호흡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무섭게 겁이 났다.
“왜…… 흐으, 숨이…….”
쌕쌕, 어긋나는 숨소리를 내며 애리얼은 닫힌 문으로 향했다. 호흡이 어긋나자 머리가 빠르게 혼탁해졌다. 이윽고 시야까지 흐리게 보였다.
“여기, 뭐가 이상…….”
기도가 꽉 막힌 듯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애리얼은 자신에게 폐소 공포증이라도 있던 건가 싶었다. 꺽꺽 말려드는 호흡 속에서 그녀는 가까스로 문고리를 쥐었다. 그러나 힘이 없어서 문을 열지는 못했다.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수렁에 빠진 듯 머리가 침잠하다, 툭, 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놓쳤다.
애리얼의 정신은 가물가물, 풍전등화처럼 불안하게 일렁였다. 어렵게 힘을 모아서 다시 오른팔을 들고 문고리를 쥐었다. 그렇게 아래로 힘을 주는 순간, 그녀의 몸은 내려가는 문고리와 함께 무너졌다.
쾅. 쿠웅.
애리얼은 문에 이마를 박고 둔탁한 소음을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철컥, 내려갔던 문고리가 원위치하며 잠겼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