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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58화 (58/264)

58화

낮게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어떻게 수습 ……”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북북 찢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욕설이 들렸다.

애리얼은 웅웅거리는 이명 속에서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웠다. 시야는 성에 낀 유리를 덧대 놓은 듯이 뿌옇고 흐렸다. 몸은 가위에 눌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아아, 애리얼은 입을 뻐끔거렸다. 소리를 내고 싶은데 불가능했다.

그녀의 흐릿한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다가왔다.

“너, 지금 출혈이 심해.”

탁한 저음이었다.

‘……출혈?’

그러고 보니 제 머리로 뭔가 축축한 게 흐르는 듯도 했다. 힘겹게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기절하면 안 된다.”

그가 당부했다.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내가 지금 마력이 ……”

애리얼이 눈을 씀벅거렸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데 이명 탓에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웅얼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오감이 전부 흐렸다. 모든 것이 멀어졌다. 애리얼의 의식은 다시금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붙잡아도 안개 자욱한 머리는 또렷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의식의 줄이 뚝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절하지 마라.”

남자가 다시 한번 당부했다. 명령처럼 엄했다. 그러나 애리얼에겐 그 명을 따를 기력이 없었다.

또다시 기절이었다.

***

레이신이 렉시우스의 얼굴에다 피 묻은 천을 던졌다. 렉시우스는 날아온 천을 쥐고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불그죽죽한 천에는 아직도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심했다고?”

“아주 거지 같은 경험이었어.”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레이신의 말투는 정말 이례적으로 거칠었다. 자다 말고 입은 셔츠를 찢어 가며 남의 상처를 수습한 얼굴에는 진한 피로감이 보였다. 걸레짝이 된 셔츠를 다시 입을 수 없어 그는 상체를 탈의한 상태였다. 바지만 입고서 매트리스에 앉은 그는 방만해 보였다.

“설명해 봐.”

렉시우스가 묻자, 레이신은 거친 욕을 한 번 뱉고는 말을 이었다.

“혼자 머리를 처박고 쓰러져서, 찢어진 데를 내가 다 수습해야 했어. 근데 당장 마력이 없어서 마법은 못 쓰고, 환경은 같잖고…….”

레이신은 말끝에 또 욕을 붙였다. 그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난 듯했다.

렉시우스는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긴 했다. 마력이 없어 가뜩이나 골골대는 시기에 억지로 깨워진 것도 모자라 중하게 다친 사람을 수습하기까지 하면, 아무리 무감정한 레이신이라도 머리꼭지가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렉시우스가 그에게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레이신의 분노는 정당했고, 렉시우스는 그걸 이해했다.

그런데도 렉시우스에게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다.

“원래라면 다치든 말든 버려뒀을 놈이 왜 사서 고생을 했어?”

“얼마 전에 허클리 백작가랑 거래를 했어. 가문 인장이랑 같이 투표권을 대가로 들고 왔더라.”

가문 인장, 투표권. 그 두 가지가 언급되자 렉시우스는 상당히 놀라워했다. 제국 귀족으로서 가지는 최고의 가치를 허클리 백작이 솔렘에 건 것이었다. 물론 투표권이야 솔렘이 백표 중립만을 요구한다는 걸 알기에 한 행동이겠지만, 그래도 위험 부담이 상당한 행위였다.

렉시우스는 내막이 궁금해졌다.

“그 정도를 걸었다고? 왜?”

“솔렘의 초대장을 요구했어. 백작이 중앙 정치에 뛰어들 요량인지. 미래를 위한 투자 같은 거겠지.”

레이신은 숨길 생각 없이 술술 말했다. 그답지 않게 이타적인 일을 한 내막을 굳이 거짓말로 둘러댈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렉시우스가 알아도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그저 귀찮아서 숨겼던 것뿐이니까.

“근데 거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백작의 딸이 죽었다고 해 봐. 그것도 내가 있던 별관에서.”

“죽는다니? 심층 결계 깐 거 아니었어? 대련장을 제외한 교내에서 과하게 공격적인 결계를 깔면 교칙 위반이야.”

“그런 거 안 깔았어. 네가 말한 대로 심층 결계야.”

레이신이 그리 대답하자 렉시우스는 의아해졌다.

심층 결계는 마력에 따라 반응하는 게 달라졌다. 마력이 없는 이는 결계를 느끼지 못해 결계에 진입하는 것부터 막혔다. 마력이 약하면 힘이 빠져 주저앉는 정도였다. 마력이 평균인 사람은 힘이 빠지는 데 더해 약간의 두통이 수반됐다. 간혹 코피를 흘리는 경우도 있었다. 설령 별관 문이 열리더라도 침입자가 계단을 오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능만 보면 진입 차단용 결계 중에선 꽤 상냥한 축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것들은 보통 침입자의 사지를 조각내거나 하는 종류였다. 심층 결계는 교칙을 아슬아슬하게 준수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마력이 강하면 결계로 인한 충격이 심하겠지만, 마력이 강한 자는 애초부터 호신용 방어 결계를 두르고 다닐 테니 심층 결계에 걸릴 일이 없었다.

바꿔 말하면, 방어 결계를 두르지 않은 강한 마력 보유자는 심층 결계에서 큰 이상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보통 기절이나 혼절, 발작의 증세를 겪는다. 그리고 그 경우, 심층 결계의 시전자는 학우를 다치게 한 죄로 아카데미 징계를 받게 된다.

결계를 칠 때 레이신은 그런 특수 상황을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심층 결계에서 마력이 강한 자로 분류되는 이는 특수 마법 등급 이상의 마력 보유자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특수 마법 등급 이상은 딱 네 명뿐이었다.

데본시아, 스카이라, 렉시우스 그리고 레이신 그 자신.

이들이 심층 결계 따위에 당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미만의 마력 보유자는 심층 결계에서 크게 다칠 일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교칙에 어긋나는 상황은 있을 수 없는 거였다.

“근데 얘가 기절을 하더라. 머리까지 박고, 아주 피를 철철 흘리면서.”

“……기절한 걔는 지금 어디 있는데.”

렉시우스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기절했는지, 의문인 점은 제쳐 두고서 애리얼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레이신은 기다렸다는 듯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비켰다. 그에게 가려져 있던 매트리스 끝 쪽, 램프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자리에 이불을 덮은 자그마한 윤곽이 보였다.

미동도 없이 누운 가녀린 인영을 보자 렉시우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베개도 없이 누운 머리엔 찢은 셔츠 자락이 둘둘 감겨 있고, 그 사이로 삐져나온 까만 머리칼은 피에 젖어 있었다. 징계 때문에 의사도 부르지 못해 레이신이 한 처치는 저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는 이마를 짚고서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러려고 한 게…….”

렉시우스의 입에서 후회 비슷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를 보던 레이신이 피곤에 전 얼굴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좀 자게, 빨리 데리고 가.”

***

애리얼은 가늘게 눈을 뜨고서도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희미한 욕설에 깨어났다가 다시 기절하고서 지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확실한 건 자신의 몸을 감싼 주변이 아주 푹신하고 부드럽다는 거였다.

심지어 라벤더와 같은 좋은 향기까지 났다. 적당히 촉촉한 공기가 기분이 좋았다.

애리얼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깜박이다가 입술을 벌렸다.

“아, 아…….”

약간 갈라졌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고작 이것만으로도 애리얼은 큰 안도감이 들었다.

옆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애리얼은 베개에 머리를 댄 채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침대 옆으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그 위의 하얀 화병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대의 가습기를 생각나게 하는 외양이었다.

애리얼은 신기한 것을 본 듯 눈을 크게 깜박거리며 열심히 주시했다.

안개를 닮은 기체가 자욱한 너머로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붉은 머리칼, 넓은 어깨, 흰 교복.

“……선배?”

“일어났어?”

렉시우스가 수증기 너머에서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얼굴이 흰 기체에 가려져 흐릿하게 보였다.

“아…… 응.”

“아픈 데는 없고?”

“괜찮은 거 같아.”

애리얼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기절했던 것 같은데 몸은 가뿐했다.

시야가 높아지니 수증기에 가려졌던 렉시우스의 모습이 명확하게 내려다보였다.

그는 과도로 복숭아를 깎고 있었다. 능숙한 칼질에 껍질이 얇게 벗겨지고 뽀얀 과육이 매끈하게 드러났다. 그는 작게 자른 복숭아 조각들을 흰 접시에 올려 애리얼에게 건넸다.

“먹을래?”

렉시우스가 작게 미소를 머금고서 물었다. 그와는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람 찌르는 데나 일품일 것 같은 험악하고 오만한 인상으로 자그마한 복숭아를 예쁘게도 잘라 냈다. 지나친 괴리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애리얼은 혹시 제 눈이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했다.

“선배?”

“응.”

“렉스 선배?”

“응.”

“렉시우스?”

“응.”

“대공자 저하.”

“왜요, 백작 공녀님.”

믿기지 않아 연신 불렀는데도, 그는 짜증 한번 안 내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직접 깎은 과일을 재차 권유했다.

“복숭아 먹을래?”

“고, 고마워.”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복숭아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향긋한 과육이 부드럽게 씹혔다. 자다 일어나 바로 먹은 것인데도 금세 허기가 들 정도로 달았다.

그녀가 오물거리며 한 조각을 다 먹으니 그가 또 물었다.

“하나 더?”

“괜찮아.”

렉시우스는 옆 테이블에다 접시를 내려놓았다. 마치 시중을 드는 집사처럼.

애리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렉시우스가 맞는 건가?’

뭘 잘못 먹고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그가 저럴 리 없었다. 그는 거만하게 명령을 내릴 입장이지, 절대 누굴 보살필 사람이 아니었다.

‘자는 동안 하트가 늘기라도 한 건가?’

호감도가 궁금해진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치마 주머니를 뒤지려 했다. 하지만 주머니가 있어야 할 곳엔 얇은 옷의 감촉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아색의 파자마 드레스 차림새였다.

“교복이랑 소지품은 네 하녀가 챙겨 갔어.”

어리둥절해하는 애리얼을 보고서 렉시우스가 넌지시 알렸다. 애리얼의 손이 그를 인지하고서 자연히 멈췄다. 혹여 의심을 살까 애리얼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렉시우스의 눈동자가 바닥을 향해 차분히 내리깔렸다. 제 눈치를 볼 필요 없다고, 그녀에게 말하는 듯도 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거 같은데.”

그가 질문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애리얼은 잠깐 멈칫했다가 곧장 입을 열었다.

“여기 어디야?”

“기숙사 동 병실.”

“어떻게 된 거야?”

“별관에서 결계 과민 반응으로 쓰러져서 내가 데려왔어.”

“결계…….”

“미안해.”

공기가 갈라지는 것 같은 묵직한 목소리였다.

렉시우스가 사과했다. 그가 사과를 했다.

대련장에서 기사와 싸우라고 떠밀었던 남자였다. 황족 사이에 끼어 싸워 보라고 단도를 던지던 남자였다. 그는 다치면 치료는 해 줄지언정 자신이 벌인 일을 미안해하는 이는 아니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널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는 꼭 후회하는 것처럼 말했다. 스스로 한 일을 콕 집어 그래선 안 됐다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듯 보였다.

애리얼은 눈앞의 남자가 렉시우스의 겉가죽을 뒤집어쓴 타인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선배,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큰일.”

역시 뭐가 있었다. 애리얼은 오만한 그를 이렇게 바꾼 대단한 일을 궁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었는데 그래?”

대번 물어 오는 애리얼의 기세에 그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조용히 전했다.

“애리얼, 네가…… 죽을 것처럼 피를 흘렸어.”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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