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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59화 (59/264)

59화

렉시우스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한마디 하고 입을 다문 그는 심각한 낯빛이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그의 생소한 모습이 애리얼을 불안하게 했다.

“……나, 많이 다쳤었어?”

“쓰러지다가 이마를 부딪쳐서 두피까지 길게 상처가 났는데, 상처가 커서 출혈이 심했어. 의식도 전혀 없고, 위험했지.”

“그럼…… 그렇게 된 걸 선배가 구해 준 거야?”

“맞아. 근데 고마워하진 마.”

“…….”

“이번만큼은 그러지 마.”

렉시우스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짓눌리는 표정이었다.

애리얼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하고 싶은데, 감사를 말하면 그가 울어 버릴 것 같았다.

***

렉시우스는 애리얼이 다칠 걸 알고 별관 열쇠를 넘겼다.

애리얼을 괴롭게 만들려는 생각으로 벌인 일은 아니었다. 그녀를 괴롭히려면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많았다. 겨우 겁주는 정도에 그치는 심층 결계를 겪게 하는 건 너무 싱거운 짓이니까.

그는 이 일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난밤 그는 애리얼의 무릎 아래에 보이던 심한 멍 자국을 보고서 겁이 났다. 칼바람을 맞은 듯 서늘하게 쿵 심장이 떨어지더니, 이윽고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쿵, 박동마다 아려 오는 감각은 병이라고 느낄 만큼 이상했다.

그게 과연 뭐였는지. 그저 일시적인 건지, 아니면 비슷한 일에 또 반응할 것인지. 그걸 알아보기 위해 그녀를 조금만 다치게 할 생각이었다.

심층 결계에서 애리얼이 크게 다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학생은 심층 결계에서 힘이 빠져 주저앉거나 잠깐 코피를 흘리고 마는 게 다였다. 그저 행동 제한을 위해 만든 결계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렉시우스는 애리얼도 안전하다고 여겼다.

“별관, 가고 싶다며.”

“그래서 선배가 이걸……?”

“이제 갈 수 있겠네. 잘됐다.”

애리얼의 마력 등급은 높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그녀의 마력 등급이 높았다면 상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래서 준 거였다. 기껏해야 코피나 흘리라고. 그러면 지난밤에 겪은 그 감정이 일시적인 건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기절 같은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하필이면 문의 쇠판에 이마를 부딪치고 머리까지 길게 이어지는 상처가 나서도 안 되는 거였다. 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에 무너지는 일 같은 건…….

“선배는 가끔 심술궂기도 하고 무서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한텐 결국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그래서 고마워. 정말로 많이 고마워.”

애리얼의 말이 떠올랐다.

피투성이인 애리얼을 안아 들자 렉시우스는 지독하게 괴로워졌다. 그녀의 무게는 지나치게 가벼웠고,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녀를 받친 렉시우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애리얼이 부서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다친 이를 데리고 순간 이동을 할 수는 없었다. 마력은 알게 모르게 사람에게 부하를 끼쳤다. 상처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당장 치료할 수도 없었다. 간단한 외상 정도야 어디서든 치료가 가능했지만, 이렇게 크게 다친 경우에는 먼저 의사에게 보여야 후유증이 없었다.

렉시우스는 교사 동의 보건실을 지나쳐 제1 기숙사 동으로 달렸다. 한달음에 울타리를 이룬 에메랄드그린을 넘어 기숙사의 정문을 통과했다. 벼락같은 속도였다.

도착한 그는 제대로 갖춰진 병실에 애리얼을 눕히고 대기 중인 의사를 불러 상태를 보게 했다. 시녀들은 금방 필요한 것들을 챙겨 왔고, 의사는 애리얼의 상태를 빠르게 진단 내렸다.

“기절한 것 자체는 결계를 벗어난 뒤라 문제가 없으나, 상처가 커서 출혈이 심했던 게 탈진을 불러왔습니다.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한 뒤 빠져나간 혈액을 보충해야 합니다. 추가적인 감염 예방도 필요하고요.”

“알았어. 나가서 대기해.”

렉시우스는 의사에게는 진단만 내리게 하고 치료는 자신이 직접 했다.

그는 길게 찢어진 애리얼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제 손을 덮었다. 마법을 써서 벌어진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한 뒤 흉터를 지웠다. 그런 다음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입 안으로 검지를 집어넣었다. 검지가 가만히 숨은 혀를 누르며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에게서 넘어간 마력이 빠져나간 피를 대신했다. 십여 분이 지나자 죽은 이처럼 희게 질려 있던 애리얼의 혈색이 상당히 나아졌다.

고순도 마력으로 행하는 렉시우스의 치료 마법은 일반적인 의술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다년간의 전쟁 경험으로 다져진 덕분이었다.

상처가 온전히 치유된 애리얼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그녀가 누운 침대 아래로 렉시우스가 무릎을 꿇고 무너졌다. 쿵쿵쿵쿵, 흉근이 들썩일 만큼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는 시트에다 이마를 묻었다. 바닥을 향한 시야가 잘게 흔들렸다.

“후으…… 흐…….”

호흡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난간을 꽉 붙들었다. 이를 악물고 숨을 골랐다. 엇나갔던 호흡이 천천히 돌아왔다.

렉시우스는 자신이 방금까지 얼마나 심한 긴장 상태였는지 깨달았다. 애리얼보다 훨씬 심한 부상자도 보았고, 시체는 물론이거니와 사체로 쌓은 산도 보았는데, 그녀가 다친 것에 이렇게나 동요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몇 초간 자조하며 힘없이 웃은 그는 이내 추스르고 일어나 시녀를 불렀다.

“씻기고 갈아입힌 다음에 개인실에 눕혀 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공녀의 전담 하녀도 불러와. 제 주인의 개인 소지품을 수습하게 해.”

“네, 저하.”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리자 렉시우스는 지체 없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일단락을 마쳐 겨우 냉정해진 그의 머릿속에는 애리얼과 결계에 관한 의혹이 빙빙 돌았다. 그의 계획을 박살 내고 애리얼을 다치게 만든 문제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그녀의 적성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만 이 의문이 풀어질 듯했다.

그는 차를 불러내 곧장 황성으로 향했다.

「마력 적성 검사 결과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

마력 순도: 보통

마력량: 상

마력 계열: 특정 계열로 정의할 수 없음

지속력: 중

회복력: 중

모든 부분을 종합한 결과, 대상의 적성은 불분명하나 마력량이 뛰어난 것으로 판명. 마력의 적성 및 한계를 <특수 방어 마법>으로 정의함.」

렉시우스는 결과지에서 의미심장한 정황을 포착하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용대로라면 애리얼은 심층 결계에서 코피를 흘리는 정도여야 했다.

‘그런데 기절을 했다고.’

그는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며 차분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황성 기록실에 보관된 정식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렉시우스는 이 결과지를 믿을 수 없었다.

결계는 일종의 공식과 같았다. 일정한 값을 입력하면 결계는 세워진 공식대로 답을 산출했다. 쇠를 튕겨 내라고 입력하면 쇠로 된 모든 것을 튕겨 내는 게 결계였고, 특정인에게만 출입을 허용하라고 입력하면 특정인만을 들여보내는 것이 결계였다. 결계는 부서질지언정 오류를 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심층 결계는 결계로 들어온 대상의 마력이 높을수록 큰 충격을 가했다. 그런 심층 결계의 판단에 따르면 애리얼은 고위 등급의 마력 보유자였다.

결계와 서류로 된 결과지. 어느 쪽이 잘못된 건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계략의 냄새를 맡은 렉시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썹을 일그러뜨린 그는 곧장 이 짓거리의 주모자를 떠올렸다. 제국에서 제국 법을 어기고서 멋대로 조작질을 할 안하무인. 오직 한 명밖에 없다.

‘데본시아.’

애리얼의 마력 적성 검사를 데본시아가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니 조작의 유력 용의자는 데본시아일 수밖에 없다.

‘애리얼이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할 셈이었겠지. 그래야 마력이 발전하지 못해 다루기 쉬워질 테니까.’

렉시우스는 그의 의도를 대강 간파해 냈다.

하필 데본시아가 수도를 떠나 있는 바람에 추궁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기록실을 나온 렉시우스는 제 수하를 조용히 불러냈다. 북관의 후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그는 황실 기사단의 상급 기사였다. 황족의 직속 호위를 맡은 이들 중 하나이며, 남부 전쟁에서 렉시우스에게 목숨을 빚진 아버지를 두었다.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오늘부터 네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황태자를 관찰하여 그 동향을 나에게 보고해라.”

“근무지를 포함, 호위 일정은 바꾸지 않고 말입니까?”

“그럴 필요 없다. 일정 중에 황태자와 마주칠 때만 관찰해라. 보고 주기는 사흘에 한 번이다. 그 안에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것도 빠트리지 말고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저하.”

***

렉시우스는 정보책으로 기사를 심어 두고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의심을 피하느라 기사의 행동을 제한한 바람에 들어오는 정보는 적겠지만 이로써 데본시아의 동향은 대충이나마 파악이 가능해졌다.

기숙사에 돌아온 그는 곧장 애리얼이 누워 있는 개인 병실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 복도 유리창에 반사된 제 모습을 보고는 굳어 멈췄다. 셔츠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의 성향을 아는 그의 수족들은 우습게 넘기겠지만, 애리얼은 아닐 것이다.

렉시우스는 걸음을 돌려 제 기숙사실을 먼저 들렀다. 피에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새 셔츠로 갈아입어 멀끔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는 멀쩡해진 제 외관을 거울로 점검한 뒤 방을 나섰다.

렉시우스가 개인실로 들어가자 침대 옆자리를 지키던 하녀가 다급히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렉시우스는 빠르게 예를 갖춘 하녀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침대에 곱게 눕혀진 애리얼을 주시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아 침묵이 이어졌다.

평민인 하녀는 대귀족이 먼저 묻기 전까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카논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조아리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애리얼에게 두 눈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네가 애리얼의 전담 하녀구나.”

“네, 맞습니다, 저하.”

“수고 많았다. 잠시 물러가 있어라.”

“네, 저하.”

카논이 고개를 조아린 자세 그대로 무릎만 세우고 일어나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개인실에는 렉시우스와 애리얼만 남았다. 하얗고 얇은 캐노피 커튼을 투과한 노을이 눈부시게 빛났다.

방 안으로 비쳐 든 노을의 빛줄기가 애리얼의 얼굴에 닿았다. 눈부심에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렉시우스는 곧장 침대를 돌아가 두꺼운 커튼을 쳤다. 바깥의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꼼꼼히 창문을 가려 주고서 애리얼의 상태를 세심히 확인했다. 그녀의 표정이 나른하게 펴지자 그는 조용히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하녀가 쓰던 의자는 그가 쓰기엔 너무 작아서 치워 버렸다.

시계추 소리조차 없는 조용한 방.

개인실 침대에 곱게 눕혀진 애리얼을 보는 그는 묘하게 계속 초조했다. 뭔가를 더, 더 많이 해 놓고 싶었다. 불편한 게 아무것도 없도록.

약품 냄새가 희미하게 밴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향기가 좋은 생화를 가져다 놓게 했고, 공기가 건조해지지 않도록 장식용 물병에서 수증기가 발생하게 조치했다. 과도를 가져와 테이블 한쪽에 놓인 과일 바구니에서 복숭아를 꺼내 깎기까지 했다. 대부분은 애리얼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그의 주관에 따라 불필요한 것까지 벌인 형태였으나, 어쨌든 그는 아주 별의별 짓을 다 했다.

제 감정의 자각은 끝끝내 거부하면서.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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