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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60화 (60/264)

60화

애리얼은 주말 동안 개인 병실에서 머물렀다. 의식을 차렸을 때부터 그녀의 몸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으나, 렉시우스의 고집 때문에 그녀는 이틀간 병실에 잡혀 있었다.

렉시우스는 그 이틀간 병실을 들락거리며 애리얼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주 잠깐만 와서 얼굴만 비치고 다시 곧장 떠났지만, 애리얼은 그마저도 유별나게 생각되었다.

“대공자 저하께서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나 봐요.”

“카논…….”

“제 좁은 식견으로는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어서요.”

카논은 이틀 동안 렉시우스를 관찰해 얻은 추론의 결과를 그렇게 말했다. 애리얼은 그녀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카논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리얼은 별관 열쇠를 건네받을 때 보았던 렉시우스의 의미심장한 태도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함정과 같은 뭔가를 준비했고, 애리얼이 그쪽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유인했다. 애리얼도 느끼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각오하고서 발을 들였다. 그때는 당장 레이신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으니까. 심하게 다칠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였다. 결국 다치기만 하고 레이신은 만나지 못했으니 두 배로 손해인 셈이었다.

렉시우스가 꾸민 함정도 애리얼이 이렇게까지 다치는 쪽은 아니었을 거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가 보인 태도에는 죄책감이 컸고, 일이 이 정도로 커질 줄 몰랐다는 듯 굴었다.

“이해할 수 없어.”

“무엇을요?”

카논이 되묻자 애리얼은 생각에 잠긴 듯 곰곰이 고민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대공자님의 행동이…… 잘 가늠이 되질 않아.”

“내가 원래 예상 밖이긴 하지.”

벌컥 문을 열고 난입한 목소리에 애리얼과 카논이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렉시우스는 그들의 반응을 상당히 재밌어하며 애리얼의 앞으로 걸어왔다. 카논이 눈치 빠르게 병실에서 물러났다.

순식간에 둘만 남고 문이 닫히자 애리얼은 딴청을 부리듯 시선을 피했다. 입가에 미소를 걸친 렉시우스가 여느 때처럼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왜 죄지은 것처럼 굴어. 내 욕이라도 하는 중이었어?”

“그건 아닌데……. 미안해.”

“욕한 것도 아닌데 왜 미안해.”

“그래도 선배의 뒤에서 별로 좋은 건 아닌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별걸 다 미안해하네. 이왕 사과할 거면 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하지.”

그의 손이 애리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었다. 애리얼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조용하게 웃고 있었다. 렉시우스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가 어려웠다.

“아, 맞아. 너한테 줄 거 있어.”

렉시우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을 떼고서 블레이저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손가락 사이에 하얀 종이를 끼워 내밀었다.

애리얼은 손을 들어 그것을 받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을 시간별로 나누어 놓은 종이. 애리얼의 아카데미 수업 시간표였다.

애리얼은 그의 품에서 나온 제 시간표를 의아해하며 훑었다. 월요일 마력학과 금요일 교양. 두 가지를 빼면 수업이 하나도 없었다.

“왜 이렇게 텅텅 비었어?”

“너 힘들까 봐.”

하나도 고치지 못하게 할 땐 언제고, 그는 시간표를 뭉텅이로 잘라 내 건네곤 그렇게 말했다.

애리얼은 최근의 렉시우스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그의 호감도는 여전히 하트 두 개로 변함이 없는데, 행동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애리얼은 종잡을 수 없는 그가 의심스러웠다.

“그럼 난 간다.”

그는 거의 백지가 된 시간표만 건네고 병실을 나갔다. 여느 때와 비슷한 퇴장이었다.

***

애리얼은 개인실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천장을 보고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에 한 번 더 방문한 렉시우스는 내일 오전 수업을 빠지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

‘내일 오전 수업도 빠지면 이번 주는 금요일 교양 하나만 남는 건데.’

그러면 애리얼은 일주일을 통으로 노는 셈이었다. 어차피 시간표 확정 전까지는 임시 수업이라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었다. 시간까지 여유 있어졌으니 마력학 수업을 하루 빠진다고 못 따라갈 일은 없었다.

“내일도 늦게 일어나서 밥 먹고 적당히 놀고…… 그래도 되겠지.”

애리얼은 모로 돌아누워서 침대 옆의 커튼을 걷었다. 드러난 창문으로 후원이 보였다. 환한 달빛에 꽃나무의 흐드러진 꽃이 새하얗게 빛났다. 밤 산책을 부르는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시각은 열두 시를 넘겼으나 애리얼은 잠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으니, 이런 풍경을 만끽해도 괜찮았다.

렉시우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빡빡한 시간표는 큰 부담이었다. 싹 비워지니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 오고 고작 이 주가 지났지만, 애리얼은 그간 상당히 힘들었다. 터지는 일은 많은데 공략을 하기는커녕 공부할 거리만 넘쳐 답답했다. 그런데 지금은 뜯어고친 시간표 덕에 확연하게 여유가 생겨 편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애리얼은 별관에 가서 다치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편해진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늦은 밤의 청취가 그윽했다.

“나갈까…….”

애리얼은 중얼거렸다. 아카데미, 그것도 제1 기숙사 동은 보안이 숨 막힐 정도로 철저하고, 그만큼 안전했다. 밤에 나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온종일 개인실에서 지낸 그녀는 이 순간 참을 수 없게 나가고 싶어졌다.

마음을 먹자 곧장 몸이 일으켜졌다. 침대에서 내려온 애리얼은 카논이 준비한 옷 중에서 가볍게 걸칠 걸 찾았다. 서랍을 뒤적거리다 숄을 꺼내는데,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애리얼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렉시우스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사람이니 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면 이런 오밤중에 방문할 이는 없었다. 이 시간에는 시녀도 오지 않았다.

“누구세요?”

문밖의 이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달칵,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서서히 문이 벌어지고,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에 방문자의 외양이 드러났다.

애리얼은 놀라 기절할 뻔했다. 밤중에 비명을 지를까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래진 그녀의 눈이 대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늦은 시각에 미안해. 지금밖에 시간이 안 나서, 실례할게.”

간드러진 목소리가 친절하게 방문을 넘어 들어왔다. 문을 탁 닫으며 입실한 남자가 애리얼의 곁으로 다가왔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그를 불렀다.

“황태자 전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걸음은 계속 물러나다 벽에 막혀서야 멈췄다. 명확하게 그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데본시아는 친절하게 웃었다.

애리얼에겐 눈앞의 그가 환영 같았다.

“외교로 왕국에 가셨다고…….”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어? 스카이라…… 는 아니겠고, 렉시우스가 말해 줬겠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더니 애리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쳤다는 말을 들었어.”

데본시아가 그 말을 꺼낸 순간, 애리얼은 그가 제게 감시를 붙여 뒀음을 알아챘다. 그녀가 다친 것은 렉시우스와 카논을 포함해 극소수만 알고 입단속되는 사안이었다. 렉시우스가 그렇게 조치했다. 황족이든 누구든 알지 못하도록. 그런데 그걸 안다는 건 감시를 붙였기 때문일 테니까.

“걱정했단다.”

그의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했다.

“렉스가 잘 대처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직접 와서 보고 싶었어.”

“…….”

“혹시 아직도 아파? 내가 괜히 온 걸까.”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 네 탓이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제복의 안주머니에서 어떤 것을 꺼냈다. 달빛을 받은 물체가 검게 빛났다.

“그래도 또 다치면 안 되니까…….”

데본시아가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들고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애리얼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가닿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브레이슬릿. 흑수정처럼 어둡게 광택을 내는 구부러진 고리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애리얼이 놀라 얼어 버린 사이, 데본시아가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긴 손가락이 가느다란 손목을 부드럽게 감았다.

“선물이야.”

그가 손수 애리얼의 왼 손목에다 브레이슬릿을 채웠다. 매끄러운 고리가 그녀의 피부에 차갑게 닿았다. 하얀 살결 위로 새카만 줄이 빛났다. 그의 손가락이 풀리고, 대신 얇고 단단한 브레이슬릿이 손목을 차지했다. 거부할 새도 없었다. 어차피 황태자의 선물이라 거부할 수도 없었지만.

애리얼은 당황한 눈으로 이미 채워져 버린 브레이슬릿과 데본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뭐예요?”

“마력을 조절해 주는 거야. 주변에 흐르는 마력을 통제해서 결계를 비롯한 돌발 상황에서 네가 다치지 않게 방어해 줄 거야.”

“어째서 마력을 통제할 필요가 있어요? 방어를 위해서라면 그냥 방어 결계를 치는 게 더 나은 것이 아닌가요?”

“맞아, 결계를 치면 더 편해.”

“그런데 왜…….”

“하지만 넌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마력을 다뤄야 하잖아. 결계를 치면 마력이 아예 차단되어 버리니 안 좋지. 게다가 넌 마력량이 꽤 많은 편이거든. 초보자인 너는 다루기 어려울 수 있으니 보조 기구가 필요할 거야.”

“그…… 렇군요. 감사합니다.”

불신이 어린 눈을 숨기며 애리얼이 어색하게 감사를 전했으나 데본시아는 웃기만 했다. 풀어 달라는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얼굴이었다.

우우우웅-

그녀가 감사를 전한 순간, 침대 옆의 작은 서랍 안에 숨겨 둔 휴대폰이 울렸다.

호감도가 오른 건가?’

애리얼은 서랍에 눈을 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데본시아에게 휴대폰에 관한 빌미를 주는 것은 최악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불편한 듯 브레이슬릿을 매만졌다. 방금의 진동음은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호의를 받아 줘서 호감도가 오른 건가? 아니면 이 브레이슬릿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나? 설마 위험한 기능이 있는 건 아니겠지……. 풀어 달라고 해야 하나? 들어줄 것 같지 않은데…….’

애리얼은 고민을 거듭하다 이내 생각을 멈췄다. 찝찝하면 그가 보지 않을 때 풀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궁금한 게 있었다. 왕국에 가서 일주일은 없을 거라던 그가 왜 여기에 있는가.

“저……. 황태자 전하께선 오늘 귀환하신 건가요?”

“아니, 난 아직 공식적으로는 왕국에 있어. 일정 도중이니까.”

“그럼 어떻게 여길…….”

“순간 이동. 그러니까 금방 다시 가야 해.”

데본시아는 그냥 잠깐 마실을 나온 양 쉽게 말했다. 다시 돌아간다고도 했다.

애리얼은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알아서 입이 안 다물어졌다.

순간 이동은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었다. 고작 몇 미터를 이동해도 일반적인 마력 수준으로는 탈진할 정도의 마력 고갈을 일으켰다. 적성이 아니라지만 압도적인 마력을 가진 렉시우스와 스카이라도 하루에 이동하는 횟수는 5회 이하였고, 그마저도 꺼렸다.

심지어 이동 거리가 멀면 멀수록 한 번에 소모되는 마력은 그 곱절로 불어났다.

그리고 왕국에서 제국까지는 수천 킬로가 넘는 거리였다.

“괜찮아.”

애리얼의 얼굴에 서린 의문을 알아챈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난 등급이 다르거든.”

빈말이 아닌지 그는 방을 나가지도 않고 휙 사라졌다. 정말로 그 거리를 다시 순간 이동 한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등급이 다르다던 그의 말이 신경 쓰였지만, 우선 미뤄 뒀다. 지금은 서랍에 들어 있는 휴대폰이 더 신경 쓰였다.

‘호감도가 올랐으면 오류는 고쳐졌으려나? 아니면 확인이 안 되는데.’

휴대폰의 어둡던 화면이 환해지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호감도만 생각하던 애리얼은 아주 의외의 알림을 받고서 얼어 버렸다.

『첫 번째 분기가 완료되었습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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