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분기?’
애리얼은 잊고 있던 게 다시금 떠올랐다. 황태자의 초대, 마력 적성 검사, 데본시아, 스카이라, 유품, 강, 브레이슬릿.
“하지만 그건…… 몇 달이나 지난 일인데?”
그녀는 당황스러워하며 시스템 창을 터치했다.
『황태자의 초대 이벤트가 종료됩니다. 스토리가 변화합니다.
*두 개의 일반 엔딩이 삭제됩니다. - 대마법사 엔딩(삭제)/전원 친구 엔딩(삭제)
*데본시아 루트의 모든 굿 엔딩이 삭제됩니다.
*분기 보상이 지급됩니다. - ‘호감도 피버 타임’을 획득하였습니다.』
“뭐? 뭐가 삭제돼? 왜?”
애리얼은 당황하여 화면에 대고 물었다. 그런들 휴대폰이 대답해 줄 리 만무했다. 그녀가 알아서 읽고 분석해야 한다.
애리얼은 시스템 창에 떠오른 내용을 찬찬히 읽었다.
표시된 정보는 총 세 가지.
첫 번째, 두 개의 엔딩이 삭제되었다. 마력과 마법 연마로 대단한 마법사가 되는 거로 보이는 대마법사 엔딩과 모두와 친구로 끝나는 듯한 전원 친구 엔딩.
잘은 몰라도 평화롭고 안전한 엔딩이 사라졌다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삭제되었다는 엔딩은 어차피 일반 엔딩. 특별 엔딩을 노리는 애리얼의 입장에서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이 세계에 남을 것도 아니고, 좋은 엔딩이든 뭐든 사라져도 상관없다. 그녀에겐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특별 엔딩만 중요했으니까. 뭐가 어떻게 바뀌든 3년 안에 모두의 호감도를 하트 세 개 이상으로 달성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두 번째, 데본시아 루트의 굿 엔딩 삭제. 그것도 전부 삭제였다. 이제 그의 루트로 들어가면 무조건 좋지 않은 엔딩을 맞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와 엮이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경고와 같았다.
“하필이면…….”
애리얼은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데본시아의 호감도 창은 여전히 오류 상태라 하트의 개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호감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어떻게 방향을 잡고 다가서야 좋을지 판단이 어렵다.
애리얼은 제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을 달빛에 비춰 보았다. 검은색의 몸체가 매끄럽게 반짝였다. 데본시아가 선물이라며 멋대로 그녀에게 채운 물건. 철을 구부려 만든 듯 차갑고 단단한 고리는 맞춤 제작 한 것처럼 그녀에게 딱 맞는 크기였다. 이게 채워지고 난 후에 휴대폰이 울렸다.
‘브레이슬릿을 거부하지 않은 게 분기를 가르는 선택이었던 거야.’
황태자의 초대로 시작된 분기는 황태자가 선물이라며 건넨 브레이슬릿을 착용하는 것으로 비로소 종료되었다.
그녀는 이미 지나 버린 선택에 착잡함을 느꼈다.
엔딩이 예상보다 크게 틀어졌다.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데본시아의 제안을 수락했는데 왜 그의 굿 엔딩이 전부 없어진 건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어차피 목표는 특별 엔딩 하나다.
“다른 엔딩은 없어지든 틀어지든 상관없어.”
그렇게 중얼거린 애리얼은 미련을 쉽게 버렸다. 데본시아와 엮이는 일만 조금 더 신경 쓰면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며 시스템 창의 남은 설명에 집중했다.
마지막 정보, 분기 보상 ‘호감도 피버 타임’의 획득. 분기로 인한 스토리의 뒤틀림과 페널티 수준의 엔딩 변화를 감수하고서 얻은 보상이었다.
‘근데 이거 어떻게 쓰는 거지? 효과는 뭘까?’
궁금증에 애리얼의 손가락이 시스템 창을 눌렀다.
『호감도 피버 타임
*일정 시간 동안 특정 대상의 호감도를 올려 주는 효과를 냅니다.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집니다.
*아이템 창을 열고 [호감도 피버 타임]을 누르면 그 즉시 효과가 발동됩니다.』
‘아이템 창? 그런 게 있었나?’
애리얼의 눈이 화면을 훑어 내렸다. 우측 상단에 조그마한 시스템 창이 보였다.
『아이템』
전에는 없던 생소한 창이었다. 그녀의 손이 이끌리듯 새로 생겨난 항목으로 향했다.
『아이템
*[호감도 피버 타임]』
“누르면 바로 발동…….”
애리얼의 손가락이 글자 주변을 배회하다가 멀어졌다. 그렇게 아이템 창을 닫고선 심호흡을 한 번. 그녀는 숄을 두르고서 병실을 나갔다.
복도에는 풋라이트가 켜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용했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는 하녀가 몇 있어 문 너머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 상시 대기하는 하녀들이었다.
애리얼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굳이 숨을 필요까지는 없으나, 마찰을 피해서 나쁠 건 없었다. 기모 슬리퍼라 큰 소음이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그녀의 앞에 아카데미를 지키는 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문지기처럼 문을 막고 서 있었다. 애리얼을 발견한 기사가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중이십니까?”
“정원에 잠깐 산책하러 나가려고.”
“시각이 늦었습니다.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금방 올 거야.”
“알겠습니다. 다만 일정 거리를 두고 공녀님을 지켜보는 것은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어. 늦은 시각에 미안해.”
“아닙니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기사가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열어 주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는데도 달빛이 비추는 바깥은 무척 환했다. 애리얼은 열린 문을 지나 잔디밭으로 발을 들였다.
밤의 찬 공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숄을 여몄다.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났다. 주변에는 분꽃나무가 만발했다. 하얀 꽃들이 꼭 솜뭉치 같았다.
‘시스템 창, 분기, 호감도, 보상…….’
애리얼은 복잡하게 꼬인 머리를 풀어 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밀려드는 공기가 목이 아플 정도로 차가웠다. 그 덕분에 목을 조여 오듯 갑갑하던 게임의 압박감이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
***
데본시아는 휘청거리다 벽을 짚었다. 빈혈을 앓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몇 달 전 아프다 회복한 몸에 또 열이 돌 기미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숨을 고르다가 시녀를 불렀다.
“메이지.”
주변을 지키던 시녀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서 냉큼 다가왔다.
“네, 전하.”
“얼음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메이지라 불린 시녀가 미리 준비해 둔 얼음 컵을 내밀었다. 데본시아는 유리잔에 담긴 각 얼음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젠 열이 오를 것 같으면 알아서 얼음을 물고 있게 됐다.
왕국에서의 일정은 아직 이 주나 더 남아 있었다. 황태자가 아파 쓰러지면 제국의 체면은 물론 왕국의 입장도 말이 아닐 것이다.
얼음을 두어 개 더 녹여 먹은 뒤 추스르고 섰을 때, 그의 눈앞엔 스카이라가 다가와 있었다.
“너, 어디가 잘못된 거야?”
스카이라가 연회에서 금방 나온 듯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그를 주시했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 첨예한 의심이 돋아 있었다.
그럼에도 데본시아는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날 걱정해?”
스카이라는 대답 없이 눈만 가늘게 좁혔다. 추궁하는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데본시아는 모르는 체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노을의 잔상이 남은 하늘은 연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카맣던 아카데미와는 전혀 달랐다. 명백한 시차를 보여 주는 풍경이 그의 눈을 피로하게 했다.
제국은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이었으나, 왕국은 아직 오후 여덟 시였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을 시간이다.
그 사실을 기억해 낸 데본시아가 나긋하게 타이르는 목소리를 냈다.
“황족이 둘이나 자리를 비우면 뭐라 여길까. 멀쩡한 너라도 자리를 지켜야지, 스카이라.”
“넌 왜 멀쩡하지 않은 건데.”
“글쎄, 죽을 때가 됐는지도.”
데본시아는 제 직위를 이용해 능청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답변에 따라 반역이나 모독죄로 몰아붙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긍정의 낌새를 보이면 제국의 차기 권력의 죽음을 바라는 것으로 간주당할 수 있다. 실로 불쾌하고 무서운 화법이었다.
스카이라는 그의 이런 수작질을 몇백 번이고 겪으며 살아왔다. 황자인 그가 말실수 좀 했다고 중벌이 내려지는 일은 없었지만, 꼬투리를 잡히면 상당히 귀찮았다. 이럴 땐 무시해 버리는 게 제일이었다.
“…….”
“농이었는데. 얼굴 좀 펴.”
“농 같은 소리 하네.”
정색하는 스카이라의 반응에 데본시아는 싱겁게 웃다가 사용인들을 물렸다. 한 번 휙 휘둘러지는 손짓에 시녀와 호위가 빠르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데본시아는 중요한 용건을 꺼내 물었다.
“플라넬의 제안은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 원래 예정된 것도 아니고 사담으로 던진 말이니 애초에 공식 입장을 낼 필요가 없어. 그쪽이 정식으로 청하면서 뭐라도 같이 제시를 해야 내가 생각이라도 하지.”
“매정한 대답이네. 그래도 왕녀는 너를 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 조금은 상냥하게 굴어 주는 게 어때?”
“내가 왜?”
단호한 답변에 데본시아는 무심코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스카이라의 언행에서 명백한 적개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과거에서부터 비롯된 오래된 증오 혹은 열등감. 며칠 전 대련을 통해 폭발할 뻔했던 그 감정 말이다.
“걱정하지 마. 이번엔 빼앗지 않아.”
“걱정 안 해. 어차피 넌 내 것이 아니면 뺏지도 않잖아.”
“틀린 말은 아니네.”
데본시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창틀을 짚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하늘의 동쪽을 향했다. 제국이 있는 방향이었다. 스카이라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채고 이유 모를 불쾌함을 느꼈다.
“이제 물을 건 끝났어?”
스카이라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데본시아는 여전히 그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서 대화를 이었다.
“넌 나한테 물을 게 남은 모양이네.”
“너, 마력에 문제 있어?”
“마력이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야, 스카이라.”
“내가 그딴 것도 모르고 물은 거 같아? 가르치려고 들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왜? 뒤를 캐 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니?”
“…….”
“침묵은 좋은 선택이 아니야. 침묵은 긍정으로 보이기 쉬우니까.”
데본시아는 늘 스카이라를 타이르듯 조롱했다. 스카이라는 그게 끔찍하게도 싫었으나 타국에 와서까지 멱살잡이를 할 정도로 경우 없지는 않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진 표정을 겨우 다스리고는 제 형을 향해 쏘아붙였다.
“말을 돌리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지. 꼭 허를 찔려서 그러는 것 같잖아? 슬쩍 던진 질문이 마치 사실이라는 것처럼.”
스카이라가 날카롭게 말을 맺었다. 맹점을 잘 찌르고 들어간 말이었으나 데본시아의 뻔뻔한 면상은 미동도 없이 그림 같은 미소를 띄웠다.
기분이 더러워진 스카이라는 곧장 문을 열고서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그가 떠나고 나자 데본시아는 미소를 지워 냈다. 그 역시 기분이 더러웠다. 서로가 서로의 맹점을 찌른 날이었다.
“메이지.”
데본시아가 언령으로 제 수족을 불러냈다.
그 즉시 문밖에서 대기하던 메이지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제 주인의 의중을 물었다.
“명하시겠습니까.”
“플라넬의 제안을 받아들여야겠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외우고 그대로 플라넬의 왕에게 전하렴.”
메이지는 명령을 듣고 외우기 위해 황태자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서 메이지의 귓가에 은밀한 내용을 소곤거렸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