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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62화 (62/264)

62화

애리얼이 일어난 시각은 오전 열 시. 마력학 수업이 막 시작한 시각이었다. 커튼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을 느끼며 그녀는 이불을 걷었다.

카논이 아침 식사를 가져온 것도 그쯤이었다. 애리얼의 전담 하녀인 만큼 카논은 그녀가 일어나는 시각을 예민하게 알아챘다. 크림커피와 단 빵, 과일을 담은 트레이가 테이블에 놓였다.

애리얼은 빵 한 쪽과 귤 반 개를 먹은 뒤 커피 잔을 들고서 말했다.

“이것만 마시고 원래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대공자 저하께선 아가씨가 좀 더 머무시길 바라는 눈치시던데요.”

“하지만 아프지 않은걸. 아프지도 않은데 병실을 쓰려니까 오히려 내가 눈치 보여서 불편해.”

“아가씨께서 그러시다면야……. 짐은 바로 옮겨 둘까요?”

“그래 줄 수 있어?”

“몇 개 놔두지도 않은걸요.”

카논은 곧장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랍에 넣어 둔 옷 몇 벌과 테이블에 놓인 책 세 권. 그게 애리얼이 가져온 개인 물품의 다였다. 카논은 적은 짐을 한 가방에 전부 싸 넣었다.

“먼저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응. 데리러 오진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미리 가서 짐을 정리해 넣고 있을게요.”

“나도 곧 갈게.”

“네.”

한 손으로 가볍게 가방을 든 카논이 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가 되자 애리얼은 카논에게 맡기지 않은 유일한 물건을 침대 옆 서랍에서 꺼냈다. 한 손에는 커피 잔을 쥐고서 화면을 켰다. 우측 상단에 어제 새로 생긴 아이템 창이 보였다.

보상으로 받은 호감도 피버 타임을 누구에게 언제 쓸 것인가.

‘스카이라가 두 개 반, 렉시우스가 두 개, 데본시아는 굿 엔딩 삭제라 무턱대고 호감도를 올리면 위험하고…….’

솔직히 레이신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방향을 잡은 그녀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병실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가 트레이를 치우자 애리얼은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사용하는 이가 별로 없는 탓인지 기숙사는 늘 조용한 편이었다. 그래서 다른 소음이 있으면 알아채기가 쉬웠다.

애리얼은 제 방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소음을 들었다.

요란하지는 않은 당당한 발걸음이 내는 소리. 발소리를 죽이는 사용인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서 내려오는 이를 기다렸다.

“선배.”

애리얼은 계단을 밟는 다리만 보고서도 막힘없이 그를 불렀다.

렉시우스는 웃는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다가 애리얼을 눈에 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그가 반갑게 맞아 줄 줄 알았던 애리얼은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렉스 선배?”

“너, 대체 무슨 꼴로 다니는 거야.”

그는 목소리마저 굳은 얼굴처럼 딱딱했다.

렉시우스의 타박에 애리얼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옷감이 꽤 두꺼운 편인 하얀 잠옷 원피스가 보였다. 격식이 없다 볼 순 있겠지만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기숙사는 개인적인 생활 공간이기에 뭘 입어도 규율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성 중앙관에서 데본시아가 가운 차림으로 다녔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애리얼은 뭐가 잘못된 건지 몰랐다. 시녀를 비롯한 사용인들도 애리얼의 차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이 옷이 별로야?”

“그게 아니라, 왜 그러고 다니냐고.”

“아……. 원래 방으로 짐을 옮겨 뒀거든. 옷은 가서 갈아입으려고.”

“그래서 잠옷 바람이라는 거야?”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잠깐 이동하는 거니까.”

애리얼이 대수롭잖게 말하자 렉시우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의 표정 변화를 발견한 애리얼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렉시우스는 한숨을 쉬며 제 겉옷을 벗었다. 그는 하얀 교복 블레이저를 애리얼의 어깨에 둘러 주더니 단추까지 잠갔다. 둘의 덩치 차이가 큰 탓에 그의 블레이저를 입은 애리얼은 망토나 코트라도 두른 모양새가 되었다.

블레이저를 넘겨주고 셔츠 바람이 된 렉시우스가 계단 난간을 짚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네 뒤로 정문에 경비 기사가 둘 있어.”

“…….”

“만약 저 둘이 네 쪽으로 돌아봤다면, 나는 저 둘을 패 죽였을지도 몰라.”

그의 눈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살벌했다.

애리얼은 이것저것 따지고 들 때가 아님을 느꼈다.

“……잘 챙겨 입고 다닐게.”

“그래. 조심하고, 빨리 올라가 봐.”

렉시우스의 저음이 조금 상냥해졌다. 애리얼은 그를 뒤로하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그는 계단을 지킨 채 멀어지는 애리얼을 바라보았다.

2층 복도에 진입하자 애리얼은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조금 숨이 찼다. 그녀는 제 몸에 입혀진 하얀 블레이저 자락을 말아 쥐었다. 아까의 일을 떠올렸더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규율에 어긋나지도 않는 두꺼운 침의 차림새로 잠깐 다녔다고 기사의 목숨을 두고 협박을 하다니. 그것도 이 기숙사에 있는 기사는 전부 황실 기사단 출신인데.

‘질투 한번 무섭다.’

하트는 고작 두 개임에도 렉시우스의 행동 변화는 꽤 컸다. 애리얼은 하트 한 개에 담긴 애정도가 행동과 태도에 큰 변화를 부를 정도로 상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문득 걱정스러웠다.

게임이 정한 하트 세 개는 어쩌면 마지노선일지도 몰랐다.

호감도 하트가 세 개를 넘어서는 순간 그건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끊어 낼 수 없는 인연이 될지도 몰랐다. 애리얼의 예상은 그랬다.

그럼에도 호감도를 올려야 했다.

‘거북하긴 해도, 확실하지도 않은 예측으로 움츠러들면 안 돼. 어차피 다 추측일 뿐이야.’

그녀는 일어나는 불안을 침착하게 다스리며 자신의 방을 향했다.

애리얼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애리얼의 몸에 걸쳐진 하얀 옷 때문이었다.

“대공자 저하께선 정말로 아가씨를 아끼시는 거예요.”

카논이 저번과 달리 단정해서 말했다.

애리얼은 이번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단추를 풀고 블레이저를 벗어 의자에 걸었을 뿐이었다.

카논은 풀 죽은 듯한 애리얼의 반응을 이해했다.

카논은 대공자의 성질머리를 백작저와 아카데미서 나름대로 겪은 하녀였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나 절대 손해는 보지 않는 그의 행동 방식은 폭력적이면서도 대처가 어려웠다. 그런 대공자가 보이는 아낌이 평범할 리 없다는 건 카논도 예상하던 바였다.

주말 동안 애리얼을 병실에만 머무르게 하며 시시때때로 찾아오던 그의 행동은 걱정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엄밀히 따지면 감시에 가까웠다.

“황자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지금보단 훨씬 나으실 거예요.”

“그럴까……. 위로해 줘서 고마워.”

애리얼은 힘없이 웃었다. 그제야 카논은 제 주인이 황자와 대공자 그 어느 쪽도 달가워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카논은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가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권유했다.

“온욕이라도 하시겠어요?”

데본시아의 일로 밤새 시달린 애리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그럼 바로 준비할게요.”

카논은 바로 욕실로 들어가 더운물을 받았다. 입욕제를 풀고, 갈아입을 옷을 파우더 룸에 준비하고, 간단히 마실 차도 간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훈기가 감도는 욕실에 부드러운 꽃향기가 풍겼다.

“아가씨, 준비 끝났어요.”

“응.”

옆의 파우더 룸에서 기다리던 애리얼이 대답했다. 그렇게 입욕을 위해 잠옷을 벗으려던 그녀는 제 손목에 브레이슬릿이 감겨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마터면 끼고 들어갈 뻔했네.’

애리얼의 손이 브레이슬릿을 풀기 위해 움직였다. 까만 고리의 이음새 부분을 훑으며 튀어나온 부분을 딸깍 소리 나게 눌렀다. 그러나 풀리지 않았다.

“이게 왜…….”

애리얼은 연달아 이음새를 누르고 밀어 보았다. 아예 고리를 부숴 버릴 듯 당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브레이슬릿은 꿋꿋하게 그녀의 손목을 채운 채 버텼다. 마치 족쇄나 수갑처럼 감겨들어 있다. 그녀는 불편함에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물었다.

이 브레이슬릿은 처음부터 풀리는 재질이 아니었던 거다.

‘왜 풀리지 않게 했을까?’

애리얼은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데본시아를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이것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것일까.

그 먼 거리를 왕복으로 순간 이동 하는 이가 채워 준 마도구. 애리얼의 힘으로 풀 수 없을 것은 당연하고, 어지간히 뛰어난 마법사들도 풀 수 없을 것이었다.

애리얼은 이걸 강제로 착용한 채 생활해야 했다.

‘풀려면 데본시아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는 아직 왕국에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질문조차 보류하고 있을 수밖에.

“아가씨, 아직이신가요?”

“지금 가.”

애리얼은 잠옷을 벗고 가운을 걸친 채 욕실로 들어갔다.

카논은 입욕하는 그녀의 손목에 남은 검은색 고리를 희한하다는 듯 보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희고 네모난 물체와 비슷한 종류겠거니 여겼다.

***

병실을 나온 후 일주일. 애리얼은 무난한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루 서너 시간 정도 마력과 마법에 대해 독학했고, 그 외 시간은 후원을 산책하거나 느긋하게 그림이나 소설을 보며 지냈다. 우려했던 브레이슬릿도 잠잠하기만 해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애리얼은 의외로 렉시우스와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보좌관이 그녀를 찾아왔다. 보좌관은 바빠서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는 그의 사정을 전하고 갔다. 언제까지라는 말은 없었다. 목, 토로 예정된 그와의 개인적인 과외 약속도 자연히 파투가 났다. 당연히 그의 블레이저도 돌려주지 못했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와 만나지 못함이 아쉽지는 않았다. 그의 호감도는 충분히 채웠다. 급한 건 레이신 쪽이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레이신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여전히 별관에 박혀 있는 그의 위치 정보가 그녀의 발길을 막았다. 별관의 결계 부작용으로 기절한 게 며칠 전이었다. 뭔지도 모를 브레이슬릿을 믿고 재차 별관으로 가는 무리수를 감행할 순 없었다.

일주일간 애리얼은 그 어떤 공략 대상도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최근 일이 많았기에 그녀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공략에 관한 생각은 잠시 미뤄 뒀다.

마주치는 이가 없으니 애리얼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그녀가 오늘도 산책이나 할 겸 나섰을 때였다. 정문 앞에서 애리얼은 고동색의 머리칼을 묶어 붉은 리본으로 장식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리본을 묶은 자그마한 뒤통수가 고개를 돌렸다. 아나스타샤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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