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애리얼!”
그녀가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경쾌한 걸음걸이에 갈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흔들거렸다.
“안녕하십니까, 공녀 서하.”
애리얼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애리얼의 뺨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애리얼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녀를 마주했다. 보라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뭘 그렇게 굳어 있고 그러니. 너랑 나는 같은 기숙사를 쓰는 친구잖아.”
“……네?”
“억지로 친한 척 굴라는 건 아니야. 너무 굳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아……. 네, 알겠어요.”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친한 척 다가오는 아나스타샤가 당황스러웠다. 첫 만남 때의 그녀는 분명 애리얼을 싫어하는 눈치였는데.
“그보다 애리얼, 너 오늘 한가하니?”
“특별한 일정은 없어요.”
“그럼 나하고 동행해 줄 수 있겠네. 잘됐다!”
아나스타샤가 애리얼의 양손을 맞잡으며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애리얼의 거절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는 듯, 그녀의 행동 전반에서 강요가 묻어났다.
애리얼은 당혹스러움을 숨기고서 차분히 말했다.
“어딜 가시려는지 물어도 될까요?”
“그냥 밖에 좀 나가려고.”
“아카데미 밖으로 가시는 건가요?”
“응. 멀리는 안 갈게. 같이 가 줄 거지?”
아나스타샤가 촉촉한 눈동자를 애처롭게 빛내며 부탁했다.
애리얼은 마땅히 둘러댈 핑계가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지위가 높은 탓에 거절이 여의치 않다는 점도 있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었다.
기숙사 정문에는 이미 차가 와 있었고, 그길로 애리얼은 아나스타샤에게 잡혀 차에 올랐다. 은빛 그릴에 검은색의 산양이 박힌 하얀 클래식 왜건이었다. 짐을 잔뜩 실을 수 있게 트렁크가 컸다.
‘쇼핑이라도 하려는 건가?’
애리얼은 널찍한 트렁크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차가 출발하자 그녀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건은 에메랄드그린으로 이루어진 조경수의 울타리를 지나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쨍했다.
운전사는 눈치 빠르게 그늘진 숲길로 차로를 바꿔 차를 몰았다. 차창 밖으로 일정하게 심긴 조경수가 빠르게 지나갔다. 이윽고 정문에 다다른 차가 그대로 직진해서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애리얼은 바깥의 풍경을 신기해하며 감상했다. 그녀가 아카데미를 나온 건 근 한 달 만이었다. 스카이라의 고집으로 잠깐 황성으로 향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곧장 차머리를 돌렸었다.
“애리얼, 이거 어떠니? 너도 봐 봐.”
옆자리에 앉은 아나스타샤가 애리얼에게 카탈로그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창밖을 주시하던 애리얼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페이지는 여성용 정장과 드레스의 사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손가락은 연분홍색의 칵테일 드레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하얀 시폰을 덧대 놓은 A라인의 치마가 섬세했다.
“공녀 서하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러니? 흠……. 내 취향이긴 한데.”
아나스타샤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대로 카탈로그에 몰두했다.
애리얼은 고개 숙인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을 일으켰다. 컨버터블에 앉아 음침할 정도로 어두운 얼굴을 하다가 순식간에 밝은 미소를 만들어 짓던 아나스타샤. 그때의 섬뜩했던 그녀의 모습이 카탈로그를 보는 옆얼굴에 겹쳐졌다.
애리얼은 오싹했던 그날의 경험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창백해진 낯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는 넓은 유리창 안으로 각양각색의 물건을 전시한 가게들이 지나갔다. 제국 수도의 가장 큰 다운타운이었다.
차는 고가의 의상실이 모여 있는 벽돌 길 앞에 멈췄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시종이 가장 먼저 하차했다. 그는 양산을 펴고 상석의 문을 열었다. 아나스타샤가 시중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사이 애리얼은 알아서 문을 열고 나왔다.
“애리얼, 여기부터 들어가자.”
아나스타샤가 밝게 웃으며 앞장섰다.
애리얼은 가만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대강당에서의 입학식이 생각났다. 커다란 격차를 체감했던 때가…….
아나스타샤는 그때와 달리 친근하게 구는데, 애리얼이 그녀에게 느끼는 거리감은 그때와 같았다.
애리얼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고서 묵묵히 걸었다.
아나스타샤의 쇼핑은 별로 길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게 보이면 한 번에 확 쓸어 담고 다음 의상실로 향했다. 그녀가 구매한 옷의 반은 포장되어 차의 트렁크에 실렸고, 반은 샤펠 공작저로 보내라는 라벨이 붙었다.
그렇게 열 개의 가게를 돌고 도달한 마지막 의상실. 아나스타샤는 차 안 카탈로그에서 본 드레스를 드디어 발견했다. 그녀는 하얀 시폰으로 감싼 연분홍색 치맛자락을 한 번 쓸어 보았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애리얼을 보았다.
“입어 볼래?”
아나스타샤의 권유에 애리얼은 놀란 얼굴을 했다.
“제가 이 옷을요?”
“응. 입어 봐.”
애리얼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아나스타샤는 손짓으로 직원에게 의상을 준비하게 시켰다. 애리얼은 반강제로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널찍한 탈의실에 들어온 애리얼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교복을 벗고 칵테일 드레스를 입었다. 밤하늘 같은 흑발 덕에 살구꽃색의 옷을 입고도 흰 피부가 도드라졌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의 양쪽으로는 연분홍색 레이스 리본이 달렸다. 옆얼굴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리본의 색은 드레스 색과 맞춘 듯 비슷한 빛깔이었다.
직원들이 가면 같은 미소를 깨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애리얼이 탈의실을 나오자 아나스타샤도 직원들과 비슷하게 감탄했다.
“애리얼, 너 정말 예쁘다!”
아나스타샤의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아 순순히 기뻐하고 있었다. 애리얼을 보는 그녀의 눈에서 묘하게 탐욕이 엿보였다.
아나스타샤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감탄을 이어 갔다.
“샤펠 공작저에 가면 아주 예쁜 것만 모아 두는 방이 있는데…… 거기에 두면 잘 어울릴 거 같아.”
오싹한 소리였다.
아나스타샤의 앞에서 애리얼은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막 포장 상자를 뜯고 꺼낸 새 인형.
애리얼은 가까스로 미미한 웃음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손목의 그건 벗는 게 좋지 않을까?”
아나스타샤가 애리얼의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본시아가 반강제로 채운 마력 조절 장치였다.
“아, 이건…….”
애리얼은 제 손목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탈착이 불가한 물건이라서요.”
“그래?”
브레이슬릿을 보는 아나스타샤의 눈이 잠시 가늘게 좁혀졌다. 그러나 이내 눈을 돌리고 애리얼을 마주 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온기가 없었다.
***
아나스타샤는 애리얼이 입은 옷을 그대로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러고는 선물에 보답하겠다는 애리얼의 말을 극구 사양하기까지 했다.
화사한 차림새로 등장한 애리얼을 보고서 카논은 감탄하며 물었다.
“데이트라도 갔다 오셨어요?”
“아니, 샤펠 공녀 서하와 중심가에 갔다 왔어.”
“그럼 그 옷은 아가씨께서 직접 사신 거예요?”
“공녀 서하께서 선물해 주신 거야.”
“그렇군요.”
수긍하는 카논의 말투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린아이가 인형에게 입힐 것 같은 옷을 입혀 놓은 모양새가 공녀 서하의 취향인지 아니면 조롱인지,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애리얼이 느낀 바도 카논과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예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이 차림새를 정말 예쁘다고 생각해서 선물해 준 걸까, 아니면 비웃으려고 선물한 걸까.
***
다음날 아나스타샤는 또 애리얼을 찾았다. 흰 교복을 곱게 차려입고서 애리얼의 방 앞에 와 문을 두드렸다. 애리얼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공녀 서하, 무슨 일로 절 찾으셨나요?”
“나 오늘부터 수업에 들어가 보려고 하거든. 정식은 아니고 그냥 임시로 한 번만.”
“시간표를 채우기 위한 참관 수업 말씀이신가요?”
“응, 그거. 혼자 가기는 쓸쓸하고, 시종을 데려가는 것도 별로고……. 애리얼이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
“네, 같이 가요.”
“정말이지? 고마워!”
아나스타샤는 방긋 웃으며 애리얼을 껴안았다. 애리얼은 갑자기 달려들어 제 옆구리에 팔을 집어넣은 그녀 때문에 온몸을 흠칫 떨었다.
애리얼에게 꼭 달라붙은 아나스타샤가 웃느라 가늘어졌던 눈을 반달 모양으로 떴다.
“그런데 있지……. 가기 전에 부탁이 하나 있는데.”
“어떤 부탁이요?”
“어제 내가 사 준 옷, 잘 가지고 있지?”
“네. 잘 보관하고 있어요.”
“그럼…… 오늘 그거 입고 가 주면 안 될까?”
“하지만 드레스라서 교사 동에 입고 가기엔…….”
“괜찮아. 규율에 어긋나는 일도 아닌걸.”
“그러면 수업에 다녀와서 따로…….”
“지금 보고 싶어. 입어 줄 수 있지?”
“…….”
“부탁해.”
아나스타샤는 연달아 말을 끊어 버리며 제 요구만 들이밀었다. 애리얼은 그녀에게 아무리 거부 의사를 표현해 봐야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목적을 달성한 아나스타샤는 생글생글 웃었다. 문간을 지키고 선 그녀는 애리얼이 옷을 갈아입기 전까진 비키지 않을 기세였다.
애리얼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를 입는 정도야 큰일도 아니었다. 이걸 입고 교사 동에 가면 시선이 몰리겠지만, 괜찮다. 선물을 받았으니 이렇게라도 보답이 된다면 다행일 터였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논이 눈치 빠르게 드레스를 가져와 파우더 룸에 비치했다. 애리얼이 파우더 룸에 들어오자 카논은 곧장 필요한 것들을 꺼냈다. 환복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복숭아색 드레스를 입히고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빗어 늘어트린 뒤 레이스 리본을 양옆에 달아 주었다.
거울에는 어제 보았던 애리얼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문간에 서 있던 아나스타샤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애리얼을 보고 무척 좋아했다. 쪼르르 달려와 애리얼에게 팔짱까지 낀 그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리얼은 아나스타샤가 조금은 친근하게 보였다. 그녀의 보랏빛 눈에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감정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
모두가 교복을 입은 교사 동에서 애리얼은 단연코 눈에 띄었다. 8관의 휴게실에 앉은 그녀는 어린아이의 장난감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서도 청초했다.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비스크 돌.
학생들의 눈이 그녀의 전신을 훑어 내리고 지나갔다. 때로는 길게 머물며 응시했다.
노골적으로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지만 애리얼은 신경 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녀와 나란히 앉은 아나스타샤는 오히려 시선을 즐기는 듯 보였다. 지나가는 학생들을 불러다 놓고 ‘얘 예쁘지?’ 하며 애리얼을 자랑했다. 학생들은 얼떨떨해하는 얼굴을 하고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리얼은 처음엔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괴롭히려고 이러나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만면 가득한 웃음기와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고선 생각을 바꿨다. 아나스타샤는 정말로 애리얼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끼는 보석을 내보이듯 그렇게.
시종이 수업의 시작을 알릴 때까지 아나스타샤는 계속 그 행동을 이어 갔다.
“아가씨, 곧 수업이 시작합니다. 슬슬 교육실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그만 좀 보채렴.”
아나스타샤가 뾰로통한 얼굴로 시종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더니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꼬리를 늘어트리고 애리얼을 보았다.
“애리얼, 이제 나 수업 들으러 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네.”
“금방 갔다가 올게.”
휴게실을 나가는 그녀의 뒤로 시종이 뒤따랐다. 거느리는 게 익숙해 보이는 아나스타샤의 뒷모습이 애리얼에게서 멀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의외로 애리얼을 교육실까지 데려가지는 않았다.
혼자 남은 애리얼은 카논이 따로 챙겨 준 작은 단편집을 가방에서 꺼냈다. 여전히 다수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애리얼은 애써 무시하며 책을 폈다. 그러려고 했다.
갑자기 다가온 다수의 인기척. 그중에서도 유독 가까이 다가온 한 명이 손을 뻗어 책을 빼앗아 갔다.
애리얼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