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무표정한 얼굴. 아니, 그보다는 좀 더 화가 난 듯 치켜 올라간 눈꼬리의 여학생. 검은색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애리얼과 같은 귀족이다.
“아카데미에서 뭐 하는 짓이야.”
여학생이 딱딱하게 따져 물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처럼 화난 듯한 얼굴의 학생이 여럿 있었다. 모두 귀족이 입는 리본 교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대부분 애리얼과 동급생으로 보였다.
애리얼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의아했다. 상대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 생각이라는 것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돌림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내 행동에 뭔가 잘못된 게 있는 거야?”
“왜 모르는 척해?”
“그러니까 뭘…….”
“이거!”
눈앞의 학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애리얼의 머리칼에 매달린 리본 하나를 움켜쥐었다. 억센 힘으로 머리가 흔들릴 만큼 강하게 당겼다.
이 요란한 옷차림이 시비의 원인인 모양이었다.
세게 쥐어뜯는 손길에 애리얼은 두피가 아팠다. 그럼에도 그녀는 끌려가지 않고 버티며 신음 하나 없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놓고 말하자.”
애리얼의 차분한 대처에 여학생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러나 곧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더 우악스러워진 손길로 리본을 잡아당겼다.
“……이게!”
“리본이 문제인 거 알겠으니까, 일단 놔.”
애리얼이 단호하게 말하며 리본을 잡아챈 여학생의 손목을 세게 쥐었다. 그러자 여학생은 애리얼의 손을 휙 뿌리치며 리본을 놓았다. 그녀는 새치름한 눈빛으로 애리얼을 못마땅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여학생의 손에 마구 쥐어뜯긴 리본은 형편없이 구겨졌고, 곱게 빗었던 흑발도 잔뜩 헝클어져 버렸다. 애리얼은 무덤덤한 얼굴로 엉킨 머리칼에서 구겨진 리본을 분리해 냈다. 멀쩡한 편인 반대쪽 리본도 빼냈다. 그러고는 산발이 된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빗어 정리했다.
애리얼이 추스르는 걸 보고서 여학생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런 이단적인 꼴로 아카데미를 욕보이다니! 후작가도 아니고 고작 백작가 공녀 주제도 모르고!”
“시비의 이유는 내 복장이 거슬려서인 거야?”
“이제 알았어? 하긴, 그러니까 눈치도 없이 그런 꼴로 휴게실에 나타난 거겠지.”
“눈에 띄는 차림이긴 하지만 규율에 어긋나는 옷은 아니야.”
“여기엔 격이라는 게 있어!”
“이 옷이 격이 떨어지는 옷은 아니라고 생각해.”
애리얼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같이 흥분하면 상대를 더 자극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서였다.
애리얼이 무던하게 굴자 여학생은 난감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화내지 않아 곤란하다는 듯이.
그에 애리얼은 위화감을 느꼈다. 애리얼이 관찰하듯 시선을 보내자 여학생은 갑작스레 눈을 사납게 치뜨며 소리쳤다.
“……너 같은 거랑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는 게 치욕이야!”
“…….”
애리얼은 여학생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여학생의 말투는 뭔가 이상했다. 분노로 시비를 거는 것치곤 행동이 지나치게 딱딱했다. 말투도 외운 대사를 읊는 듯 인위적이었다. 애리얼의 뒤에 황자의 권력이 있음을 알 텐데 무턱대고 무례하게 나온 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애리얼은 조용히 여학생과 그 무리를 훑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해내려는 듯.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뻔뻔해!”
애리얼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따라갔다. 굳은 표정의 또 다른 여학생이 애리얼을 보고 있었다. 억지로 찌푸린 듯한 여학생의 미간이 작게 경련했다. 가장한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애리얼이 그 여학생을 유심히 관찰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무리 속으로 숨어들었다.
‘뭐지……?’
강렬한 위화감이 애리얼의 온몸을 감쌌다.
그녀를 둘러싼 학생들은 모조리 굳은 표정이었다. 형편없는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연기…… 하는 거야?”
애리얼이 대뜸 말하자 리본을 잡아챘던 여학생은 사색이 되었다.
“이……, 이게!”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빽 소리친 여학생이 여태 들고 있던 단편집을 애리얼의 얼굴로 던졌다.
애리얼은 갑자기 날아온 단편집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책의 네모난 모서리가 애리얼의 눈가를 세게 찍어 버리고는 툭 떨어졌다. 애리얼은 얼얼한 충격이 남은 눈가를 쓸어 보았다. 축축한 것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모서리에 찍혀 팬 자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이 무슨 행패일까.
직접적인 폭력까지 벌어졌는데도 주변은 잠잠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누가 말해 주기라도 한 듯, 아무런 개입이 없다.
‘누군가의 사주로 미리 이야기가 오간 상황인가?’
애리얼은 무덤덤한 눈으로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여학생은 제 행동이 불러온 결과에 놀란 듯 움츠려 있었다. 그러다가 저를 바라보는 애리얼과 눈이 마주치자 버럭 화를 냈다.
“그렇게 추한 꼴로 돌아다니니까 이런 짓을 당하는 거야!”
“이 차림이 추한 것까진 아니라고 생각해.”
애리얼은 계속 차분한 태도였다. 그런데도 여학생은 입력된 행동만 수행하듯 과장되게 소리쳤다.
“어린애도 안 하고 다닐 것 같은 유치한 꼴이 추하지 않다고?”
“잠깐 진정해.”
애리얼은 흥분한 여학생을 침착하게 달래 보려 했다. 여학생의 뒤쪽, 휴게실의 열린 문에서 아나스타샤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소리 없이 걷는 아나스타샤의 두 눈은 애리얼에게 시비 중인 여학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쩌다 황자 저하께 예쁨 한번 받았다고 고개 빳빳이 들고 지고한 분들께 꼬랑지나 흔들어 대는 천박한 인간!”
여학생이 애리얼을 강하게 매도했다.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감정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컨버터블 안에서 기이하게 웃음 짓던 그때의 표정과 비슷했다.
애리얼은 제 일도 아닌데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다급하게 여학생을 말렸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우선은 조금만 진정…….”
“시끄러워! 높으신 분들이랑 어울리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아냐. 나 아무것도 아니야. 잘 알고 있으니까, 조금만 침착하게…….”
“거짓말하지 마! 그것도 그분들에게 잘 보이려고 입은 거지?”
“그런 거 아냐.”
“네 꼴 정말 흉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어! 정말이지 저렴한 취향……!”
짜악!
바짝 다가온 아나스타샤가 애리얼의 앞에 서서 여학생의 뺨을 올려붙였다. 피부가 마찰하며 난 강렬한 소음에 휴게실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여학생은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고개가 돌려진 채 뺨이 붉게 달아오른 그녀는 초점이 흐려진 눈이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누가, 저렴한 취향이니?”
아나스타샤가 고고하게 웃는 얼굴로 사근사근 말했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게 있던 여학생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아나스타샤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여학생의 머리채를 붙잡고는 다시 한번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그러고는 다시 여학생을 추궁했다.
“누굴 모욕한 거니?”
두 번이나 매서운 손에 뺨을 얻어맞은 여학생은 애처롭게 벌벌 떨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여학생이 고개를 숙이며 재차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하다면 다니? 나한테 진정 죄송하긴 한 거니?”
아나스타샤가 고상한 말투로 비꼬듯 여학생을 타박했다. 그러자 여학생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다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파르르 떨며 또 한 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안쓰러울 정도로 굴욕적인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만족감을 비치듯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여학생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애리얼한테도 사과해야지.”
타이르는 목소리와 개를 대하듯 하는 손길. 아나스타샤의 행동은 오만을 넘어 기괴할 지경이었다.
애리얼은 그대로 굳은 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굴어야 적절한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로 여학생이 기어 왔다. 무릎을 꿇은 채로 엉금엉금, 귀족의 교복을 입고서 노예처럼.
“죄송…… 죄송합니다.”
더듬더듬 사과하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기가 죽은 여학생의 모습에 애리얼은 공포를 느꼈다. 이토록 사람을 추락시킬 수 있는 아나스타샤를 향한 공포.
동시에 그녀를 향한 의구심이 일었다. 다름 아닌 그녀의 언행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가장 처음에 ‘누가, 저렴한 취향이니?’라고 물었고, 다음엔 ‘누굴 모욕한 거니?’라고 말했다. 그다음은 ‘나한테 진정 죄송하긴 한 거니?’였다.
아나
애리얼이 당한 패악에 분노하는 게 아니었다. 누가 봐도 아나스타샤 자신이 당한 모욕을 여학생에게 추궁하는 말투였다.
결과적으로 아나스타샤는 패악질을 당한 애리얼이 사과를 받게 해 주었으나, 애리얼은 좋아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학생의 머리채를 쥐고 때린 뒤, 무릎을 꿇리고 애리얼의 앞에 기게 했다. 그런 아나스타샤의 행동에서는 조금의 의협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깔아뭉개고 인격을 처절하게 짓밟았다. 그런 식으로 사과를 하게 만들었다.
애리얼은 이런 식의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여학생이 누군가의 사주 내지는 협박을 받고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서 찝찝하기까지 했다.
“저는 이제 괜찮…….”
애리얼이 다급히 일어나자 아나스타샤가 손을 들어 애리얼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바닥을 짚은 여학생의 손을 꾹 밟았다.
“좀 더 제대로 사과하렴. 감히 황족이 눈여겨본 이의 얼굴에 상처를 냈으니 좀 더 싹싹 빌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자 여학생이 바닥에 닿을 듯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
여학생의 세 번째 사과가 끝나기 전에 애리얼은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여학생에게 바짝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다 대고 말했다.
“사과는 잘 받았어요. 당신이 진심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란 걸 알아요.”
차분하고 다정한 말투. 너그러운 용서로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사주 내지는 협박을 받은 게 아니냐는 듯 떠보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여학생의 몸이 움찔거렸다. 애리얼의 말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듯 솔직한 반응이었다. 그걸로 애리얼은 확신했다. 이 어색한 시비는 누군가의 사주 혹은 협박을 받아 벌어진 일이다.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애리얼이 여학생에게서 물러나며 말했다.
여학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 봐요.”
애리얼이 말하자 여학생이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아나스타샤는 별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걸 허락으로 안 건지 여학생은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다급히 휴게실을 벗어났다.
그 여학생를 따라 몇 명의 학생이 추가로 우르르 떠났다. 애리얼을 포위하듯 감싸고 여학생에게 동조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던 이들이었다. 화를 입을까 재빨리 꽁지를 빼는 모양새였다.
휴게실이 반 정도 비워졌다. 남은 무리 중 몇이 아양을 떨듯 애리얼과 아나스타샤에게 접근했다.
“어쩜 저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다 있네요.”
“저런 인간성을 지니고 같은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니……. 개탄할 노릇이네요.”
“공녀 서하껜 한마디도 못 하고 빌빌대는 게 추하기 그지없었어요.”
“꼴에 주제는 아는 거죠.”
지금껏 방관하기만 했던 이들이 사라진 여학생을 비난했다. 아나스타샤는 마음에 드는 소리를 뱉어 주는 제 추종자들에게 다정히 웃어 주었다. 가식과 가식이 만난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권력과 추종, 오만함과 비굴함. 불편한 요소가 만나 어우러진, 앞선 시비에 이은 또 다른 연극. 아부하는 이에게도 그에 웃어 주는 이에게도 모두 진심이 없었다.
애리얼은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그녀를 관객으로 두고 연출한 아나스타샤와 그 추종자들의 과장된 언행이 어색하기만 했다.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대본을 읊는 느낌이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