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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65화 (65/264)

65화

패악을 방관하던 이들이 권력에는 고개를 숙이는 불편한 장면에 애리얼은 속이 안 좋아졌다.

이곳에 모인 학생 중 몇몇도 애리얼과 같은 감상이었는지 굳은 얼굴로 휴게실을 나가 버렸다.

방관자였던 이들이 뒷담을 이어 가는 사이서 아나스타샤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그러지 말렴.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듣겠지.”

“정말이지 공녀 서하께선 자비로우세요.”

“그에 비해 아까 그 여자는 말하는 것도 천박하기 그지없던데요? 정말이지…….”

“알고 있어. 너도 너무 천박한 단어는 쓰지 않는 게 좋겠어. 마음은 알겠지만 이러다 욕이라도 쓸 기세가 아니니.”

“어머나……. 죄송합니다. 제가 서하처럼 고상하지 못해 실수를 범할 뻔했습니다.”

“그래, 조심해. 그보다 애리얼, 괜찮니?”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던 중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애리얼을 돌아보며 물었다.

뒤늦게 관심이 향하자 멍하게 있던 애리얼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어색한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나스타샤의 추종자 여학생들은 같은 동료라도 되는 듯 웃음을 지으며 애리얼을 보았다.

“공녀 서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요. 허클리 공녀님도 무척 운이 좋으시네요.”

“저런, 피가 흘러요.”

아나스타샤의 추종자 중 한 명이 놀란 눈으로 애리얼을 응시했다.

애리얼은 찢어져 팬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보건실에 가서 수습하고 올게요.”

“그래, 다녀오렴.”

아나스타샤는 자상하게 허락했다. 그녀가 같이 가 주겠다 하지 않아서, 애리얼은 다행이라 여겼다.

바닥에 떨어진 단편집을 주워 챙긴 애리얼은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을 떠났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인기척이 없는 복도만 골라서 갔다. 휴게실의 시선들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지만 애리얼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녀는 금세 8관의 보건실에 다다랐다. 명패가 붙은 나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건실은 조용했다. 반투명한 흰 커튼에 한 번 걸러진 햇살이 큰 창으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각기 칸을 나뉘어 늘어선 침대와 파티션이 보였다.

인기척이 없는 장소. 겨우 홀로된 애리얼이 크게, 하아, 숨을 내쉬었다.

교사 동의 의사는 호출할 때만 왔다. 교사 동에선 대련장에서처럼 학생들이 다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의사도 종일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교사 동의 보건실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간단한 상비약이 필요한 경우였다. 따라서 보건실의 물품도 의사의 소견 없이도 이용할 수 있는 연고나 밴드, 소화제가 주를 이뤘다.

애리얼은 세면대에서 상처를 씻어낸 뒤 약을 모아 둔 유리 장에서 연고를 꺼내 눈가에 발랐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피도 멎어 있었다.

가볍게 처치를 끝낸 애리얼은 한숨을 쉬며 근처 의자에 앉았다. 아나스타샤에게 돌아간다고 말은 했지만, 그녀와 그녀의 추종자가 모여 있는 휴게실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나스타샤를 바람맞힐 수는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가자.’

애리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조용히 보건실에 머물던 그녀의 귀에 돌발적인 진동음이 울렸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자주 생각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8관 - 1층 복도』

“스카이라?”

왕국에 있어야 할 그가 접근 알림과 함께 휴대폰에 나타났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위치가 표시되지 않았었는데…….

‘오늘 왕국에서 귀환한 건가?’

애리얼은 휘둥그레진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초상화가 빠르게 보건실로 접근 중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오는 거지?’

거리가 좁혀질수록 애리얼은 초조해졌다. 스카이라가 수업을 듣다 상비약이 필요해져서 이곳으로 오고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설마 내가 있는 걸 알고 오는 건가?’

애리얼은 다급히 휴대폰을 가방에 숨기고 일어났다.

똑똑똑, 나무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애리얼, 있어?”

오랜만에 듣는 스카이라의 음성이 정확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있음을 알고 온 거다.

“있는데…….”

애리얼이 답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삼 주 가까이 못 봤던 스카이라가 보건실로 들이닥쳤다. 그는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들어오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애리얼을 보고서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들었다.

그러길 몇 초, 무슨 오해를 한 건지 그는 갑자기 확 인상을 썼다.

“누구한테 보이려고 그런 꼴로 입었어.”

귀환하고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저 모양 저 꼴이다.

애리얼은 얼떨떨해 있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샤펠 공녀 서하께서 선물해 주신 거야. 서하께서 이걸 입고서 같이 교사 동에 가 달라고 하시길래……. 따지자면 공녀 서하께 보이려고 입은 거네.”

“샤펠이 너한테?”

“응. 어제 찾아오셔서 중심가까지 동행해 줄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 이 옷은 어제 선물받은 거고.”

“그래서 오늘은 샤펠의 부탁을 받아서 입은 거다?”

“응.”

“그런 부탁을 왜 들어주는데?”

“공녀 서하께서 선물의 보답까지 거절하시고 한 부탁이셨어.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해 드려야지 하고 생각한 거야.”

“샤펠이 그랬다고…….”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그러곤 애리얼을 보며 경고처럼 덧붙였다.

“샤펠 공녀와는 친하게 지내지 마.”

애리얼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첫 만남부터 위험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데본시아가 거북스러운 것과 비슷했다. 다만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는 공략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 같은 일을 겪으면서까지 그녀와 필요 이상 가까워질 이유가 없었다.

“알았어.”

경고를 수긍하자 스카이라가 찌푸렸던 인상을 풀었다. 그러자 애리얼은 그가 휴대폰에 보인 순간부터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왕국에선 언제 돌아온 거야?”

“오늘, 방금.”

“그런데 바로 여길 왔어? 나한테 감시 붙인 거 아니지?”

“……안 붙였어.”

스카이라는 의외로 부정했다.

“마법으로 추적했어.”

그는 낯빛 하나 안 바꾸고 감시가 아닌 추적을 했다 말했다. 찝찝하긴 매한가지인 답변이었다.

하긴 감시를 붙였다기엔 스카이라는 애리얼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카데미 입학식 날 애리얼을 찾아다녔던 것도 그렇고, 그다음 날 기숙사 1층 휴게실에서 온종일 죽치고 앉아 있었던 것도…….

그랬던 과거를 생각하면 그는 추적 마법도 자주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순간 이동처럼 무리가 많이 가서 꺼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추적까지 하면서 자신을 찾은 것인지, 애리얼은 의문이 들었다.

“기숙사에서 봤어도 됐을 텐데, 왜 이렇게 급히 날 찾은 거야?”

그녀가 그렇게 묻자 스카이라는 보건실의 문을 닫고서 그 문에 기댔다. 간수인 양 애리얼을 바라보며 나갈 길을 막았다.

애리얼은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서 제 무릎에 놓인 가방끈을 꽉 쥐었다.

“무섭게 왜 그래…….”

“묻고 싶은 게 있어.”

스카이라가 긴장한 것처럼 딱딱한 얼굴로 대꾸했다.

‘도대체 뭘 묻고 싶길래 귀환하자마자 추적 마법까지 써 가며 날 찾은 걸까.’

애리얼은 궁금하면서도 선뜻 그 용건을 듣기가 겁이 났다. 애써 태연한 척 그를 올려다보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얼굴로 다가왔다.

놀란 애리얼이 고개를 뒤로 빼자 그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의 손이 애리얼의 상처에 닿을 듯하다가 그대로 정지했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너 샤펠한테 뭔 짓을 당했길래 이런 거야.”

“공녀 서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야. 어쩌다가 그냥 책 모서리에 찍혔어.”

“어쩌다가는 무슨. 말해 주기 싫은가 본데, 그럼 거짓말이라도 잘하든가.”

툴툴대면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애리얼의 눈가에 손가락을 댔다. 애리얼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조용히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하는 말은 짧고 정 없지만, 목소리만큼은 다정했다.

애리얼은 가만히 움직임을 멈췄다.

스카이라의 긴 손가락이 연고를 훔쳐 내고 상처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팼던 자리가 흔적도 없이 깨끗해졌다. 그는 잘 아문 피부를 확인하듯 한 번 쓸어 보고는 손을 거뒀다.

애리얼은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를 다시 제 손으로 쓸어 보았다. 상처 없이 매끈한 살결만 만져졌다.

“……고마워.”

애리얼이 감사를 말하자 스카이라는 주춤하더니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애리얼도 잘 아는, 수줍어하는 그의 모습. 그 자신의 상냥함을 어색해하며 생색을 낼 줄 모르는 저 솔직하지 못한 성격.

오랜만에 만난 스카이라가 꽤 익숙한 모습을 드러내자 애리얼은 조금 웃었다.

그녀의 올라간 입꼬리에 돌아갔던 스카이라의 눈동자가 되돌아왔다. 저 미소를 보면 그는 언제나 설렜다. 애리얼이 웃는 게 좋았다. 너무 반가워서 그녀의 미소가 가슴에 사무쳤다.

“애리얼.”

그녀의 이름을 말하며, 스카이라는 요동치는 심정으로 그녀를 눈에 오롯하게 담았다. 부드러운 흑발, 설원 같은 피부, 차분하나 차갑지 않은 표정, 가녀린 어깨를 감싸는 평소 잘 입지 않던 밝은 색의 드레스.

애리얼은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스카이라는 맹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샤펠 공녀가 선물했다는 빌어먹을 드레스가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그는 화가 났다. 자신 외에 타인이 준 것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는 게 참을 수 없게 거슬렸다. 여자가 준 것이라 할지라도 싫었다.

“애리얼…….”

씹어 먹을 기세로 애리얼을 곳곳을 담아 내던 스카이라의 눈이 어느 곳에서 뚝 멈췄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감싼 시커먼 브레이슬릿.

그의 파란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이상을 감지한 애리얼이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목만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너, 그거…….”

착 가라앉은 음성, 그 끝이 살짝 떨렸다.

애리얼은 당황한 듯 제 손목을 어색하게 더듬었다. 스카이라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이 물건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아는 눈치였다. 아니면 그가 저렇게 분노한 얼굴을 할 리 없었다.

애리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력 조절 장치라고, 황태자 전하께서 채워 주신 건데…….”

설명은 그거면 충분했다.

상황을 대강 파악한 스카이라의 이성은 지금 날아갈 듯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데본시아의 끈적거리는 마력이 느껴지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마도구. 저 까만 브레이슬릿을 본 순간 그는 원래 말하려던 용건을 뒷전으로 미루게 되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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