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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66화 (66/264)

66화

으득 이를 깨문 스카이라가 갑작스럽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심상치 않은 기세였다. 지금 그의 분노는 데본시아의 멱살을 잡는 걸론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하극상을 벌일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애리얼은 흥분한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아 나갔다.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말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쫓아 곧장 뛰어간 복도는 비어 있었다.

애리얼은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자주 생각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애리얼은 그의 위치를 보자마자 한탄했다. 그는 몇 번 되지 않는 순간 이동 횟수를 소모하면서까지 움직였다. 그 정도로 분노한 그가 누굴 향해 갔을지는 너무나 뻔했다.

‘일 났다.’

그녀는 급히 교사 동 8관의 관리실로 들어가 황성의 차량을 불러 달라 말했다.

어차피 브레이슬릿 건으로 데본시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 김에 한 번에 해결을 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황성으로 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예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아.’

8관 앞에 도착한 차에 다급히 오른 애리얼이 목적지를 말했다.

“황성 중앙관.”

“모시겠습니다.”

당황할 법한 장소에도 운전기사는 곧장 수긍하고서 차를 몰았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하듯 태연한 태도였다.

애리얼은 두려워졌다. 그녀는 황족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모자라 황성 출입까지 자유롭다. 마치 황성의 일원이라도 되는 듯 각별하며 과도한 대우였다.

이 정도의 특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황자비…….’

부담스럽다 못해 겁이 나는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긴장한 애리얼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를 빠져나간 차는 빠른 속도로 황성으로 향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황성의 압도적인 위용이 해일처럼 덮쳐드는 것 같았다.

***

“아나스타샤가?”

데본시아가 나른하게 물었다. 침대에 누운 그가 닫았던 눈꺼풀을 미세하게 들어 올렸다. 신비로운 빛깔의 눈동자 위로 길게 속눈썹이 드리웠다.

“예. 추종자를 모아 집단으로 괴롭힘을 행하도록 사주하셨다고 합니다. 한데 허클리 백작가 공녀가 폭행을 당하자 샤펠 공녀 서하께서 감싸는 듯한 행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보좌관이 그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가 짧게 답했다.

“그래서.”

“어제 그 백작 공녀에게 드레스를 선물하는 등 친밀하게 굴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작 공녀의 신뢰를 사기 위한 자작극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딴 걸로 신뢰를…….”

그의 말끝으로 비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따라붙었다.

오히려 그렇게 군 탓에 아나스타샤는 되레 애리얼의 의심을 샀을 터. 데본시아는 제 약혼녀 후보라는 이가 벌인 허접한 수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나스타샤의 수준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도 더 멍청한 방법만 쓰네.”

실소가 묻어나는 데본시아의 음성이 소름 끼치게 싸늘했다.

“어떻게 할까요?”

보좌관이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데본시아는 팔을 들어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비밀리에 아주 큰 손님을 모시고 오느라 그는 몹시 피로했다. 사람을 데리고 하는 장거리 순간 이동은 마력을 극심하게 소모해서, 그의 수준으로도 기절해 버릴 것 같은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길게 생각지 않았다. 좀 더 둬도 되겠지. 아나스타샤의 수준으론 그리 대단한 일을 벌이지도 못할 테니까.

“그냥 둬.”

“예.”

“이제 나가.”

“예, 전하.”

보좌관은 깍듯하게 묵례하곤 조용히 물러났다.

두꺼운 문을 닫고 나오자 보좌관은 방 안에선 차단되었던 복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높은 목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저마다 제 주장을 펼치며 강한 소음을 냈다. 기함할 일이었다. 고귀한 황태자의 침실 앞에서 무엄하게 실랑이 중이라니. 보좌관은 얼굴을 찌푸리고서 소음의 진원지로 다가갔다.

“웬 소란입니까.”

목소리를 높이던 호위 기사와 시녀가 그의 등장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죽 늘어선 다른 호위들도 저마다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건넸다.

“제라온 보좌관님.”

먼저 입을 연 쪽은 시녀였다.

“말씀하세요.”

그가 허락하자 시녀는 고개를 들고 실랑이하던 용건을 꺼냈다.

“황태자 전하께 중요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출입을 청하러 왔습니다만…….”

“황태자 전하께선 현재 휴식 중이시라 방문을 엄금한다는 명입니다.”

아까까지 말다툼을 벌였던 호위 기사가 말을 뚝 자르자 시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황태자를 만나야 했으나 그녀는 감히 앞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호위가 뽑은 칼날이 복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대치.

제라온은 미간을 짚다가 중재차 말했다.

“우선 검을 내리세요.”

그의 간곡한 목소리에 호위는 마지못해 검을 내렸다.

칼날이 치워져 길이 트이자 제라온은 시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방문자가 누구입니까. 신원을 밝히세요.”

제라온이 묻자 시녀는 복도 가득한 열 명의 호위 기사와 침실 문 앞에서 대기 중인 두 시녀를 곁눈질했다. 인원을 세는 듯한 시선. 그러고는 입을 연다.

“죄송하지만, 신원을 밝힐 순 없습니다. 다만 황태자 전하께서 황성 방문 시 반드시 데려오라 명하셨던 분입니다.”

“암살자일지도 모르는 걸, 어떻게 판단하고 그런 두리뭉실한 소리를 하십니까!”

호위가 시녀에게 성을 냈다. 그의 분노는 정당했고, 제라온도 그의 입장이 더 타당하다 보았다.

지금의 황태자는 몸이 성치 않아 휴식이 필요했다. 그의 주군은 야박한 이는 아니었으나 온정적인 이도 아니었다. 예민한 상태일 때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제라온이 시녀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일전에 전하께 명받은 일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안 됩니다. 남관에 객실을 내어 줄 테니 방문자에게 안내해 드리세요. 당신 말대로 진정 중요한 손님이라면 전하께서 내일은 만나 보실 겁니다.”

“아니요. 안 됩니다.”

시녀는 완고하게 버티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건 황태자 전하께서 당부하신 일입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네.”

시녀는 바로 답변했다. 제라온은 그 시녀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고동색 머리칼, 차가운 눈빛, 굳은 표정. 황태자 직속 가운데서도 상당히 신임을 받는 이였다. 그가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에나 로빈슨.”

“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까?”

“네.”

시에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이제 제라온이 황태자의 보좌관으로서 판단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의 눈이 시에나를 가늠하듯 가늘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호위는 하나만 남기고 물리겠습니다. 시녀도 모두 물리고요.”

그가 뱉은 말에 호위와 시녀 모두가 놀랐다. 커다래진 눈들이 모조리 그를 향했다. 황태자의 보좌관이 황태자의 침실 앞에서 호위를 물리다니. 아무리 황태자가 신뢰하는 이라지만 한낱 시녀의 말인데.

불경한 일이라 항의하듯 호위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특히나 칼까지 뽑아 들었던 충성스러운 기사가 극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제라온 보좌관님!”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전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셔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할 황태자 전하의 직속 호위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러드 경은 남아 주세요. 의심스러운 정황이 벌어진다면 바로 개입하실 수 있도록.”

황태자의 보좌관이라는 자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호위 기사도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복도를 지키던 이들이 삽시에 자리를 비켰다. 사방이 비워져 고요해지자 제라온이 말했다.

“시에나 로빈슨, 가서 손님을 데려오세요.”

“네.”

완강하던 시녀는 몇 번이고 중요하다 강조한 손님을 데려오기 위해 빠르게도 떠났다.

보좌관과 호위 하나만 남은 적막한 복도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시녀가 과연 어떤 인물을 데려올 것인가. 황태자와 남몰래 뒷거래를 주고받은 왕국의 거물일지도 모른다. 아예 왕국의 왕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라온은 시녀가 데려올 손님이 상당한 권력을 거느린 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몇 분 후 시녀가 데려온 인물은 제라온의 예상을 완전히 깨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화사한 색의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소녀. 말간 얼굴이 보는 이의 정신이 빠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시에나의 뒤를 따라온 소녀는 짧게 묵례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제라온은 기함하여 벌려진 제 입을 태연한 동작으로 가리며 생각했다.

‘전하께서 밀회하는 애인이라도 부르신 것인가?’

불경한 추측이나, 황태자의 치정은 그가 그런 추측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문란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제 몸이 예민해진 시기에는 불필요한 방문을 극도로 꺼렸다. 누구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가 피로하거나 아픈 시기에는 황제조차 그가 틀어박힌 침실로 걸음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가 먼저 호출한 경우에만 그에게 갈 수 있었다. 가서도 언행을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저 소녀를 들여보내도 괜찮은 것일까…….’

소녀는 초대받지 않은, 따지고 보면 불청객이었다.

제라온은 입을 가리던 손을 내려 제 목을 만졌다. 불안 증세였다.

황태자, 데본시아는 거의 화내지 않는다. 심기가 웬만큼 불편해져도 그는 격노하는 일이 없었다. 본인이 아프거나 지쳤을 때만 빼고.

심각한 얼굴의 제라온이 제 목을 느리게 문질렀다. 목 언저리에 자꾸만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일이 실수가 되면 어떻게 하나. 난생 최초로 황태자의 진정한 분노를 겪고 목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제라온의 말만 믿고 남은 제러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심각성을 인지한 그의 몸은 완전히 얼어 있었다. 혈색이 매우 나쁜 건 덤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녀가 아닙니까? 기껏해야 아카데미에 다닐 나이 정도나 된 것 같은데, 황태자 전하의 중요 손님이라니요? 이건 아닙니다! 제라온 보좌관, 지금이라도…….”

“입조심하세요, 제러드 경.”

시에나가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 심상치 않은 눈빛에 제러드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시에나는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했다. 함부로 약속을 어긴다면 그녀는 물론 그녀의 가문까지 모욕하는 처사였다.

제라온의 눈이 시녀의 몇 걸음 뒤에서 가만히 대기 중인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한마디도 없었다. 약간 긴장한 티는 나지만 침착하게 눈동자를 내리깔고 있었다.

‘차분한 게 꽤 의외지만, 대단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소녀를 찬찬히 훑어 내리던 제라온의 눈이 가느다란 손목에서 멈췄다. 검은색의 브레이슬릿.

“무례한 언행을 용서하세요, 공녀님.”

그가 길을 비켜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제러드는 여전히 불안한 듯 보였지만, 시에나에 이어 제라온까지 그렇게 나오니 더 반대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소녀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제라온을 어리둥절해하며 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짧은 감사를 남긴 소녀가 시에나와 함께 황태자의 침실 문까지 걸어갔다.

똑똑똑, 시에나가 짧게 노크를 하며 방문자가 왔음을 알렸다.

“황태자 전하, 일전에 말씀하셨던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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