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삼십 분 전, 황성 중앙관 정문.
순간 이동을 극도로 기피하는 황자가 순간 이동을 써서 나타났다. 그럴 때는 으레 황자의 기분이 밑바닥을 친 상황이었다.
사용인들은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그를 대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은 속절없이 최악으로 치닫기만 했다. 호위고 시녀고 보좌관이고 전부 피가 말랐다.
감히 이런 상황에 그의 앞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응접실에서 대기하던 플라넬의 왕과 왕비가 기어코 황자의 앞에 나란히 와 섰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제국의 황자 앞에 예를 갖췄다.
“황자 저하, 플라넬의 왕이 인사드립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무탈하셨을지 늘 걱정하였습니다.”
인사하는 두 왕족을 바라보며 스카이라의 표정은 이루 말할 데 없이 싸늘해졌다.
제국 산하의 중요 왕국, 플라넬. 며칠 전에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그 왕국의 왕에게 사적인 분노를 전가할 만치 그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도 없이 불쑥 방문한 사람에게 환영사까지 주지는 않았다.
스카이라는 불쾌한 티를 여과 없이 내비쳤다.
“미행이라도 해서 따라온 것이냐.”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하지만 결코 미행을 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넬의 왕이 고개를 숙였다.
교활하게 미행한 것도 아니며, 사전 약속도 없이 등장했는데, 황성의 정문을 통과해 중앙관까지 왔다. 누구의 손길이 첨가되었는지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건 황제 혹은 황태자뿐.
스카이라의 추측은 황태자에게로 기울었고, 곧장 확신으로 변했다.
안락하게 차로 이동했을 데본시아가 갑자기 몸이 좋지 않다고 드러누운 것이 이해가 되지 않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왕족으로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 교활한 자식.’
황자인 그조차 모르게 특별 손님을 데리고 장거리 순간 이동까지 감행했을 줄이야.
스카이라는 왕족이 어떤 연유로 자신을 찾아와 기다린 건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가 아주아주 싫어하는 예의 그 용건을 들고 왔을 것이 뻔했다.
“여기서 말할 용건은 아니다. 우선 자리를 옮기지.”
그가 어금니를 으득 깨물며 앞장섰다. 두 왕족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데본시아가 벌인 짓거리 때문에,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에 대해 추궁할 시간도 잃고 말았다.
***
백색의 거대한 더블 도어 앞.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대기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막히지 않았다. 오히려 귀빈을 모시듯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황태자의 침실까지 직행했다. 사용인들은 그녀에게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마치 예정된 일이라는 듯 그녀를 인도했다.
‘미리 언질이 있었나? 아니면 이것도 특별 대우의 일종인가?’
둘 다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진 않았다. 어쨌든 데본시아를 만나면 알게 될 터였다.
‘그런데 스카이라는 어디로 간 거지? 데본시아한테 갔을 줄 알았는데.’
애리얼은 하얀 문 틈새를 바라보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문 너머는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만약 스카이라가 와 있다면 저 안에서 큰 소음이 흘러나왔을 텐데, 이상했다.
방문의 허락을 구하는 시녀의 물음에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맑은 종소리가 문 옆에 박힌 스피커에서 났다. 호출 벨이 허락처럼 울렸다.
시녀는 더블 도어의 한쪽 문을 살짝 밀어 열었다.
“공녀님,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태자의 허락을 전한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열린 문 틈으로 미약한 조명 빛이 흘러나오는 어둑한 방이 보였다. 황태자의 침실.
애리얼은 침착하게 방 안으로 진입했다. 달칵, 그녀의 등 뒤로 미세한 소음이 났다.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시녀가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안쪽은 그림자가 진 듯 어두웠으며 은은하게 라벤더 향기가 났다. 화려한 카펫은 보드라웠고, 의외로 별 가구가 없었다. 그리고 이 널찍한 내부에 켜진 조명은 단 두 개.
브래킷 조명의 약한 빛 아래 침대에 누운 실루엣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하얀 실크 이불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남자의 몸이 드러났다. 널찍한 어깨와 쭉 패어 들어간 등골이 가운을 고쳐 입는 동작에 얇은 천 아래로 감춰졌다.
그 잠깐의 동작이 위협적인 긴장감을 불러왔다.
애리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가 딱딱하게 인사하자 대답 대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데본시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다가오는 인기척에 애리얼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약한 조명 빛에 부스스한 금발이 보였다. 서로 다른 색을 내는 두 눈에 나른함이 묻어 있었다. 자고 있던 것이 분명한 모양새였다.
그녀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주무시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늘 그랬듯이.
“와서 좀 앉을래? 내가 지금 서 있기가 좀 그러네.”
그렇게 말하며 데본시아는 근처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프기라도 한 건지 팔걸이에 축 늘어트린 손이라든가 등받이에 모로 기울어진 상체에 전혀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었다. 열이 나는 이마를 그녀의 손등에 대며, 아프다는 것을 드러내고…….
애리얼은 그가 의외로 병약한가 싶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소파로 조심스레 다가간 애리얼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는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짓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어떡하지……. 안 괜찮다고 하면, 네가 가 버릴 거 같은데.”
그가 슬픈 척 떠보는 소릴 했다. 가지 말라는 듯이.
용건이 있어 찾아온 건 애리얼인데 그가 더 아쉬운 것처럼 굴고 있으니 희한했다.
“……안 갈게요.”
애리얼은 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가능하면 맞은편 자리에 앉고 싶었는데 소파가 하나뿐이라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소파 팔걸이에다 팔을 세워 관자놀이를 괴곤 애리얼을 보았다. 기울인 고개 탓에 가운이 벌어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하얀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게 의도적인 느낌도 있었다.
그나마 조명이 어둑해서 다행이라 여기며 애리얼은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옆얼굴에 와 닿는 게 느껴졌으나, 그녀의 눈은 허공만 주시했다.
데본시아는 제게서 고개를 돌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해서 왔어?”
“이거요…….”
애리얼은 브레이슬릿을 만지작거리다 그에게로 제 손목을 내밀어 보였다.
“풀리질 않아서,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해서 왔습니다.”
“역시 그것 때문이구나.”
데본시아는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그에 애리얼이 그의 의도를 짐작하며 물었다.
“일부러 탈착할 수 없게 만드신 건가요?”
그 물음에, 가늘어진 눈으로 살짝 웃음기를 띤 그가 손가락을 내밀어 브레이슬릿을 톡톡 건드렸다.
“쉽게 풀리면 의미가 없는걸? 보호하기 위한 물건이니까.”
“그러면 풀지 못하는 건가요?”
“응.”
“…….”
“참고 껴 봐. 너에게 도움이 되는 거니까.”
데본시아가 그 아름다운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브레이슬릿을 풀어 줄 뜻이 없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풀어 줄 수 없다…….’
애리얼은 의심스러운 불안이 쌓이는 걸 느꼈다.
『*데본시아 루트의 모든 굿 엔딩이 삭제됩니다.』
그에게 남은 엔딩 중 좋은 게 없다는 걸 떠올리자, 불안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데본시아는 이 브레이슬릿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라 말했지만, 실은 통제를 위한 도구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황태자의 호의를 무턱대고 거절할 수 없는 애리얼은 말을 고르느라 잠시 침묵했다. 어차피 데본시아가 거부한다면 그녀가 이걸 풀 방법은 거의 없었다. 데본시아에 버금가는 마력 보유자가 이걸 해제해 주지 않는 이상은 계속 달고 살아야 한다. 그의 마음이 변할 때까지…….
조용해진 애리얼에게 데본시아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용건은 그걸로 끝?”
“……네.”
“그래? 조금 아쉽네.”
투욱, 어깨에 뭔가 묵직한 것이 얹어지는 느낌에 애리얼은 고개를 돌렸다. 옅은 비누 향이 나는 금발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애리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몸을 굳혔다. 데본시아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전하.”
굳은 신체만큼 얼어 버린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동요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에게 기대 물었다.
“애리얼, 내가 두려워?”
“……아니에요. 조금 놀라서 그렇습니다.”
“그랬구나. 미안해, 조금만 빌릴게.”
그가 투정을 부리듯 애리얼의 어깨와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데본시아의 세사(細絲) 같은 부드러운 머리칼과 따스한 피부가 밀착해 왔다. 그저 기대는 정도의 접촉인데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어색한 자세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감히 아픈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사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는 친절하고 때로는 노골적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호감도 수치는 높지 않으리라. 애리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를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호감도 상승 알림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애리얼이 모르고 놓쳤을 가능성을 감안해도 그의 호감도 하트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있어도 하나 정도가 다겠지.
심적인 거부감과는 별개로, 애리얼은 그의 호감도를 올려야 했다. 그래서 애리얼은 그에게 제 어깨를 내어 줬다.
데본시아와의 만남은 늘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그의 일부 집착적인 접촉을 포함하여 이루어졌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그는 다른 때에 비해 유독 말이 적었다.
그는 정말로 피곤했던지 애리얼에게 가만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기력이 없는 모양이었고, 숨소리조차 미약하게 힘겨움이 묻어났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침대에도 눕지 않고 구태여 넓지도 않은 어깨를 빌릴 만큼, 그는 애리얼의 곁에 붙어 있고자 했다.
‘무슨 의도일까……. 어떤 감정일까…….’
그리 무겁지 않은 그의 무게를 느끼며, 애리얼은 늘 가지고 있던 고민에 휩싸였다.
그녀는 데본시아가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스카이라를 자극하기 위한 중간 매개. 따라서 그의 모든 행동이 알맹이 없는 연기 같다고 느꼈다. 그랬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가운데 아주 약한 숨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나른하면서도 긴장되는 묘한 순간이 이어졌다.
***
애리얼이 황태자의 침실을 나온 것은 한 시간가량이 흐른 후였다.
데본시아는 꽤 오래 그녀의 어깨를 빌려 쓰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금 보내야 마주칠 일 없겠지, 하는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서는 그녀를 보내 주었다.
데본시아는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은 나른한 눈빛을 하고서 그녀를 위해 손수 문까지 열었었다. 그 짧은 행동에도 여지없는 호감이 묻어났다. 오늘은 스카이라가 난입하지도 않았으니 스카이라를 자극하기 위해 벌인 일도 아닐 텐데.
애리얼은 자신을 배웅하는 데본시아의 눈이 진실로 헤어짐을 아쉬워함에, 모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저러고도 호감도가 상승했다는 알림은 하나도 울리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연기인지, 아니면…….
‘아니면 뭐지?’
추측이 막힌 그녀는 막연한 기분이 되었다. 차에 올라서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내릴 때까지 그 막연함은 계속되었다.
데본시아를 대하는 데는 해법이 없었다. 지금과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은지, 그가 보이는 유혹에 넘어간 척 다가가야 할지. 다가갔을 때 그의 호감도가 오를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숙사 방에 와서도 고민이 계속되자 애리얼은 아예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대로 데본시아에 대한 것을 보류하고 가기에는 상황이 꽤 많이 변했다. 정리가 필요한 순간이기에 그녀는 휴대폰부터 꺼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휴대폰 속 그의 프로필 창은 오류인 상태로 호감도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인물이기에 그는 아직도 호감도 창이 비밀리에 숨겨져 있는가. 그녀는 가설이라도 세워 보려고 펜을 꺼내 들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