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가설 1, 휴대폰 자체 결함으로 시스템 창이 오류를 냈고 여태 고쳐지지 않았다. 일시적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음.
해결법: 계속 기다리기. 혹은 휴대폰을 뜯어서 고쳐 본다?(하지만 기기에 관한 상세한 지식이 없음. 불가능.)
가설 2, 데본시아가 모종의 일을 꾸며서 시스템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어떻게? 왜?
해결법: 데본시아를 제지한다?
가설 3, 시스템 창이 주는 일종의 공략 페널티.
해결법: 없음. 호감도 상승 알림에 의존해 추측으로 데본시아를 공략한다…….」
수첩에 몇 자 적은 애리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가설을 세울수록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다.
하기야 그녀는 이 시스템 창의 정체조차 몰랐다. 모르는 것에 모르는 오류가 났으니 당연히 원인도 결론도 시원찮았다.
마지막 줄에 적은 대로 호감도 상승 알림이 올 것이라 상정하고 거기에 기대어 데본시아의 하트 개수를 추측하며 공략할 수밖에.
펜을 놓은 애리얼은 수첩에서 가설을 적은 부분을 쭉 뜯어내 잘게 찢었다. 그런 다음 유리 램프의 뚜껑을 열고 찢은 조각들을 넣었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종이가 촛불에 타 사라졌다.
애리얼은 가만히 일렁이는 램프 안의 불꽃을 보다가 일어났다.
시원한 결론이 없어 갑갑한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다.
“카논, 잠깐만 나갔다 올게.”
“몇 시쯤 들어오세요?”
“별로 안 걸릴 거야. 한 이십 분?”
“네. 저녁은 여섯 시에 준비할 테니 천천히 돌고 오세요.”
애리얼은 다섯 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응.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카논이 앞치마를 고쳐 입으며 배웅했다. 이럴 때면 애리얼은 그녀가 가족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애리얼은 따스한 기분을 느끼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섰을 때, 그 미소는 사라졌다. 눈이 동그래진 그녀가 복도 벽에 기댄 남자를 불렀다.
“스카이라.”
겨울 바다처럼 깊고 푸른 색깔의 눈이 애리얼을 향했다. 내내 기다린 것 같은 모양새인 그가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이야기야?”
“나한테는 중요해.”
피로한 듯 날카로워진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애리얼은 문을 닫고서 나왔다. 복도는 적막했으나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자리를 옮길까?”
“넌, 내가 약혼하면 어떨 것 같아?”
그가 갑자기 본론을 꺼냈다. 애리얼은 가까운 응접실을 찾아 고개를 돌리려다 어리둥절해하며 시선을 원위치했다.
“약혼?”
“그래.”
“황자비 얘기라면 전에…….”
“그거 말고.”
스카이라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애리얼의 말을 끊었다. 다친 곳이 건드려진 듯 예민한 반응이었다. 괜히 더 그를 자극할까,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마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플라넬 왕국에서 혼담을 가져왔어. 나와 왕녀의 약혼을 추진하고 싶다고 하더라.”
“…….”
“그래서 네 의사는 어떤지 묻고 싶어서 왔어.”
“너와 왕녀의 약혼에 대해서?”
“어.”
난감한 것을 질문이라 던진 스카이라는 태연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뻔뻔한 구석까지 있었다.
애리얼은 곧장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공략 대상에게 약혼녀가 있는 건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오늘 아나스타샤 때문에 별 경험을 다 했다. 공략 대상도 모자라 그들의 약혼녀에게까지 신경을 쏟고 눈치를 보기는 힘겨웠다.
그렇다고 그에게 약혼하지 말랄 수도 없었다. 애리얼은 이미 스카이라가 건넨 황자비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런 애리얼이 그의 약혼을 반대하는 것도 이상했다. 황자의 약혼이라는 제국의 중대사에 왈가왈부할 입장도 아니었고.
“잘…… 모르겠어. 감히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생각해.”
애리얼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애매한 대답이지만 백작 공녀로서 할 수 있는 정론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스카이라가 기대한 대답은 전혀 아니었던 듯했다. 그는 한숨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가 떨어트렸다. 실망한 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게 다야?”
“난 이 일에 말을 얹어도 될 처지가 아닌걸. 네 허락을 받아 이렇게 반말하고 있기는 해도 백작가 공녀에 불과하니까 황족의 개인사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지.”
“그런 거 말고, 네 감정…… 아무튼 계급이나 뭐 그런 부수적인 걸 떠나서 네 생각만 말해 봐.”
“……왜?”
“나한텐 그게 중요하니까.”
그의 눈은 진지했다. 애리얼은 대답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게임에 중요 분기가 있다면 지금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큰 부담감이 끼쳐 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서 노골적으로 마주쳐 오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너에게 좋은 일이라면 하고, 아니라면 하지 말고. 네 이득이 되는 쪽으로 했으면 좋겠어.”
“그게 네 생각이야?”
“응.”
“내가 약혼해서 싫다거나…… 그런 건 없어?”
“딱히 그런 마음은…….”
애리얼은 대놓고 말을 내뱉으려다 그만 말꼬리를 흐렸다. 곁눈질로 본 스카이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구겨진 탓이었다.
화나고 상처받고, 그런 얼굴을 여지없이 드러낸 그가 억눌린 음성을 뱉었다.
“잘 알았어.”
그녀를 노려보며 비꼬는 투로 말을 마쳤다. 파란 눈빛이 칼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쓰라려 보였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뻗어지려는 제 손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원망과도 같은 감정을 내비치던 스카이라가 쌩하니 몸을 돌렸다. 그는 성난 걸음으로 복도를 성큼성큼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동안, 우우우웅-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애리얼은 그가 사라진 빈 복도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놀랍게도 하트가 늘어나 있다.
애리얼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분명히 하락했을 줄 알았는데?’
애리얼은 지금 이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분명하게 애리얼을 원망하고 있었다. 기대 이하의 무심한 답변, 끝까지 그를 붙잡지 않는 손. 그런 그녀에게 상처받아 날카로워진 벽안.
그런데도 그의 호감도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하트는 반 개가 더해져 세 개가 되어 버렸다.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목표 수치가 달성되었다.
지이이잉-
『공략 대상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의 호감도 수치가 ‘♥♥♥’를 달성하여 엔딩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지금부터는 언제든 엔딩을 맞을 수 있습니다.』
“아…….”
애리얼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새로운 알림을 보았다.
레이신의 호감도를 하나도 채우지 못한 상태로 스카이라의 하트가 세 개에 도달했다. 이제 엔딩의 위험성을 지닌 채 공략을 진행하는 상황에 놓였다.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애리얼은 인정해야 했다. 사람의 감정이란 의도한 대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
스카이라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군데가 쑤셨다. 애리얼이 그의 약혼에 대해 백작 공녀로서의 형식적인 답안을 던질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도 원하는 답을 바라며,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가 바늘에 찔린 듯하던 가슴속이 칼에 베인 듯이 쓰라려졌다.
차라리 묻지 말고 듣지 말걸.
후회하는 그의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늘 들은 애리얼의 대답은 그만큼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실망과 감정은 다른 거였다. 실망하고 상처받았음에도 그만큼 제 감정을 여실히 깨달은 그는 확연한 애정을 느끼고 말았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속절없이 커졌다.
왜 싫다고 말하지 않았어. 왜 나를 붙잡지 않았어, 애리얼. 뱉어 내지 못한 원망이 머리를 휘저었다.
스카이라는 발소리가 울릴 만큼 거친 걸음으로 중앙관을 가로질렀다.
사용인들은 오늘따라 계속 저기압인 황자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폭발할 것 같은 황자. 이 와중에 누군가가 황자에게 다가갔다.
마침 황성을 방문한 렉시우스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층계를 내려오던 그가 스카이라에게 알은체를 했다.
“스카이라.”
“비켜.”
사납게 내뱉은 스카이라가 렉시우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렉시우스는 기분 나빠 하는 티도 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스카이라는 이미 계단을 전부 올라가 복도 너머로 사라진 상태였다. 렉시우스는 픽 김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계단을 마저 내려와 1층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안에서는 가운 차림의 황태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손등으로 눈을 가린 모습이었다. 평소 렉시우스나 하던 꼴을 그가 하고 있으니 신기했다. 고상함의 표본 같은 인간이 저렇게 방만한 차림이라…….
“외교가 그렇게 고됐어? 이래서 황제는 어떻게 할래.”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 줄래.”
데본시아의 목소리는 꽉 잠겨 낮고 거칠었다. 자던 중에 강제로 불려 나온 그는 심기가 잔뜩 뒤틀린 상태였다.
렉시우스는 사용인들을 전부 물린 조용한 응접실을 한 번 훑었다. 아까 복도에도 문을 열어 준 시녀 외엔 사람이 없더니, 내부도 같았다. 이토록 철저하게 듣는 귀를 단속한 걸 보니 그의 협박이 데본시아의 의표를 제대로 찌른 모양이었다.
렉시우스는 비웃음을 지었다.
“그 꼴로 여기까지 다 납시고, 내가 한 추측이 진짜였나 봐?”
“맞아.”
렉시우스가 기세 좋게 조롱했건만, 데본시아는 싱겁게 인정했다. 마치 그가 이럴 줄 알았다는 모양새였다.
끌어 올려졌던 렉시우스의 입꼬리가 무뚝뚝하게 원위치로 돌아왔다.
“황태자 자리를 뺏길 수도 있는 일이야.”
“알아. 그래도 해야 했어.”
“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건데.”
렉시우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데본시아는 웃었다.
“새장에서 살아야 할 새에게 누가 나는 법을 가르칠까. 오히려 날개를 잘라 두면 내 손에만 의지하게 될 텐데.”
데본시아는 렉시우스의 질문에 영 딴소리를 했다.
렉시우스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날아가지 못하게 날개를 잘라 둔다, 즉 유약하게 내버려 두어 자유를 뺏겠다는 거다. 새라는 것은 아마도 애리얼, 날개는 마력을 뜻하며, 날개를 자른다는 건 마력에 제한을 걸겠다는 의미이리라.
렉시우스의 이해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는 데본시아의 저 영문 모를 발언과 비유를 이해하고 만 자신이 역겨웠다.
데본시아가 간악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추측에 쐐기를 박았다.
“가지고 싶은 건 강하게 키우면 안 된다는 소리야.”
“미친 새끼. 그렇다고 결과지를 속여?”
“말은 그렇게 해도, 넌 이해할 거야, 렉스.”
데본시아의 눈이 위험천만하게 빛났다. 렉시우스는 그가 드디어 돌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요하는 자신도 반쯤 돌아 버렸다고 느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