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정신없이 시간이 갔다.
아카데미는 오월을 맞아 녹음이 짙어졌고, 날씨는 따뜻해졌다.
시간표는 확정되었고, 학생들의 생활도 점점 바빠졌다.
본수업이 진행된 이후로 애리얼은 공략 대상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레이신은 말할 것도 없고, 데본시아도 침실에서 만난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시간표마다 따라다니던 스카이라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렉시우스를 목, 토에 보는 게 다였다.
가끔 휴대폰을 확인할 때 보는 그들의 위치는 아카데미 안이 아닐 때도 많았다. 각자의 이유로 다들 바쁜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도 그날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도 편입생이니 바쁜 게 분명했다.
물론 애리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력학과 교양 하나를 듣는 게 다인데도 그녀는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았다. 그녀의 기초가 타 학생들에 비해 너무 부족했고, 그런 그녀의 수준에 비해 마력학은 너무 어려운 수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렉시우스에게 따로 가르침을 받은 덕에 애리얼은 가까스로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바빴던 그는 일이 끝나자마자 목, 토로 약속된 애리얼과의 만남부터 재개했다. 그의 보좌관이 아침 일찍 그녀를 찾아와 파투 났던 약속의 재개를 전했었다. 공교롭게도 애리얼이 데본시아를 만나고 왔던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애리얼은 선뜻 과외를 해 주고 있는 그가 매번 고마웠다. 그래서 애리얼은 그에게 작게나마 보답을 하고자 했고, 백작저에 괜찮은 선물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었다. 입학하고 첫 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 백작저에 부탁했던 렉시우스의 선물이 도착했다.
“뭘 보내 줬으려나?”
도서관 열람실의 책상에 앉은 애리얼이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선물은 오늘 오전 중으로 도착한다고 했으니 지금쯤 그녀의 기숙사 방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로 렉시우스를 만나는 날이었다.
적당히 복습을 마친 애리얼은 선물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서 일어났다. 계단을 올라 2층의 연결 통로를 건넌 뒤 방에 다다르자 문을 나서는 카논이 보였다. 카논이 그녀를 보고서 걸음을 멈췄다.
“아가씨, 안 그래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백작저에 부탁한 게 온 거지?”
“네. 그런데 조금 문제가…….”
카논이 말끝을 흐리며 문 안쪽을 돌아보았다. 애리얼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곧장 방으로 들어가 선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카논이 말하던 그 문제에 직면했다.
널찍한 방의 한쪽 벽면을 모조리 채울 정도로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 상자.
애리얼은 지나치게 많은 선물의 양을 보고 입을 벌렸다.
“너무…… 과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옆에서 카논이 맞장구를 쳤다.
족히 오십 개는 될 상자의 개수. 그리고 내용물은 대부분 고가의 보석이나 귀금속류였다. 누가 보면 결혼 예물이라도 준비한 줄 알 것 같았다. 대공가와 사돈을 맺는 것도 아니고.
백작이 직접 골라 보냈을 텐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스카이라와 데본시아에게 선물을 전할 때도 초고가의 보석 하나를 간단히 골라 보냈던 백작인데.
“중복 주문이라도 된 건가?”
“그건 아니에요. 제가 태그를 다 확인해 봤는데, 각각 바르게 주문하고 전달된 것이 맞아요.”
카논의 말에 애리얼은 난감해하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한 달이나 걸릴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녀는 상자 더미로 가서 개중에 그나마 작은 상자를 하나 들어 보았다. 청록색의 리본에 유명한 브랜드명이 적혀 있었다. 이거면 충분한데, 어쩌다 이렇게 많은 선물을 처치 곤란할 정도로 보내신 걸까.
“왜 이렇게 됐지?”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것이니 백작님께서도 아끼지 않으신 게 아닐까요?”
“어머니께서? 왜?”
“아가씨께선 먼저 부탁하는 일이 거의 없으시잖아요. 백작님은 이렇게라도 챙겨 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애리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카논의 말을 반박하고 들지는 않았다.
카논은 백작저에서 오래 일한 하녀였다. 백작에 관한 카논의 판단은 정확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애리얼은 카논이 왜 저런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문득 또 다른 근거가 될 과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레이신을 만나러 황성에 갔을 때…….’
그때 백작은 아무렇지 않게 귀족으로서의 최고 권리를 걸었다. 아무리 얻는 이득이 있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심지어 황성에 갈 수 있도록 직접 서신을 넣고 날짜까지 골라 준 것도 백작이었다.
애리얼은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인형 같기만 했던 과거의 애리얼도 백작에겐 딸이었을 텐데. 그때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공략만 끝나면 떠날 생각뿐인 지금의 애리얼에겐 이토록 신경을 써 주다니. 미안하고 안타깝다가 종국에는 슬퍼졌다. 상황이 어떻게 이럴까…….
“어머니께서 마음 써 주신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이걸 다 드리는 건 안 되겠어.”
황자와 황태자에게도 선물을 이렇게 많이 보내지 않았다. 대공자에게만 과한 선물을 보냈다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애리얼은 제 손에 들린 청록색 리본의 작은 상자만 따로 테이블에 뒀다. 십자 모양의 백금 이어링이 들어 있다는 태그가 붙은 상자였다. 보석보다는 렉시우스의 취향에 맞을 것 같았다.
“이것만 빼고 나머지는 백작저로 돌려보내야겠다.”
카논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 여덟 시.
애리얼은 선물과 하얀 교복 블레이저를 넣은 종이봉투를 렉시우스에게 건넸다. 그는 종이봉투를 열어 보더니 무심하게 물었다.
“뭐냐?”
“선물이야. 선배한텐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그 말에 렉시우스의 눈이 봉투를 대충 훑었다.
“옷 같은 건 줘도 안 입는다.”
“아니야. 저번에 나 잠옷 입고 나갔을 때 선배가 빌려줬던 교복 상의야.”
“그걸 왜 이제 줘?”
“선물이랑 같이 주려고 했거든. 근데 선물이 너무 늦게 왔어.”
“피곤하게 사네.”
렉시우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 청록색 리본의 상자를 꺼냈다. 그는 대충 상자를 살펴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책상에 뒀다. 그러고는 교복이 든 봉투를 다시 애리얼에게 돌려줬다.
애리얼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선배, 교복은 안 가져가?”
“선물이야. 너 해.”
“…….”
“왜 싫은 표정이지?”
“아냐, 고마워.”
애리얼은 떨떠름한 심정을 감추며 봉투를 다시 받았다. 제 교복을 선물이라 말하는 그는 귀찮아 떠넘기려는 요량이거나 혹은 자의식 과잉인 게 분명했다.
그걸로 싱거운 보답의 시간이 끝났다. 렉시우스는 선물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진도만 가차 없이 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 애리얼이 오늘 나간 진도를 복습하고 있을 때, 그가 문득 말을 걸었다.
“다른 애들한테도 이런 거 해 줬어?”
“이런 게 뭔데?”
“선물 주는 거.”
“응. 했었어.”
그녀의 대답에 렉시우스의 눈이 짜증 난 듯 가느스름해졌다.
복습하느라 책에 두 눈을 고정한 애리얼은 그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선물이라기보단 조공 같은 거였지만, 황자 저하와 황태자 전하께 한 번씩 드렸어. 가문에 관련된 일이어서 어머니의 뜻이 컸지만.”
“그럼 이것도 백작의 뜻이야?”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앞에 불쑥 선물 상자를 들이밀며 말했다. 무엇이 못마땅한지 꽤 퉁명스러운 어투였다. 애리얼은 잠깐 그를 올려다보곤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니. 내가 요구했어. 선배한테 선물을 주고 싶은데 혹시 골라 줄 수 있냐고.”
“왜 네가 직접 안 고르고?”
“나는 가진 돈이 별로 없었거든. 저번에 종이랑 풍선으로 만든 거 봤잖아. 나 그 정도밖에 못 해 주는 상태야.”
“그런 거 해 줘도 딱히 상관은 없는데.”
“언제는 취향 아니라며.”
“어, 취향 아니야. 그래도 해도 된다고, 저번에도 말했잖아.”
“……영문을 모르겠네.”
애리얼이 의문이라는 양 말해도 그는 모르는 척 웃기만 했다.
***
시간은 또 빠르게 흘렀다.
오월이 지나고, 또 유월이 갔다. 칠월을 맞은 날씨가 더워졌다.
렉시우스의 과외를 받으며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한 애리얼은 드디어 열 살배기 수준의 지식에서 벗어났다. 여전히 마력학을 듣기는 힘겨웠으나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이제 겨우 넉 달째인 걸 생각하면 정말 빠른 성장이었다. 보통은 기초를 다지는 데만도 일 년이 넘게 걸렸다.
넉 달이라는 결과는 애리얼이 마력과 마법에 관심을 가지고 몰두했기에 가능했다.
물론 렉시우스라는 훌륭한 멘토의 존재도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제 애리얼은 곧 있을 마력학 1차 시험을 앞두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많은 시간을 마력과 마법을 배우는 데 쏟아부으면서도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공략이 주목적인데 왜 이러고 있는지, 허탈한 적도 많았다.
그러다 애리얼은 점점 마법에 매료되었다. 그녀가 아는 세계와는 원천적으로 다른 이곳에서만 존재하는 힘. 흡사 초능력과도 같은 마력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마법이 있는 세계에서 마법사로 사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애리얼은 언젠가 한 번 정도는 제 마력을 훌륭히 써먹어 주고 이곳을 떠나리라, 다짐했다.
‘……근데 그러려면 마력을 활용하는 것도 틈틈이 연습해 봐야 하지 않을까?’
홀연히 떠오른 생각에 애리얼은 잠시 도서관에서 일어났다.
목요일이었으나 렉시우스는 옆에 없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그랬다. 그는 자기 일이 바빠 일주일에 하루도 시간을 내지 못했다. 애리얼 혼자 알아서 공부하라는 식이었다. 시험 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지 조금 궁금했지만 애리얼은 굳이 묻지 않았다.
장시간 앉아 있던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켜자 관절에서 뚜둑 소리가 났다.
애리얼은 몸도 풀어 줄 겸 마력을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그녀는 책을 덮고 정원으로 나갔다.
칠월에 접어들며 부쩍 더워진 날씨가 느껴졌다. 호수가 꽤 가까워서 그런지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그나마 해가 져서 낮보다는 훨씬 시원한 편이었다.
애리얼은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얗게 콕콕 찍힌 별이 보였다.
아홉 시 조금 덜 된 시각. 유난히 해가 길어진 칠월의 하늘은 노을과 밤의 풍취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마력을 연습하려던 것도 잊고 풍경에 심취했다.
누군가 그녀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한동안 계속 그러고 있었을지 모른다.
“뭐 해?”
바스락바스락 잔디를 밟으며 다가온 이가 여름밤에 어울리는 청량한 목소리를 냈다.
애리얼은 젖혔던 고개를 곧장 원위치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얀 교복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스카이라?’
하지만 그라기에는 휴대폰의 접근 알림이 울리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금발을 흔들고 지나갔다. 푸른색과 은색으로 선명하게 다른 두 눈동자가 애리얼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데본시아,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레이신과 더불어 기숙사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던 인물이었다.
애리얼은 그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황태자 전하? 어떻게 여기에…….”
일단 나도 여기 학생이긴 한데……. 기숙사에 방도 있고.”
그가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해요.”
“그래? 그럼 자주 올까?”
“네?”
“나도 여기서 지내면 어때?”
그가 불쑥 꺼낸 말에 애리얼이 떠올린 건, 그와 스카이라의 충돌이었다. 최근에는 그 빈도가 줄었다지만 스카이라의 위치 정보는 기숙사일 때가 많았다. 데본시아가 이곳에서 지내게 되면 둘은 부딪칠 일이 많을 것이었다.
애리얼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자 그가 말을 거뒀다.
“농담이야. 일이 많아서 여기 오는 건 힘들거든.”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고상하고 여유로웠다. 다만 그의 얼굴에서는 왜인지 씁쓸함이 묻어났다. 애리얼은 그게 신경 쓰여서 저도 모르게 에두른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기 정원이 예뻐요. 조용하기도 하고, 평화롭고. 시간 날 때 가끔 들르세요.”
“그래. 너 보러 올게.”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애리얼이 낭패감을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데본시아는 그 짓다 만 것 같은 미약한 미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적지근한 공기 속에 밤바람이 불었다.
대화가 단절되어 애리얼의 미소가 완전히 거두어졌을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산책?”
“마력을 다루는 연습을 한번 해 보려고 나왔어요. 아직 많이 미숙해서…….”
“내가 도와줄까?”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