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데본시아가 선뜻 제안했다. 애리얼은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그는 황태자인 데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해 보였으니까.
“괜찮으신가요? 혹시 바쁘신 건…….”
“바쁘긴 한데, 지금은 괜찮아.”
그는 흔쾌히 말했다. 그러자 애리얼은 기본조차 못 하는 제 실전 능력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 아니, 괜찮아요! 제가 정말 기초가 없어서, 황태자 전하께서 봐주실 수준은 안 돼요.”
“나도 쉬운 것만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잘됐다.”
데본시아가 능청스레 웃으며 더 이상의 거절을 잘라 냈다.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가르쳐 줄게, 오른손만 이쪽으로 줘 봐. 손등은 아래로 하고.”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다 제 오른 손등을 포갰다. 자그마한 손이 그의 손안에 폭 들어가 완전히 감싸졌다. 맞닿은 온기에 괜스레 긴장감이 일어 애리얼의 표정이 얼었다.
“긴장 안 해도 돼. 마법 위계에 들지 않는 가장 기초 단계만 할 거니까, 편하게 생각해.”
그는 무척 다정하게 굴었다. 잔잔한 음성이 상냥하게 귀를 간질였다.
“실수해도 괜찮아.”
“……네.”
“그럼 우선은 방출부터. 손안에서 마력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해봐.”
아래 겹쳐져 있던 그의 엄지가 올라와 애리얼의 손바닥을 살며시 눌렀다.
애리얼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마력을 방출했다. 손이 물에 젖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늘하게 흐르고 넘쳐 손안을 가득 적시는 촉감.
마력전을 시간표에 넣었던 시기에 연습했던 부분이라 쉬웠다.
“다시 닫아 봐.”
그의 말에 따라 애리얼은 마력의 방출을 멈췄다. 손안을 가득 채우던 물기와 같은 촉감이 삽시에 증발했다.
“다시 방출.”
애리얼은 그대로 따랐다. 다시 물이 넘쳐흐르듯 손안이 서늘해졌다.
데본시아는 가만히 그녀의 손바닥을 누르고 있다가 말했다.
“이번에는 방출하는 양을 줄여 봐.”
애리얼은 호흡을 고르듯 넘치는 마력의 양을 조절했다. 느리고 조용히 호흡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마력이 줄어들고, 강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던 감각이 손바닥 중앙을 가로지르며 가느다란 실개천이 흐르는 느낌으로 변했다.
“다시 늘려 봐.”
손안의 실개천이 다시 강물로 범람했다. 여기까지는 늘 잘했었다.
애리얼이 잘 따라오자 그는 그다음 단계를 요구했다.
“마력을 두 갈래로 나눠 봐.”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손안의 마력을 조절했다. 강물을 두 줄기로 나누어 흐르게 하는 거였다. 애리얼은 늘 이 부분부터 급격히 막혔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실패했다. 두 갈래로 줄어야 할 촉감은 여전히 방대하게 범람하는 감각에 묻혀 있었다.
“여기가 어렵구나.”
데본시아는 도와주려는 듯 그녀의 손바닥을 조금 세게 눌렀다.
“내 손가락이 기준점이라고 생각해. 잇새로 호흡하는 느낌으로 마력을 줄여 봐.”
그의 지도는 단순 명확했다. 그의 손가락이 기준점이 되었다. 애리얼은 그의 설명을 그대로 따랐다. 강물 같던 마력이 곧장 갈라졌다. 그의 손가락을 기준으로 둑이 생긴 듯했다.
그토록 어렵던 게 뭔가 대리라도 받은 듯 수월하니 애리얼은 이상함을 느꼈다. 왼손의 브레이슬릿이 기이하게 반짝이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잘하네.”
그가 나긋하게 칭찬했다.
“자, 이제 나눈 걸 다시 합쳐 봐.”
그건 쉬웠다. 애리얼은 능숙하게 손안의 작은 둑이 무너지도록 마력을 범람시켰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손바닥 가운데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구나…….”
조용히 흘린 혼잣말이었다.
애리얼은 곧장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 수준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가 놀라 한 말인 줄로만 알았다.
“죄송해요. 제가 최소한의 기본도 안 된 상태라…… 전하께서도 당황스러우셨을 거 같아요.”
“응? 아냐, 잘했어.”
데본시아는 풀 죽은 애리얼을 보고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하면 쉬워져.”
“그런가요?”
“응. 이제 쉬울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다시 마력을 나누고 합치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강하게 손바닥을 누르던 데본시아의 손가락에 의지했다. 여러 번 반복하니 그의 손가락이 손바닥에서 떨어져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애리얼이 거기까지 발전하자 데본시아는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손 아래를 감싸던 손바닥을 돌려 손목을 쥐고는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손바닥을 눌렀다.
그 방식으로 그녀가 두 갈래로만 겨우 나누던 마력을 세 갈래로까지도 나누게 도왔다. 처음에는 세게 누르다가 천천히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애리얼은 그의 가르침을 따라 빠르게 마력을 익혔다. 나중에는 그의 손이 없이도 마력을 세 갈래까지는 잘 나누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이었다.
밤이 완연해져 하늘이 새카맣게 변하고 별빛이 반짝였다.
그때서야 연습이 끝났다.
혼자서도 마력을 잘 다루게 된 애리얼은 무척 기뻐하는 얼굴로 데본시아를 보았다.
“황태자 전하께 큰 도움을 받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대답하는 그는 어딘지 그림자 져 보였다. 미소를 짓고 있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은 것 같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음습함이 그의 얼굴에 고여 있었다.
애리얼은 서늘한 칼날을 드리운 것 같은 그의 눈동자를 보고서 주춤 물러났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 아래 음산하게 울렸다. 오스스 소름이 끼친다. 그가 애리얼이 물러난 만큼 다가왔다. 한 발짝. 한 발짝. 날아가려는 새를 잡으러 오듯.
“너무 빨리 배워서…… 솔직히 불안해. 정말 기초만 가르쳤을 뿐인데도.”
그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그녀와의 거리를 급격히 줄여 왔다.
애리얼은 뒤로 걸음을 물리려 했으나 그가 훨씬 빨랐다. 삽시에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애리얼은 그의 품에 꽉 안겼다. 실습장의 계단 아래에서처럼. 그때 맡았던 향기가 폐부로 가득 스몄다. 고혹적인 꽃 향, 무게감 넘치는 우드 향.
머리가 아찔해지는 체취만큼 농염한 목소리가 귓가에 소곤거려졌다.
“너무 빨리 배우지 마, 애리얼.”
“어째서…….”
애리얼이 물어도 그는 낮게 웃기만 했다. 미지근한 숨결이 닿아 피부를 간질였다.
그러더니 데본시아는 천천히 애리얼을 놓아줬다.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두 걸음 떨어지는 그녀를 보고서 그는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법 같은 거 하나도 못 써도 돼.”
가르친 사람이 가르침을 부정하듯 말했다.
애리얼은 어안이 벙벙해져 그를 보았다. 그는 대답이나 반박을 기다리지 않았다. 헤어짐을 알리듯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또 보자.”
짧은 인사를 끝으로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순간 이동이었다.
데본시아가 떠나자 애리얼은 정원 잔디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다가와 끌어안은 순간, 그녀는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이빨이 날카로운 짐승에게 기도를 물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호감도가 올랐다는 알림 한번 울린 적 없는 그가…… 스카이라보다 훨씬 더 심한 욕망을 한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애리얼은 급하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혹시 알림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어째서…… 왜, 그대로야?”
호감도가 올랐다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리얼은 변한 것 없는 프로필 창이 갑갑하고 두려웠다. 이런 와중에 그의 엔딩은 이상하게 변하지 않았던가.
『*데본시아 루트의 모든 굿 엔딩이 삭제됩니다.』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다.
그의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는 점이, 그녀는 가장 두려웠다.
***
그 일이 있고 난 후, 애리얼은 마력을 연습하지 않았다. 자꾸만 데본시아의 잔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력을 쓸 때마다 너무 빨리 배우지 말라던 그가 제어 장치처럼 생각났다. 왼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도 자꾸 신경 쓰였다.
‘빨리 성장하면 제지라도 당하게 될까…….’
애리얼은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다 그것도 멈추었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이 더 중요했다.
제1 시험장, 가장 앞자리에 앉은 그녀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낙제만 면하자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딱딱한 얼굴로 시험장의 시계를 보았다. 시험 시작인 오전 열 시까지는 십 분 정도가 남았다.
애리얼의 눈동자가 내부를 훑으며 천천히 책상으로 돌아왔다.
높은 천장, 그만큼 기다란 백색의 벽, 그 벽과 어울리는 긴 아치형 창문이 엄격한 분위기를 풍겼다.
교사 동에서 조금 벗어난 자리에 홀로 자리한 종합 평가관. 그 내부에 수업별로 나뉜 각각의 시험장에서 학생들은 1차 시험을 쳤다. 준비된 시험장은 크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외관을 하고 있었다.
고개 숙인 그녀의 곁으로 조교가 다가왔다.
마호가니 책상 위로 마력학 시험지가 담긴 하얀 봉투가 배부되었다.
애리얼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시험을 직전에 두고 봉투를 눈에 담자 오히려 침착해졌다.
타종과 함께 봉투가 열리고, 학생들의 펜대가 일제히 움직였다.
오지선다의 일반 문제 20항과 자유롭게 서술하는 논술 문제 2항. 제한 시간은 세 시간.
애리얼은 주어진 시간을 한 시간만 소모하고서 시험지를 제출했다. 아직 응용이 모자란 탓에 논술 문제를 길게 서술하지 못했다. 고작 서너 줄 수준의 가벼운 답변을 적어 내는 게 한계였다. 그나마 일반 문제를 다 맞히면 낙제는 면할 수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애리얼은 작성을 끝낸 시험지를 봉투에다 다시 넣어 조교에게 제출했다.
‘모르는 문제는 없었으니까 아마 다 맞겠지?’
시험장을 나서는 애리얼의 걸음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그녀는 좋은 성적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교양은 시험을 치지 않기에 그녀의 시험은 이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메타세쿼이아 아래를 걸었다.
더워지는 여름을 맞아 아카데미는 두 달간 휴식기를 가졌다. 이른바 여름 방학인 것이다. 종업식은 따로 없었고,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은 알아서 아카데미를 떠났다.
공략 대상들도 휴식기에는 아카데미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그녀의 공략도 휴식기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애리얼은 흙길을 천천히 걸으며 공략 상황을 정리했다.
‘스카이라가 세 개. 렉시우스가 두 개. 데본시아는 모르겠고, 레이신은 호감도 없음.’
어찌어찌 반타작은 완료한 수준이었다. 호감도가 몹시 불균형한 게 큰 흠이지만 아예 진전되지 못한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너무 불균형한가?”
특히나 레이신이 그렇다.
레이신은 최근 별관을 나와 활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위치 정보는 수시로 바뀌었다. 애리얼은 몇 번 그를 쫓아가 보았지만, 단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하계 방학 이후 재개되는 후반 학기에서 그가 기숙사로 와 지내길 빌거나, 아니면 마땅한 대책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애리얼은 자연스레 ‘호감도 피버 타임’이라는 아이템을 떠올렸다. 일정 시간 동안 특정 대상의 호감도를 올려 주는 기능을 지닌 것. 어떻게든 그걸 레이신에게 사용해야 했다.
“방학 동안 방도를 고민해 봐야겠어.”
혼잣말을 흘리며 애리얼은 길가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녀는 차가 달리는 소음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제1 기숙사 주변이었다. 굳게 닫혔던 기숙사 정문이 활짝 열리며 검은색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릿하게 달린 차가 그녀의 주변으로 와 멈췄다.
뒷문이 열리고 카논이 내렸다.
“아가씨, 이제 집에 가요.”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방학을 맞아 백작저에 온 애리얼은 늘어지게 게으름을 피웠다. 정오가 될 때까지 늦잠을 자고 온종일 침대에서만 뒹굴뒹굴하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극락 같은 생활이었다.
애리얼은 며칠간 공략 대상들에 관한 일을 잊고 편히 지냈다.
솔직히 아카데미에서는 피곤한 일이 너무 많았다. 계속 공략 대상들의 위치를 신경 써야 했고, 어려운 마력학 공부에 온종일 매진해야 했다. 그걸 몇 달이나 했더니 심신이 지쳐 부작용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다행히 낙제는 하지 않았다. 일반 문제를 틀리지 않은 덕분이었다. 공부한 것이 그래도 빛을 본 셈이다.
“이대로 일주일은 놀고먹기만 하면서 살고 싶다.”
애리얼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에 솔솔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으려는데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사용인들이 분주히 몰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애리얼은 자려다 말고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푸른 잔디 정원이 가꿔진 집 앞에 웬 차가 도착해 있었다. 하얗게 광택이 나는 클래식 로드스터였다.
애리얼은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너머로 고개를 뺐다. 매끈하게 잘 관리된 기다란 보닛이 태양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녀는 잘빠진 차체에 감탄하며 보다가 황금색 독수리가 새겨진 그릴을 보고 기겁했다.
백작저에 세워진 로드스터는 다름 아닌 황성의 차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