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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1화 (71/264)

71화

애리얼은 황급히 창문에서 물러났다. 놀란 나머지 입술이 벌어졌다.

“왜……? 왜 여길 왔지?”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업무차 백작을 만나러 온 황성의 손님이라기엔 차종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설마하니 황족이 백작저로 휴가를 보내러 왔을 리는 없고, 들른다는 언질도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로 백작저를 뒤집으며 돌연히 나타난 것일까. 상황을 추측하느라 잠이 싹 달아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는 웅성대는 바깥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호기심이 인 애리얼은 창문 밖을 슬쩍 곁눈질했다. 하얀 차체가 슬쩍 보였다. 문이 두 개뿐인 일반 로드스터와 달리 차 문이 네 개나 되었다. 내린 사람이 있는지 뒷좌석의 차 문이 열려 있었다.

“누가 온 거지?”

애리얼은 커튼 사이에 몸을 숨기고 창밖을 살폈다.

접근 알림이 없었으니 스카이라는 아니다.

‘설마…… 데본시아가 왔나?’

애리얼은 서랍에 넣어 둔 휴대폰을 재빨리 꺼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둘 다 대략적인 추적도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었다. 집 앞의 로드스터에서 내린 건 황족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럼 방금 내린 사람은 대체……?”

애리얼은 거듭된 의문에 혼잣말을 흘렸다. 때마침 그녀에게 대답이라도 해 주듯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똑.

“카논?”

“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응, 들어와.”

애리얼이 허락하자 곧장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카논의 손에는 하얀 시폰 원피스가 들려 있었다. 휴가지에서나 입을 법한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창문으로 흘러든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나부꼈다.

“그 옷은 웬 거야?”

“갈아입으실 옷이요. 갈 때 더우실까 봐 준비했어요. 겸사겸사 휴가 분위기도 내고요.”

“……가다니? 내가? 어딜?”

“……네?”

애리얼이 어리둥절해하자 카논도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했다.

“미리 다 이야기되신 거 아니셨어요? 황성에서 아가씨를 데리러 왔다기에, 저는 일찌감치 말이 오간 줄 알고…….”

“날 데리러 왔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애리얼의 반응에 횡설수설하던 카논의 입이 다물렸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에요. 다시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내가 직접 물어볼게. 당장 여행지로 떠날 건 아니니 옷만 새로 가져다줄래?”

“네, 아가씨.”

카논은 시폰 원피스를 도로 가져갔다.

애리얼은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플레어스커트 차림으로 아래층을 향했다.

정장처럼 옷을 갖춘 그녀의 모습에 백작은 아무 말 없이 1층 중앙 응접실을 가리켰다.

“황성에서 왔다더구나. 휴가지로 널 데려갈 예정이라던데, 네가 직접 말을 나눠 보는 게 좋겠구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렴.”

“알겠습니다.”

애리얼은 백작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허클리 백작 공녀님.”

납치범 같은 수법으로 들이닥친 불청객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검은색 정장을 잘 차려입은 적금발의 남자였다. 황족이 아님은 확실했다.

“안녕하세요.”

애리얼은 마주 인사를 건네며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딘지 익숙한 인상이었다.

시선을 느낀 남자가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인 미카엘 제라온입니다.”

황태자의 보좌관이라는 설명을 듣고서 애리얼은 그를 기억해 냈다. 브레이슬릿에 관해 물어보러 갔던 날, 황태자의 침실 앞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그녀가 침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사람이었다.

“백작저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그…… 보좌관님……. 아니,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님.”

“호칭은 간단히 제라온이라 하시면 됩니다.”

“제라온 님.”

“예, 공녀님. 저는 공녀님을 모셔 가고자 백작저에 오게 되었습니다. 사전 약속 없이 방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호칭을 한번 정리한 그가 사과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저와 동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 휴가에 공녀님을 꼭 모셔 오라 당부하셔서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제라온은 무척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조심스럽고 공손한 말투에 바닥을 보고 숙인 채 올라오지 않는 고개까지. 자신이 벌인 무례를 알고서 저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사과만 할 뿐 그 무례한 요구를 물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그도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황태자의 보좌관으로서 황태자가 시킨 일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리얼은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동행이라면, 어디로 동행해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제국의 동쪽, 황성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 얼음 거울이라 불리는 호수의 중간에 섬이 있습니다. 황실에서 휴가지로 쓰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그곳으로 동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하께서 무슨 이유로 저를 부르셨나요?”

“상세한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공녀님과 함께 휴가를 즐기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라온의 답변에 애리얼은 침묵하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차까지 제공해 주며 벌인 강제적인 황태자의 초대였다. 심지어 황태자의 보좌관이 직접 그녀의 앞에 와서 고개까지 숙이며 부탁했다. 그녀로선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곳에 지금 황태자 전하만 계시는가요? 아니면 황실의 분들께서 모두 모여 계시는가요?”

“황제 폐하께선 계시지 않습니다. 본디 황성에서 벗어나는 걸 즐기지 않는 분이시기에. 섬에는 현재 황태자 전하와 황자 저하께서만 계십니다.”

그나마 황제는 없는 자리라고, 보좌관은 전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장소에 제국의 정점이 부재함은 그녀에게 다행인 점이었다.

애리얼은 안도하는 한편으로 두 형제 사이에 끼이게 될 앞으로의 상황을 불안해했다. 그러나 고개를 저어 거부할 수는 없는 일. 그녀는 초연한 자세로 제 처지를 받아들였다.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데본시아를 좀 파악해 두자.’

지금까지 애리얼은 그를 피하기만 했었다.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줄곧 밀어내 왔다. 그로 인해 그에 대해선 무지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공략 상대. 껄끄러운 존재라도 알아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애리얼은 결정을 내리고서 제라온을 보았다.

“채비를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공녀님. 승낙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차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끝까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애리얼은 가볍게 묵례를 해 보이곤 먼저 응접실을 나갔다.

짐은 간단히 꾸려졌다. 황실이 초대를 한 것이니 어지간한 것들은 거기서 다 챙겨 줄 터. 애리얼의 여행용 가방에는 옷 몇 벌과 선물용 보석 몇 가지만 들어갔다. 특히나 보석은 백작이 직접 엄선해 넣은 것이었다. 강요나 다름없는 초대였으나 그래도 황태자의 초대이니 선물 정도는 기본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게 백작의 의견이었다.

처음 황성에 갔을 때처럼 가죽 가방 하나만 들고서 애리얼은 문을 나섰다.

차를 지키던 제라온이 그녀를 발견하고 재빨리 달려 나왔다. 그는 손수 애리얼의 가방을 받아 트렁크에 싣고 상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애리얼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곤 차에 올랐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이들이 백작저의 정문에 늘어섰다. 백작, 카논, 이 집안의 사용인들.

홀로 상석에 앉은 애리얼은 심란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제라온이 말한 섬은 황족의 전용 휴가지로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초대객이 아니라면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애리얼은 사용인 한 명 없이 홀로 떠나야만 했다.

모르는 장소에서 혼자가 되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어서, 애리얼은 자꾸만 그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를 태운 차는 빠르게 백작저를 빠져나갔다. 정문을 지나쳐 푸른 들판에 다다르자 하얀 로드스터는 달리는 속도를 더 높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저는 까마득하게 멀어져 버렸다.

애리얼은 무표정하게 창밖을 주시했다. 뒤로 슬쩍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제라온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천장을 열까요?”

“천장이요?”

“천장이 열리는 기종이거든요. 열면 바람도 느낄 수 있고, 제법 기분 전환이 될 겁니다.”

“좋아요. 열어 주세요.”

호기심이 인 애리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가게 된 거 축 처진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다.

제라온이 슬쩍 눈짓하자 운전사가 천장과 연결된 수동 개폐기를 돌렸다. 덜커덩, 소음이 울리고 차 천장이 스르르 뒤로 접혔다. 바람이 강하게 밀려들자 운전기사가 차의 속도를 늦췄다.

청명한 하늘 아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이 물씬 느껴지는 날씨였다.

흑발을 나부끼며, 애리얼은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았다. 제법 휴가를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

햇살이 강해지자 로드스터는 다시금 천장을 뒤집어썼다.

백작저에서 얼음 거울 호수까지는 다섯 시간가량 걸렸다. 긴 이동에 지친 애리얼은 차창에 고개를 기대어 졸다가 잠이 들었다.

호수 주변에 도착했을 때는 노을이 완연한 시각이었다.

목적지 부근에 도착해 차의 속도가 확연히 줄자 애리얼이 눈을 떴다. 창밖으로 은쟁반 같은 하얀 호수가 보였다. 언뜻 보면 바다로 착각할 만치 거대했다.

“여기부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20분 정도 걸립니다.”

제라온이 짧게 전달했다. 그는 조수석에서 내려 애리얼이 앉은 좌석의 문을 열었다.

애리얼은 휘청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너무 오래 앉아 있던 탓에 온몸이 저렸다. 그녀의 옆으로 어느새 트렁크의 짐을 꺼내 든 시녀가 다가왔다.

“이쪽입니다.”

시녀가 곧장 앞장섰다.

안내를 받아 걸은 애리얼은 얼마 안 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수에 황금 독수리를 매단 하얀 유람선이 보였다. 유람선이 다리를 내리자 시녀는 흰색 울타리를 두른 기다란 나무 길을 따라 걸었다. 선박을 타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었다.

애리얼과 제라온은 시녀의 뒤를 따라 나란히 배에 올랐다.

고요한 호수를 가르는 유람선의 뒤로 하얀 물결이 일었다. 애리얼은 갑판에 서서 지나가는 풍경을 보았다. 얼음 거울이라 불린다는 호수는 그 명칭에 걸맞게 흰빛을 발하며 하늘을 반사했다.

잔물결이 이는 호수의 저 멀리 울창한 숲을 두른 섬이 보였다.

정확하게 20분을 나아간 배가 백색 울타리를 두른 섬의 선착장에 멈추었다.

냉기를 품은 바람이 불었다. 애리얼은 흩날리는 흑발을 귀 뒤로 넘겼다. 여름답지 않게 선선한 장소였다. 제국의 다른 지역보다 5도 이상 온도가 낮은 것 같았다.

빽빽한 침엽수림, 스프루스가 가득한 숲이 방문객을 맞았다. 그 사이로 난 나무 길로 시녀가 걸어 들어갔다. 산새 소리가 들려오는 숲은 짙은 그늘이 깔려 어둡고 선선했다.

애리얼은 주변을 훑으며 나아갔다. 인기척이 없는 숲은 아직 해가 있는 시각인데도 조금 으스스했다.

십여 분 정도 걷자 나무를 베어 평평하게 다진 땅이 나타났다. 초목을 짤막하게 관리한 정원, 그 끝에 6층 높이의 거대한 별장이 세워져 있었다.

가방을 쥔 시녀가 별장으로 다가서자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한 걸음 물러났다.

시녀가 별장의 출입문을 열어젖히고는 애리얼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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