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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2화 (72/264)

72화

“제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

계속 뒤로 빠져 있던 제라온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시녀에게 당부했다.

“공녀님의 짐을 미리 객실에 정리해 주세요. 섬의 방침으로 사용인을 데려오지 못하셨습니다.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전달을 부탁합니다.”

“네, 제라온 보좌관님.”

시녀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물러났다. 따로 뒷문이 있는지 별장 밖으로 돌아서 갔다. 시녀의 뒷모습이 금세 멀리 가 버렸다.

애리얼은 가방 안에 선물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시녀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우선 인사부터 하고 나중에 주면 되겠지.’

그녀는 대수롭잖게 여기며 제라온을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호두나무로 만든 별장 내부는 아까 지나온 스프루스 숲처럼 어둡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적요한 복도에서 서늘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적막함에 걸음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주변을 살피는 애리얼의 눈빛에도 조심스러움이 어렸다.

좁은 복도 옆에 격자 형태의 창문이 주르르 붙어 있었다. 객실로 통하는 문도 전부 격자형이었으며 문지방이 높았다. 드문드문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엔 향초를 켜 놓았다. 타오르는 초에서 난초 향이 났다.

이제껏 보았던 백작저나 황성, 아카데미와는 다르게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구조였다.

제라온은 익숙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별장의 가장 위 층으로 향했다. 계단은 빛이 들지 않아 다른 곳보다 어두웠다. 애리얼은 발밑을 조심하며 그를 따라갔다.

이윽고 최상층에 들어선 그는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 정면으로 보이는 거대한 슬라이딩 도어 앞에 섰다.

“황태자 전하, 허클리 백작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문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제라온은 2분 정도 기다린 후에 슬라이딩 도어를 조심스레 밀어 열었다. 별장을 채우던 난초 향이 날아가고 선선한 공기가 방 안에서부터 밀려 나왔다.

활짝 열린 넓은 창문 너머로 나무 난간을 두른 발코니가 보였다. 그 너머로 침엽수림과 호수가 펼쳐진 풍경이 가히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앞, 침구가 깔린 평상에 앉은 이가 발코니 너머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흐트러진 금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경외감이 들 정도로 미형인 남자. 그는 홍매화가 수놓아진 검은색 가운을 입고서 침구에 기대앉은 채로 방문객을 맞았다. 그토록 방만한 자세임에도 우아함이 먼저 떠오르는 이였다.

“잘 데려왔네. 수고했어, 미카엘. 가 봐.”

“예.”

제라온은 가볍게 묵례한 후 물러났다.

슬라이딩 도어 앞에 홀로 남은 애리얼은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고개 숙이고 딱딱하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그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자 애리얼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묘한 색채를 띤 오드 아이가 살갑게 눈웃음을 지었다. 호수를 배경으로 앉은 그는 명화처럼 수려했다.

“이리 올래?”

데본시아가 열린 문 앞에 멀뚱히 선 애리얼을 불렀다. 이제는 익숙함마저 드는 부름을 듣고서 애리얼은 그의 지척으로 다가갔다.

그는 다가온 애리얼을 바라보지 않고 먼 호수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긴 손가락이 비단 시트를 사락사락 쓰다듬었다. 신경을 흩트리는 나른한 소리. 애리얼의 시선이 그 소리를 따라갈 때, 데본시아가 물었다.

“아직도 내가 많이 어려워?”

“……전하께선 지고한 분이셔서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친근하게 대해 주신 덕분에 처음처럼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말로만?”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애리얼이 어느 정도 유도한 대로 대답을 들려주었음에도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그가 있는 평상으로 슬그머니 올라가 앉았다. 호수를 향해 있던 그의 얼굴이 생긋 웃었다.

“더울 때 여기 오면 좋아. 온도도 낮고, 조용하고. 그래서 여름에 가끔 오는데, 네 생각이 났어.”

“…….”

“오늘처럼 하늘이 깨끗하고 습도가 낮으면 호수가 하얗게 변해서 절경이거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만히 듣던 애리얼이 다른 감상도 없이 감사하다고만 전하자 그는 프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기라도 한 거 같네. 혹시 미카엘이 그랬어? 눈치 보고 좋은 말만 해 주라고?”

“아뇨.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셨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럼 네 의지로 내 눈치를 보고, 거리를 두고, 그러는 거야? 서글프네.”

거기까지 말하고 데본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호수를 향해 있던 얼굴이 애리얼에게로 다가왔다. 두 달 전, 황성의 침실에서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마주한 그의 눈빛이 그날처럼 미묘한 감정을 담았다.

“나한테 투정 부려도 돼.”

“황태자 전하께…… 감히 그래도 되나요?”

“왜? 싫어?”

그의 목소리는 투정을 부려 보라고 유혹하듯 다정했다.

애리얼은 긴장해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데본시아는 매번 이랬다.

그는 굉장히 다정하게 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애리얼은 불안했고 되레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상대를 시험하고 떠보는 것만 같았다.

망설이던 그녀는 적당한 답을 골라 입을 열었다.

“별로 투정 부리고 싶은 것이 없어요.”

“그럼 묻고 싶은 건? 있어?”

“저를 여기에 왜 초대하셨는지…… 궁금해요.”

“풍경이 좋아서, 너한테 보여 주고 싶었어.”

“……네. 감사합…….”

“느닷없이 불러낸 것에 화내도 좋아.”

데본시아는 오늘 백작저와 애리얼에게 행했던 제 무례함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일부러 의도한 일이라고 넌지시 알려 주는 느낌도 들었다.

애리얼은 잠깐 멈칫하며 입술을 다물었다가 이윽고 홀린 듯이 말했다. 그가 이토록 자상할 때, 의견 피력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너무 갑작스럽게 불러내는 건 피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해요.”

“그게 화내는 거야?”

“아뇨. 화까지는 아니고, 그냥 부탁드리는 거예요.”

“부탁이란 말이지…….”

데본시아는 말꼬리를 늘이며 눕듯이 상체를 젖혔다. 뒤에 놓인 베개에다 자연스럽게 몸을 기대는 그를 따라 애리얼의 시선이 움직였다. 부쩍 낮아진 그의 자세 때문에 애리얼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나른한 눈빛을 한 데본시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부탁 하나 해도 돼?”

“어떤 부탁인데요?”

“이름으로 불러 줄래?”

“이름…… 전하의 존함을요?”

“응. 데본시아, 라고 불러 봐.”

그는 조르듯이 부탁했다. 그런 주제에 여유로웠다.

애리얼은 연신 입술을 달싹거리며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냈다. 스카이라가 매번 으르렁거리며 불러 대던 그 이름을,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데본시아.”

청초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데본시아는 그녀가 발음하는 제 이름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한 번 더 불러 줄래?”

“……데본시아.”

애리얼은 가만가만 그의 이름을 외었다. 그의 입꼬리가 만족한 듯 휘어져 올라갔다. 그가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애리얼을 보았다. 긴 속눈썹을 드리운 아래 기이한 색의 두 눈에 그녀가 담겼다. 멋들어진 호수의 풍경을 감흥 없이 보았던 눈이 애리얼을 보고선 묘하게 일렁거렸다.

“별명이나 애칭으로 불러도 좋아.”

두 번이나 이름으로 불린 그가 또 다른 호칭을 요구했다.

“별명이요?”

애리얼은 아예 그에게로 몸을 돌리고 앉아 제가 들은 게 맞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다르게 불려도 재밌을 거 같아서.”

데본시아가 짧게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표정에는 새로운 호칭에 관한 기대감이 드러났다.

“해 줄 거지?”

“어려울 건 없지만……. 별명은 제가 짓는 건가요?”

“응. 지어 줘.”

“그게…… 저기…… 어떻게…….”

“어려우면 흔히 통용하는 애칭을 붙여도 좋고.”

“그럼, 그…… 예, 예쁜아?”

그렇게 말하고서, 애리얼은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스스로 꺼낸 소리에 그보다 자신이 더 놀랐다. 왜 그런 별칭을 말했는지 모를 일이다. 저를 바라보는 그의 외관이 워낙에 아름다워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예쁜아, 라니……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애리얼은 무심코 꺼낸 말에 극심한 후회를 느끼고 자책했다. 그 누가 황태자보고 ‘예쁜아’ 같은 별명을 붙여 부른단 말인가. 그녀는 죄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데본시아를 살폈다.

별칭을 들은 데본시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런 애칭으로 부를 줄은 몰랐는데.”

퍽 흥미롭다는 말투였다. 그는 꽤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우선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는 왜 하는 거야?”

“별명이랍시고 전하를 너무 무례하게 부른 것은 아닌가 해서…….”

“그래? 난 네가 예쁘다고 해 줘서 좋았는데.”

데본시아는 젖혔던 상체를 세우며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애리얼은 그가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을 비치지 않자 안심하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괜찮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응. 애리얼, 한 번 더 불러 줘.”

“……예쁜아.”

애리얼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급조한 애칭을 불렀다. 그러자 미려한 얼굴의 남자가 애간장을 녹일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심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다가오자 애리얼은 굳어 버렸다.

데본시아는 뻣뻣하게 굳은 애리얼의 손을 틀어쥐고서 자신에게로 당겼다.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가져다 대었다.

“자, 너의 예쁜이야. 만져 봐.”

그의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속삭여 왔다.

애리얼은 말문이 막혔다. 황태자라는 계급을 지닌 그가, 그녀의 손안에다 제 옆얼굴을 내어 주며 애교를 피우고 있었다. 손바닥에 그의 부드러운 볼이 비벼졌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촉이었다.

가느스름해진 그의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마음에 들어?”

“네. 부드럽네요…….”

애리얼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데본시아는 그녀의 손안에다 제 뺨을 더욱 밀착했다.

“고마워. 내가 마음에 든다니, 기쁘네.”

그가 또 웃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위험하고 예쁜 미소였다.

그와 마주한 애리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당혹스러움을 견디다 못해 그녀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데본시아의 노골적인 유혹에 애리얼은 동요하고 말았다. 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았다. 그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있었다.

데본시아를 알아 가려 할수록 안갯속을 헤매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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