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조용한 숲속을 사슴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누볐다. 회갈색의 몸통이 스프루스 기둥 사이로 드러났다. 낮은 초목에 까만 코를 박고 풀을 뜯다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가지처럼 솟아난 뿔이 탐스러웠다. 헌팅 트로피로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수사슴이다.
엽총을 쥔 스카이라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사냥감을 응시했다. 조각상처럼 움직임이 없는 그는 호흡마저 멈추고 능숙하게 인기척을 지웠다. 숲엔 산새 소리만 가득했다. 경계심을 거둔 사슴이 어린 싹을 향해 기다란 주둥이를 아래로 숙였다. 그 순간, 총성이 터졌다.
타앙!
사슴이 쓰러졌다.
스카이라는 살기도 내비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감정이 메마른 무미건조한 얼굴은 커다란 사슴을 사냥하고서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걸어 나가 쓰러진 사슴을 수습했다. 사슴은 목과 앞다리를 잇는 어깨의 아래 부근에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당한 것이다.
피도 거의 나지 않은 깨끗한 사체가 수레에 실렸다.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 스카이라에게 다가왔다.
“사슴은 목을 잘라 트로피로 만들어 둘까요?”
“마음대로 해.”
스카이라는 사슴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엽총을 둘러멘 그는 호숫가로 향했다. 기사와 시종 몇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섬의 관리인도 그와 함께였다.
어느덧 선착장이 멀리 보이는 물가가 나오자 관리인이 입을 열었다.
“호수 너머에는 곰이 삽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곰?”
“예. 호수의 북쪽 지대에 회색곰이 삽니다. 연약한 사슴과 달리 포악하여 사냥하는 맛이 좋을 겁니다. 헌팅 트로피로도 손색이 없는…….”
“넌 내가 지금 사냥을 즐기는 걸로 보여?”
신나서 떠드는 관리인에게 스카이라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섬의 관리인은 순식간에 창백해져서 죄송합니다, 말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스카이라는 감정 없는 눈으로 관리인을 보다가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배를 준비해. 북쪽 지대로 갈 거다.”
“알겠습……. 북쪽 말입니까?”
시종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곰 사냥이 맛이 좋다고, 관리인이 저리 추천하니 흥미가 동했어.”
그는 일말의 흥미도 비치지 않는 냉담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시종을 비롯한 주변인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황자의 심기를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냥을 의무적으로 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그는 좀체 그만두지 않았다. 선착장으로 향하는 황자의 모습은 의욕은 없는 데 반해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참으로 희한했다.
***
회색곰은 위험도가 높은 맹수였다. 배에 오르는 인원에는 기사 몇 명이 더 추가되고 시종들이 배제되었다. 기사들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과자를 곰 미끼로 준비했다. 위험한 방식이지만 곰을 유혹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호수 너머 북쪽 지대에 도착하자 스카이라는 엽총 대신 검을 들었다. 곰은 엽총 한두 방에 제압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확실하게 큰 상처를 입혀 빠르게 숨통을 끊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총 대신 검을 쥐는 건 어불성설인 행위였으나, 그라면 달랐다. 뛰어난 마력 보유자인 그의 사냥 솜씨는 총보다 마력을 씌운 검을 썼을 때 더 빛이 났다.
물론 총알에 마력을 씌운다면 검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으나, 스카이라는 그걸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일회성 소모품인 총알보다 계속해서 활용할 수 있는 검을 더 선호했다. 이건 비단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마력 보유자에게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마력은 결국 한정적인 힘이기에 소모적인 물건에 덧씌우는 건 효율적이지 못했다.
복잡한 머리를 잠재우는 데는 사격보다 칼질이 더 좋기도 했고.
“오에서 십 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와라.”
스카이라가 제 뒤로 도열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예, 저하.”
기사들이 일제히 답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울창한 침엽수림의 안으로 진입했다.
곰의 기척을 살피며 차갑고 어두운 숲을 조용히 나아갔다. 새소리마저 우울하게 울리는 장소였다. 그 분위기의 탓인지 스카이라는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꼴사납기 짝이 없는 제 과거.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죄송합니다, 저하.”
“전하야말로 제 운명의 사람이에요! 그러니 저하와는 더 이상 약혼을 이어 갈 수 없어요!”
“죄송해요, 저하. 죄송해요……. 그렇지만 소녀는 이미 황태자 전하께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맹세했어요.”
그와 약혼을 한 주제에 그의 형에게 홀렸던 왕녀들. 황자의 약혼녀라는 명칭을 달고 황태자를 쫓으며 황태자비를 선망하던 인간들.
미풍이 부는 가운데 커튼 뒤에 숨어 황태자에게 입을 맞추며, 커튼 너머의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랑해요, 황태자 전하.”
가증스럽게 기만을 말하는 시끄러운 과거의 목소리들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속이 뒤집혔다. 스카이라는 이를 악물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실금이 그이듯 구겨졌다.
그녀들은 황성의 곳곳에서 황태자와 밀회를 즐긴 것도 모자라 그의 앞에서 황태자를 향한 사랑을 부르짖었다. 국가 간의 정략 약혼을 파탄 냈으며, 황자인 그를 아주 호구로 보고 무례를 저질렀다. 황태자의 유혹 몇 번에 넘어가 그렇게나 쉽게, 왕녀들은 지조와 품위를 버렸다.
그 꼴을 여러 번 겪고도 스카이라는 새로운 왕녀와의 약혼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보류한 처지였다. 황태자가 수를 쓴 탓이었다. 데본시아는 플라넬의 왕에게 황자와 왕녀의 약혼을 미끼로 던지고 그 대가로 남부 전쟁에 플라넬 왕국이 병력을 지원하도록 했다. 스카이라로선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거절을 말하기 어려워진 그는 하는 수 없이 플라넬의 왕녀를 만났다. 새로이 약혼 후보가 된 플라넬의 왕녀는 그를 보고서 몹시 수줍어했다. 사사건건 그의 눈치를 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숙였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전까지의 왕녀들이 그랬듯이, 그 왕녀도 첫 만남에서는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가지가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카이라는 역한 것을 억지로 참는 듯한 얼굴로 칼을 휘둘렀다. 길을 만드는 칼질이 거칠었다. 스프루스의 낮은 가지들이 무참하게 잘려 나갔다.
뒤따르는 기사들이 가지를 밟으며 미끼를 던졌다. 우지끈, 부러지고 꺾이는 소음과 함께 과자의 단내가 진동했다.
퇴로를 확보한 스카이라는 멀리서 풀잎이 바스락대는 소리를 듣고 멈췄다. 무심하던 눈이 사납게 예리해졌다. 측면에서 거대한 생명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뒤쪽의 기사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내며 몸을 비스듬하게 돌렸다.
늘어진 스프루스의 가지 아래로 거무칙칙한 회갈색 털의 네발짐승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700kg은 나갈 어마어마한 크기의 회색곰이었다.
과자의 냄새에 이끌렸던 곰은 제 영역을 침범한 인간 무리를 보고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스카이라는 침착하게 곰을 상대하기 위한 태세를 갖췄다.
“마공전의 첫 수업에서 황자 저하께 큰 도움을 받았어요. 제 차례였는데…… 황실 기사에게 기절당할 게 뻔한 걸 저하께서 막아 주셨지요. 그 배려에 감읍하여…… 저, 저는…… 그때부터 황자 저하를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때 그가 벌였던 난입은 왕녀를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왕녀는 그의 난입이 자신을 위한 일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곰이 거리를 좁혀 그에게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스카이라는 마력을 불어넣은 수렵 검을 세게 쥐었다. 회색의 주둥이가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곰이 포효했다.
“……사랑해요! 비록 정략혼이라도, 그저 짝사랑일 뿐이라도…… 저는 늘 같은 마음으로 저하를 볼 거예요. 그러니, 그저 저하의 옆에만 있게 해 주세요.”
허울 좋은 소리. 다른 왕녀들도 처음에는 천년이 지나도 계속될 것 같은 사랑을 말했다. 그러고는 몇 달 안 가 그 잘난 사랑을 황태자에게 속살거렸지.
그의 눈에 업화 같은 선연한 분노가 타올랐다.
살기를 감지한 곰이 지척으로 다가와 두 발로 섰다. 휘두르는 앞발에 조금만 스쳐도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력으로 방어술을 두른 그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고지대를 선점하고서 날아오는 앞발을 적당히 피하며 칼을 찌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곰의 씨근거림이 귓가에 울렸다.
“플라넬의 제안은 어떻게 생각해?”
황태자의 목소리가 곰의 울음과 겹쳐져 머리에 재생되었다. 역겨웠다.
몇 번이고 약혼녀를 빼앗아 그의 약혼을 파기시킨 장본인이 그에게 또다시 약혼을 종용했다.
칼 손잡이를 틀어쥔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스카이라는 이를 악물었다. 급소를 노릴 수 있는 적정 거리에서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앞발이 허공을 가르느라 곰의 몸체가 균형을 살짝 잃은 순간에 그는 팔을 들었다. 곰의 가슴을 조준해 찔렀다. 심장을 노린 것이었다. 마력을 두른 서슬 퍼런 검날이 두꺼운 가죽을 손쉽게 찢었다.
“왕녀는 너를 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 조금은 상냥하게 굴어 주는 게 어때?”
가증스러운 황태자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칼을 뽑았다. 날이 지나가 벌어진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의 얼굴로 핏방울이 투두둑 튀었다. 검은색 사냥복이 온통 피에 젖었다.
역겨움에 온몸의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곰의 피비린내가 지독했다.
죽음을 앞둔 곰이 몸부림을 쳤다. 퍽퍽 가격하는 앞발의 둔탁한 충격을 방어술로 막아 낸 그는 다시 칼을 조준했다.
양날의 직선 검이 곰의 목을 파고들었다. 일직선으로 꽂힌 검이 단박에 척추를 끊어 냈다. 곰의 목을 완전히 뚫었다. 곰의 몸이 뒤쪽으로 밀려나 나무에 부딪혔다. 나무에 날 끝이 박혔다. 곰의 움직임이 멎었다.
솟아오르던 그의 분노가 곰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다른 것으로 변질해 갔다. 밀려드는 공허함이 다른 이의 음성을 싣고 왔다.
“너에게 좋은 일이라면 하고, 아니라면 하지 말고. 네 이득이 되는 쪽으로 했으면 좋겠어.”
‘내가 약혼해서 싫다거나…… 그런 건 없어?’
그는 허공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그녀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딱히 그런 마음은…….”
‘……그래?’
과거의 목소리를 부정하듯 씁쓸한 되물음이 떠올랐다.
스카이라는 죽은 곰의 몸뚱이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곰은 검에 관통당해 곤충 박제처럼 나무에 박혀 있었다. 그는 손만 뻗어 검을 회수했다. 박혀 있던 날이 빠져나오자 곰의 사체가 주르르 무너졌다.
“굉장하십니다, 저하.”
뒤따라 접근한 기사단장이 사냥당한 회색곰을 보고서 고개를 숙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맹수를 홀로 사냥한 황자를 향한 경탄이었다.
스카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용한 검을 검집에 넣어 기사단장에게 건네고 피로 흥건해진 장갑을 벗었다. 그는 피 묻지 않은 깨끗한 맨손으로 얼굴의 핏자국을 닦아 냈다.
“이만 돌아간다. 사체는 알아서 수습해.”
“예, 저하.”
***
별장으로 돌아온 스카이라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뒤따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목욕 시중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가 있는 욕실은 늘 조용했다.
사냥으로 묻은 피를 직접 씻어 낸 그는 눈가에 묻은 물기만 적당히 닦아 내고 욕조 안에 앉았다.
더운물에 몸을 담근 스카이라는 나른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습기 머금은 피부가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그는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금발을 쓸어 넘겼다.
하얀 타일을 깔아 두고서 다양한 식물로 장식한 욕실은 식물원의 온실 같은 분위기였다. 그는 하얗게 꽃을 피운 스파티필룸을 멍하게 응시했다. 새하얀 잎사귀 하나만 매달고 피어난 꽃은 참 볼품없게 보였다. 장미처럼 겹겹이 잎을 두르고 화려함으로 시선을 잡아 끄는 꽃과 비교하자면 단순하다 못해 불쌍한 생김새였다. 장미를 두고 저걸 꺾어 가져갈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황태자를 두고 황자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린 시절 들었던 비난이자 비판이 그의 머리를 헤집으며 떠올랐다. 죽은 황후의 목소리로 몇 번이고 재생되며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