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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4화 (74/264)

74화

두통이 일었다. 스카이라는 눈을 꽉 감고 인상을 썼다.

최근 플라넬과의 혼담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지만, 고작 꽃 하나를 보고서 익숙한 열등감과 충격을 느끼다니……. 기가 막혔다.

냉담한 어머니가 그와 데본시아를 두고 보이던 학대에 가까운 편애와 차별은 지금까지도 그를 좀먹었다. 그때의 기억은 그가 가진 열등감의 근원이었다. 아직도 그 시절의 말 한마디에 그는 악몽을 꿨다.

“태자가 가장 좋은 것을 가지면 황자는 남는 것을 줍는 위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자?”

다시금 먼 과거를 상기하자 그는 숲에서 피비린내를 맡았을 때처럼 속이 뒤틀렸다.

어머니의 모욕은 너무나 비일비재해서, 어머니를 떠올리면 지독한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어머니를 놓지 못했다. 이따금 보여 준 애정으로 쌓인 정인지, 핏줄에 대한 집착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죽는 마지막 순간에 봤던 어머니의 진심 때문인지.

“저는…… 당신이 경쟁력이 없는 경쟁자라 좋았습니다. 그러면 눈에 띄는 일 없이, 죽지 않을 수 있잖아요. 당신이 죽지 않아서…… 저는 기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셨으면 합니다.”

그때 남긴 말이 아직도 뇌리에 선연하다. 그리하여 아직도 그분의 유품을 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그를 업신여기듯 황태자와 비교하여 나서지 말고 낮추라는 말이었는데, 그래도 그것이 그에게 남은 다정함이라 차마 놓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오랜 시간의 결핍으로 작은 다정함에도 사족을 못 쓰는 상태가 된 건지도 모른다. 그 다정함이 비록 먹다 버린 것처럼 허접한 것이어도 그저 좋아서…… 고작 그런 것만 가질 수 있어서…….

“저하께서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떠오른 목소리가 산들바람처럼 불어와 지저분하던 모욕의 언사를 날려 버렸다. 대가를 바라지 않던 순수한 호의.

“저는 저하께 초대받아 온 사람으로서, 저하께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게 황태자 전하라 할지라도요.”

“애리얼…….”

스카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외며 그녀가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끔찍한 과거가 서서히 흐려졌다. 좀 살 것 같았다.

***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선물을 가져오겠다며 가까스로 데본시아의 옆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우우우웅-

잘 들어 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호수 섬 별장 - 1층 욕실』

스카이라의 접근 알림이었다. 별장 조감도 중 욕실에 그의 초상화가 떠 있었다.

애리얼은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어 화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너무 개인적인 사정까지 다 뜨니까 보기가 좀…… 죄스러운데.’

결국 애리얼은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 있는진 확인했으니 더 보지 않아도 되겠지 싶었다. 어차피 스카이라는 욕실에 있으니 당장 마주칠 일은 없었다.

애리얼은 멈췄던 발을 움직여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그리하여 그녀가 1층에 도달했을 때, 시녀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바쁘게 다가왔다.

“공녀님, 객실로 모시겠습니다.”

“알았어.”

애리얼이 대답하자 시녀는 자연스레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벽면의 기다란 창문으로 달이 떠오른 게 보였다. 밤으로 접어드는 하늘이 연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애리얼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빨리 선물을 챙겨 가지 않으면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진 시각에 데본시아와 만나게 될 터였다.

시녀는 격자로 된 슬라이딩 도어를 밀고 복도의 끝 방으로 애리얼을 안내했다. 그녀에게 배정된 방이었다. 귀빈이라며 모셔 온 이에게 내주는 객실치고는 꽤 외진 장소였다.

애리얼은 시녀를 따라 방문 앞에 섰다. 흑단으로 만든 문에는 매화가 양각되어 있었다. 데본시아가 입고 있던 실크 가운에 수놓아진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시녀는 객실 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찰칵, 소리를 내며 잠금이 풀리자 금빛 문고리를 돌려 밀었다. 아주 살짝만.

열린 문짝은 문틀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멈추었다. 크게 벌어졌어야 할 문 틈새는 열렸는지도 모를 만큼 가늘었다. 그저 문이 잠겨 있지 않음을 증명하듯 열다 만 모양새였다. 보통은 문을 활짝 열어 내부를 확인시켜 주는 게 정석인데, 무언가 감춘 것이라도 있는 듯이.

애리얼이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시녀를 보았다.

“침대 옆 오른쪽 벽면에 호출 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눌러 주세요.”

바닥으로 눈을 내리깐 시녀가 쫓기듯이 빠른 목소리로 전달 사항을 말했다. 그러고는 묵례하곤 도망치듯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게 된 애리얼은 시녀의 행동에 모종의 위화감을 느꼈다. 미세하게 열린 문의 틈새가 그녀의 위화감에 박차를 가했다. 애리얼은 찝찝한 감상을 지닌 채 객실 문을 활짝 열었다.

드러난 객실의 내부는 애리얼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온갖 것들이 반짝거리며 그녀를 반겼다. 각양각색으로 미려하게 세공된 은왕관들, 루비 혹은 에메랄드를 박아 만든 서클릿, 이어링, 네크리스, 브레이슬릿……. 온통 은색, 백색으로 빛나는 액세서리가 장식장도 없이 바닥과 가구 위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값비싼 것들을 가득 모아 뒀지만, 엄밀히 말하면 창고나 다름없는 방이었다.

이 휘황찬란한 방을 앞에 두고서 애리얼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시녀가 객실이라 내어 줬으나 객실이라 부를 수 없는 장소였다. 침대가 없는 건 물론, 방 안 가득한 귀금속 때문에 누워 잘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 가운데, 애리얼은 제 짐 가방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것을 발견했다. 저 가죽 가방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이곳을 객실이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창문도 없는 방 안이 갑갑했다.

애리얼은 고개를 돌려 복도의 창문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연보라색이던 하늘은 이제 짙은 군청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어쨌건 객실 문제는 나중에 따지고.’

애리얼은 여기저기 놓인 귀금속들을 조심히 피해 테이블로 다가갔다. 일단은 데본시아에게 줄 선물만 챙겨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녀의 손이 금색 잠금 버튼을 누르고 가방을 열었다. 챙겨 온 옷가지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선물 상자는 없었다.

애리얼은 당황한 눈으로 옷을 헤집었다. 선물로 챙겨 온 보석 상자는 그녀의 손바닥보다 큰 물건이었다.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놔두고 왔나? 중간에 잃어버렸나?’

애리얼은 혼란스러워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흰색 선물 상자 두 개였다. 백작이 따로 챙겨 준 물품이었고, 백작저를 나올 때만 해도 가방 안에 있는 걸 확실하게 확인했었다. 그 후 가방은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중간에 두어 번 타인의 손을 거쳐 옮겨진 게 다였다. 문제가 생겼다면 그때일 것이다.

‘그때…… 누가 훔쳐 갔다?’

하지만 훔쳐 갔다고 하기엔 이 방 안에 널린 것이 보물, 보석이었다. 더 값비싼 것들이 널려있는데 애리얼의 물건에 손댈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황족을 모시고 일하는 이들이 고작 백작저에서 준비한 보석을 탐낼 리 없었다. 이왕 훔칠 거라면 차라리 황실의 것을 훔칠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상황이 맞물리지 않았다.

조금씩 어색하던 시녀의 행동, 기괴한 객실, 사라진 선물.

작정하고 일부러 괴롭히려고 벌인 상황 같았다. 그러니 애리얼이 이 별장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이를 떠올린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결국 위층으로 올라가 그에게 묻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애리얼은 가방을 닫아 그대로 올려 둔 채 방 밖으로 나왔다. 좁은 복도는 벌써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아까 시녀와 지나왔던 슬라이딩 도어의 앞까지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갔다.

데본시아가 이 일에 대한 해답을 줄 거란 생각은 그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결론이 나긴 할 거다. 그가 주동했든 아니든, 그는 이 별장의 주인이니 어떻게든 조치를 할 것이다.

애리얼은 거침없이 문을 밀고서 계단으로 통하는 복도에 들어섰다. 줄곧 인기척 없이 조용한 이 장소가 음산하게 다가와 걸음을 재촉했다.

니스 칠 한 마루를 반쯤 지났을 즈음, 서늘한 복도의 한쪽에서 더운 공기가 훅 끼쳐 들었다. 계단으로 향하던 그녀의 걸음이 멈칫거렸다. 훈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환한 조명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앞에 빛을 등진 인물이 놀란 듯 굳어 있었다.

“너, 왜……?”

어리둥절해하는 음성이었다.

애리얼은 음성의 주인을 보았다.

물에 젖은 금발이 노란색 조명을 받아 윤기를 냈다. 스카이라였다. 고작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그가 있었다. 막 입욕을 끝내고 온 듯 가운을 걸친 그의 몸에서 달궈진 습기가 느껴졌다. 느슨하다 못해 내밀한 차림이었다. 데본시아가 아닌 스카이라에게서는 처음 보는 가볍고 사적인 모습.

애리얼의 시선을 느낀 그가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입욕 후의 흐트러진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창피함이 몰려와 귀까지 화끈거렸다.

“보지 마.”

치부를 들킨 듯 예민해진 스카이라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저도 모르게 그를 줄곧 응시하던 애리얼이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가 박힌 틈을 타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녀에게 왜 이곳에 있냐며 따져 물을 정신은 없었다. 당장은 이 헐거운 가운 차림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그가 도망치듯 애리얼에게서 멀어졌다.

애리얼은 그가 멀리 벗어난 후에 고개를 들었다. 놀란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마주친 스카이라는 그녀 못지않게 놀란 데다 화까지 나 보였다. 애리얼의 방문을 전혀 모르고 있던 듯한 반응이었다.

‘하긴 데본시아가 스카이라에게 내 방문을 알렸을 것 같진 않아.’

그런 와중에 데본시아를 찾아가려니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것도 해가 진 시각이었다. 스카이라의 오해를 부를 게 뻔했지만, 황태자를 바람맞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선물도 사라진 상태라 빈손으로 가야 했다. 애리얼은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얼마 안 가 주춤거리며 정지했다.

‘그래도 해명은 하고 가야지.’

이대로 데본시아에게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필요 이상의 오해를 만드는 건 위험했다.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호수 섬 별장 - 1층 객실』

욕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객실에 그의 초상화가 보였다. 하지만 애리얼이 그의 객실 앞으로 찾아갈 순 없었다. 그가 알려 준 적도 없는데 그의 객실 앞에서 기다리는 건 스토킹 의심을 받기 좋았다. 그와 마주쳐도 어색하지 않을 자리에서 기다려야 자연스럽다.

애리얼은 반쯤 걸어갔던 복도를 되돌아와 스카이라와 마주쳤던 자리에 멈췄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조용한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울렸다. 가운에서 셔츠로 멀끔하게 갈아입은 스카이라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차분한 표정을 해선 금세 애리얼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애리얼은 쭈뼛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빠르고 어색한 재회였다.

“아까는…….”

“황태자가 불러서 왔어?”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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