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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5화 (75/264)

75화

다짜고짜 던져진 스카이라의 물음에 애리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넌 좋다고 왔고?”

“좋다고 온 건 아니야. 백작저 앞에다 차를 끌고 와서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니 타라고 말하는데,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어.”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 넌 앞으로도 황태자가 부르면 다 올 거야?”

스카이라는 어째 그녀가 잘못했다는 듯 따지고 드는 모양새였다. 계급과 권력의 차이를 고려하면 그녀의 처지에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백작가 공녀는 황족의 부름에 거부할 수 없는걸.”

“나도 알아.”

스카이라는 왜 아는 걸 상기시키냐는 표정이었다. 제가 따지고 든 주제에 참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실제로도 그는 애리얼의 처지를 정말 몰라서 저런 말을 한 게 아니었을 터다.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저 삐딱한 반응의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의 하트는 세 개로 애리얼에게 약혼을 제시할 정도로 호감을 보이는 상태였다. 그런 상대가 모르는 새에 제 형의 부름을 받아 휴양지에 왔다는 사실이, 그는 못내 거슬린 것이다. 그러니 그가 애리얼에게 던진 추궁하고 나무라는 듯한 저 말들은 일종의 투정과 비슷했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그의 기분이 풀릴 말을 넌지시 던졌다.

“황태자 전하의 명이기에 오긴 했지만, 황태자 전하가 부르신 게 아니라도 이랬을 거야.”

“……내가 불러도?”

“당연하죠, 황자 저하.”

그 역시 황족임을 일깨우듯 애리얼은 장난스럽게 존댓말을 취했다. 스카이라는 마주했던 얼굴을 비스듬히 돌리며 뺨을 붉혔다.

“그럼 됐어.”

그걸로 만족한 모양인지 스카이라의 목소리에 서린 삐딱함이 꽤 사라졌다.

‘이제 해명은 된 건가?’

상황이 일단락된 듯 보이자 애리얼은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데본시아에게 물을 것이 많았다. 슬그머니 몸을 물리며 스카이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만남을 짧게 끝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근슬쩍 그녀가 물러난 만큼 다가서며 대화를 이었다.

“……오늘 온 거야?”

“응. 노을 질 때쯤 도착했어. 온 지 얼마 안 됐어.”

“시간이 늦어서 자고 가야겠네.”

“아…… 응.”

그걸로 대화가 어중간하게 끊겼다.

그리고 다시금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대홧거리를 말하려 할 때.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셔서, 잠시 갔다 올게. 미안.”

애리얼은 짧게 제 상황을 설명하곤 몸을 돌렸다. 그대로 종종걸음을 해서 빠르게 복도를 통과했다.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채 계단을 향해 일직선이었다.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스카이라에게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뒤통수에 와 박히는 그의 시선이 곱지 않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뒤돌지 않았다. 혹여 그가 상심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애리얼은 그에게 이 이상은 해 줄 게 없었다. 그는 적정 호감도를 다 채운 공략 대상이었다. 호감도가 떨어져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오르는 건 더 안 된다. 스카이라에게는 오해만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다.

바쁜 걸음으로 계단에 다다른 애리얼은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어둡고 좁은 계단이 공포를 유발했다. 애리얼은 아카데미 별관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 손마디가 저렸다. 미약한 촛불을 따라가느라 계단을 오르는 속도가 더뎌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작은 촛불로 길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위로 갈수록 촛불조차 없어 새카만 암흑만이 남았다. 무슨 연유로 이렇게 깜깜하게 유지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나아가는 것조차 힘겨운 어둠이었다. 애리얼은 불이 필요해졌다.

그녀가 촛불을 찾아 3층에 들어섰을 때, 어두컴컴하던 별장에 전기 조명이 일시에 점등되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애리얼은 눈부심을 느끼고 눈을 비볐다. 목조 고택이 온통 오렌지색 불빛으로 밝혀져 있었다. 어두워 알지 못했던 가구의 섬세한 양각과 연노랑색 벽지 위에 수채화로 그린 수국 같은 게 선명하게 보였다.

“이쪽이야, 애리얼.”

연신 주변을 둘러보던 애리얼을 누군가가 불렀다. 그녀의 눈이 목소리가 울리는 쪽을 향했다.

복도가 꺾어지는 쪽에서 능청스럽게 팔만 내민 데본시아가 애리얼에게 손짓했다. 질 좋은 비단 소매가 파도처럼 부드럽게 물결쳤다. 애리얼은 그 손짓을 따라갔다.

꺾어지는 복도를 돌아 들어가자 데본시아가 벽에 기대선 채 그녀를 반겼다.

“기다렸어.”

살가운 목소리로 맞아주며 그가 웃었다.

그는 매화 가운 위에 기다란 로브를 걸쳐 입고 있었다. 흑 비단으로 옷을 걸친 그는 요요한 악귀 같았다. 외모로 사람을 미혹하는 동양 설화의 악한 존재들 말이다.

불경한 상상을 떠올린 애리얼은 그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전하, 왜 이곳에 내려와 계세요?”

“저녁 먹으려고. 너도 같이 먹자.”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앞장섰다. 애리얼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벽부등이 켜진 협소한 복도. 그 끝에는 별장에서 익히 보던 격자형의 슬라이딩 도어가 있었다. 데본시아가 다가서자 문이 절로 밀려 열렸다. 그 안쪽은 벽이 없는 발코니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음처럼 서늘하면서도 푸르른 향기가 느껴졌다.

복잡하고도 희한한 구조의 별장에 놀라며 애리얼은 문을 넘었다.

벽등으로 불이 밝혀진 발코니는 수국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초록 잎사귀와 연보라색 꽃으로 꾸민 작은 정원 같은 모습이었다.

데본시아는 발코니의 중간에 놓인 고풍스러운 태피스트리의 마호가니 세티(settee)에 가 앉았다. 세티와 세트인 테이블에는 곱게 접힌 냅킨과 커틀러리가 놓여 있었다.

“앉아.”

먼저 자리한 그가 웃으며 건너편 자리를 눈짓했다. 이윽고 애리얼이 착석하자 그는 손짓을 보냈다. 문 옆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곧장 요리를 내왔다.

거위 간과 토마토를 곁들인 신선한 전채 요리가 백도자기 접시에 담겨 나왔다.

애리얼은 순식간에 테이블에 오른 값비싼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배고프지 않아?”

데본시아가 물었다. 가만히 요리를 보고만 있는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 애리얼은 요리에서 눈을 떼고서 그를 보았다.

“전하께서 먼저 드셔야 하는 것이…….”

“아, 그래야 하나?”

그는 피식 웃으며 포크를 들더니 토마토를 작게 조각내 입 안에 넣었다. 고작 그것뿐인 동작인데도 우아했다. 토마토를 씹어 삼킨 그가 그린 듯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자, 이제 편하게 먹어.”

“감사합니다.”

긴 시간을 굶은 애리얼은 기껍게 커틀러리를 쥐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오후 내내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요리를 보기 전엔 무디던 허기가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은포크가 거위 간을 쪼개 펐다. 부드럽게 씹히는 맛은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그 탓에 데본시아에게 하려던 질문은 잠시 잊고 말았다.

그렇게 첫 번째 접시를 비우고 허브와 연어로 된 두 번째 접시마저 비웠을 때, 애리얼은 잊었던 것을 떠올렸다. 보석으로 가득한 기괴한 객실과 사라진 선물, 그를 향한 질문들을.

두 번째 빈 접시가 치워지고 세 번째 접시가 차려졌다. 새우 살과 관자로 만든 먹음직한 요리를 앞두고서 애리얼은 슬쩍 데본시아의 눈치를 봤다.

그는 아까부터 요리에는 손대지 않고 유리잔에 담긴 레몬수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애리얼과 눈이 마주치면 생긋 웃었다. 지금처럼.

“벌써 배불러?”

“아뇨…….”

“그런데 왜 안 먹고 날 볼까?”

그가 장난스레 물었다.

“전하께선 안 드세요?”

“나? 나는 뭐…….”

작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린 그는 아예 유리잔까지 놓고 등받이로 몸을 젖혔다.

“그보다 애리얼,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줄 거라든가.”

그가 다 안다는 듯 넌지시 운을 띄웠다. 그에 애리얼은 고개를 숙이고 제 사정을 전했다.

“선물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선물을 주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선물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사실은…… 가방에서 선물이 사라진 상태였어요. 그래서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분명 백작저를 나올 때까지만 해도 가방에 들어 있었는데, 중간에 유실된 것 같아요.”

“그렇구나. 별장이나 섬 내에 떨어진 것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명령해 둘게.”

“어떻게 생긴 건진 묻지 않으세요?”

그렇게 묻자 데본시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생긴 건데?”

“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흰 상자예요. 파란색 리본이 매여 있어요. 두 개를 가져왔고, 두 개가 다 분실되었어요.”

“알았어. 사용인들에게 생김새를 일러둘게.”

“감사합니다.”

“응. 그리고 또?”

데본시아는 재차 질문을 유도했다. 정말로 그녀의 용건을 다 아는 건지.

애리얼은 살짝 당황했다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객실이 평범하지 않았어요. 복도 끝 방, 매화 문양이 새겨진 문이 있는 곳이었는데 가구며 바닥에 보석과 귀금속이 가득했습니다. 제 객실 배정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시녀의 행동 같은 심증적인 부분은 빼고 확실한 것만 추려 내 설명했다.

“그렇구나.”

가만히 듣고 있던 데본시아는 그렇게 단순히 평했다. 뭔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평온하게 고저 없이, 아는 것을 재차 들었다는 듯.

“일단 네 주변에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는 건 알겠어. 미카엘을 보내서 어디서 어떻게 꼬인 건지 파악시켜 놓을게.”

“감사합…….”

“그러니까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내 옆에 있는 게 좋겠다.”

난데없는 결론에 애리얼은 데본시아를 뚫어지게 보았다. 시치미를 떼지도 않는 여유 만만한 얼굴을 향해 그녀가 물었다.

“왜…… 무슨 큰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있을 수도 있으니까. 네 주변에서 그 일들이 다 벌어진 거니, 네 신변을 보호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별로 큰일은…….”

“왜? 큰일이 아니야?”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애리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나에게 줄 거였다지만 네 사유 재산이 유실된 거잖아. 단순 유실이 아닌 도난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상황인데 네 객실에도 문제가 생겼어. 너에 관한 정보가 외부로든 어디로든 유출되었다는 거겠지.”

“…….”

“만약 선물이 혹시라도 도난된 거라면, 그 손버릇 나쁜 범인이 재차 널 노려서 또 다른 범행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저는 더 빼앗길 귀중품이 없는걸요.”

“단지 귀중품을 노리고 한 행동이 아닐지도 모르는걸? 함부로 확신하는 건 위험해. 어디까지나 선물이 도난당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애리얼이 전한 말을 따라 내린 그의 판단에는 모순점이 없었다. 예상 못 한 상황에 범죄일 수도 있는 정황이 살짝 있으니, 그 위험에 노출된 애리얼을 곁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었다.

다만 객실 문제 같은 걸 그가 모를 수 있는지, 애초에 그런 문제가 벌어질 수 있는 일인지 의아했다.

그 밖에도 데본시아가 의심스러운 정황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애리얼이 설명하는 것들이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 그녀의 의문이 몇 개인지 안다는 듯 질문을 종용하던 말투. 심지어 그는 선물의 생김새도 듣지 않고 사용인들에게 찾아오게 시키려고 했다.

의심을 살 만한 언행을 그녀에게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제 곁에 있도록 강제하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다.

그래서 애리얼은 그가 더 꺼림칙했다. 왜 철저히 연기해서 그녀의 신뢰를 얻으려고는 하지 않았는지…….

애리얼은 서늘한 눈빛을 하고도 미소를 지은 그의 얼굴을 보고서 번뜩 이해했다. 그는 그녀가 의아하게 여겨 말한 일들의 주모자가 자신이라고 은연중에 계속 시인하고 있었다. 내가 한 짓이고, 그걸 빌미 삼아 너를 내 곁에 붙잡아 두겠다고. 어차피 섬이란 장소에 갇힌 그녀에겐 도망갈 구석이 없으니까.

위협과 경고, 그리고 배려를 동시에 보여 주는 거다. 나는 너를 해칠 수도 지킬 수도 있다고.

그 섬뜩한 의도에 애리얼은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챈 데본시아가 자상하게 웃었다.

“내 옆에 있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그렇지?”

모르는 체하면 편할 거고, 아는 체를 하면 피곤할 것임을, 그가 경고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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