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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6화 (76/264)

76화

“……네.”

애리얼은 그의 제안이자 명령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섬이다. 도망칠 길이 요원하다는 의미였다. 성마르게 굴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불안하게 안 할게. 금방 수습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전하.”

애리얼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데본시아에 대해 알아보고자 이곳에 온 차였다. 설령 위험이 있다 해도 목적을 이루려면 그의 곁에 머무르는 게 좋았다. 겸사겸사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가 제게 벌인 꺼림칙한 행동 따위는 쉽게 모른 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커틀러리를 쥐었다.

새우 살과 관자 요리에 포크를 대며 대화로 멈추었던 식사가 재개되었다.

데본시아는 그녀가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며 제 몫의 요리를 밀어 주기도 했다. 애리얼은 그냥 고개를 젓고 제 몫의 접시만 비웠다.

그렇게 로즈메리를 얹어 구운 티본스테이크가 식사의 대미를 장식할 때쯤이었다. 발코니로 통하는 별장의 슬라이딩 도어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본디 미세한 소음도 없이 여닫히던 문이었는데, 드르륵, 부서지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거칠게 열렸다.

애리얼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금빛 눈썹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린 스카이라가 발코니로 들어왔다. 시녀들이 만류하려고 다가섰으나 그의 서릿발 같은 눈길 한 번에 쉽게 제압되었다.

모로 고개를 기울인 데본시아는 익숙하며 예상한 것을 보듯 평온했다.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와.”

“필요 없어.”

시녀에게 명령한 것은 데본시아였고, 거부한 것은 스카이라였다.

데본시아는 뭔가를 직감한 사람처럼 시녀에게 손짓을 보냈다. 이윽고 시녀가 작은 유리컵에 담긴 티라미수 두 개를 가져왔다. 백작저에서 애리얼이 곧잘 먹던 디저트였다. 코코아 파우더를 뒤집어쓴 익숙한 디저트에 애리얼의 시선이 가닿는 걸 데본시아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애리얼, 먹는 중에 미안해.”

“아뇨……. 괜찮습니다.”

애리얼은 눈치를 보다가 나이프를 손에서 놓았다. 어차피 배가 부른 참이라 미련은 없었다.

“잠시만 이쪽으로.”

무슨 영문인지 데본시아가 테이블의 건너편에서 손짓을 했다. 애리얼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에게 디저트용 금색 스푼과 함께 티라미수를 쥐여 주었다.

“잠시만 내려가 있을래?”

자리를 비워 달라는 요청이었다. 스카이라와 긴히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발코니를 나갔다. 잠깐 스카이라와 시선이 스쳤으나 그의 눈빛에선 못마땅함 외의 다른 것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애리얼을 내보낸 발코니의 슬라이딩 도어가 미끄러지듯 닫혔다.

사람이 한 명 없어졌을 뿐인데 발코니의 분위기는 절벽으로 추락하듯 냉담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데본시아였다.

“뭐부터 따질래.”

“따져?”

스카이라의 왼쪽 눈썹이 삐죽 치솟았다.

데본시아가 삐딱한 자세로 턱을 괴고서 물었다. 그의 두 눈은 애리얼의 빈자리를 향해 있었다.

“화났을 거 같아서. 내가 애리얼을 부른 일이라든지, 애리얼과 단둘이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진 일이라든지, 애리얼의 숙소에 장난을 쳐 놓은 일, 선물을 빼돌린 일 같은 이유로.”

그는 넌지시 제가 벌인 일을 고백하며 스카이라의 화를 돋웠다. 별 의미 없는 언행이지만 뭐랄까, 그에게 있어서는 오랜 버릇 같은 거였다. 매번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반응해 주는 상대가 있기에 끊을 수 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스카이라는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살벌한 표정을 하고서 데본시아에게로 척척 걸어갔다. 데본시아는 늘 그렇듯 그가 흥분해 따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보는 눈도 없겠다, 멱살잡이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카이라는 테이블에 있던 데본시아 몫의 티라미수를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스푼을 끼워 들고 유리컵을 집은 긴 손가락을 보며 데본시아가 한마디를 던졌다.

“배고팠어?”

스카이라는 그를 무시한 채 티라미수만 가져갔다. 데본시아는 별다른 제지 없이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 한마디 더 물었다.

“할 말 없어?”

“너하고는 할 말 없어.”

스카이라는 완고하게 등을 돌리고 발코니를 나갔다.

***

애리얼은 티라미수를 들고 1층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보물로 가득한 제 객실이라는 곳에 가기도 뭐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들어갔다.

노란색 벽지에 이름 모를 꽃이 그려진 방이었다. 애리얼은 진녹색 시트의 카우치에 앉아 티라미수를 떴다. 한 스푼 입에 넣으니 진한 커피 향이 후각을 덮쳤다. 커피에 흠뻑 적셔진 스펀지케이크와 부드러운 마스카르포네치즈 맛이 났다.

신경 쓸 이 없이 홀로 맛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식사의 마무리였다. 휴대폰이 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우우웅-

접근 알림이다. 휴대폰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애리얼은 일부러 숨죽인 채 있었다. 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고, 공략에 관한 생각은 미뤄 두고 싶었다. 피곤했다. 그래서 그녀는 숨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스카이라가 열린 문을 귀신같이 확인하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애리얼은 그와 눈을 맞추는 일 없이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곧장 걸어왔다.

카우치가 풀썩 눌렸다. 스카이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애리얼의 옆에 앉았다.

“거의 세 달 만에 만나는 거였어.”

“……응.”

“나는 아카데미 후학기에나 볼 수 있을 줄 알고……. 그래서 아까는…….”

“별로 좋은 재회는 아니었지.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런 뜻은 아니었어.”

“응.”

그녀가 짧은 답을 이어 가니 스카이라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후학기에는 잘 못 볼지도 몰라.”

“많이 바빠져?”

“많이는 아니고, 적당히.”

“그렇구나……. 못 본다니 좀 아쉽네.”

“진심이야?”

그가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애리얼은 무심코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뭐가?”

“나 못 봐서 아쉽다는 거, 진심이냐고.”

“거짓말은 아닌데…….”

애리얼은 기대감으로 형형한 그의 두 눈을 보며 순순히 인정했다. 실제로 진심이었다. 우여곡절은 많았으나 표면적으로는 친구처럼 지냈다. 미우나 고우나 정이 쌓이긴 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위험한 의기(意企)가 느껴졌다. 애리얼은 그에게 말을 잘못한 것 같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잘못 알아들은 쪽일 거다. 그녀가 건넨 말은 얼굴을 보고 지내는 숱한 관계들 사이에서 그저 예의로 지나갈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스카이라는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지 않았다.

“저기, 내 말은…….”

“네 말, 뭐? 나 못 봐서 아쉽다는 거?”

“그래, 그거.”

“강조 안 해도 돼. 나도 너 자주 못 보는 거…… 아쉬워.”

그런 말을 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애리얼은 어리둥절해졌다.

“서로 아쉬우니까 이제 됐지?”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아쉽다는 건…….”

“나도 알아. 그만 설명해. 후학기 일정은 조율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 나한테도 네가 주, 중요하니까.”

스카이라는 억지로 쥐어 짜낸 듯한 소리를 하곤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고집스럽게 아무도 없는 정면을 바라본 그의 옆얼굴이 터질 듯이 붉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애리얼은 말할 의지가 사라져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더 해명하려 했다간 그의 입에서 고백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방 안의 공기만 묘해졌다.

휴가지에서의 밤, 대화가 끊긴 미묘한 순간. 그다지 크지 않은 방 안에 오로지 둘뿐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되지 않는 게 어려웠다.

더 할 말도 없고, 어색했다.

새로운 대화를 짜내는 대신, 애리얼은 반쯤 비운 티라미수를 마저 입 안으로 퍼 넣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빈 컵만 남았다.

스카이라가 애리얼의 왼손을 툭 치며 새 티라미수를 내밀었다. 매끈한 손가락에 들린 스푼과 유리컵. 코코아 파우더를 뿌린 크림의 윗면이 보였다.

오랜 침묵을 깨며 애리얼이 물었다.

“웬 거야?”

“그냥 남는 거.”

그가 무심히 말했다. 저러고 별거 아닌 척해도 신경 써서 가져왔을 게 뻔하다고, 애리얼은 생각했다.

“네 거 아니야?”

“아니야.”

“네가 먹어. 난 하나 먹었어.”

“됐어.”

“맛있는데…….”

“그러게, 잘 먹더라.”

스카이라가 피식 웃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이나 여타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순수한 미소였다. 그 예쁘게 휘어진 표정을 애리얼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그가 금세 수줍어하며 미소를 지웠다. 그의 뺨이 온통 붉었다.

애리얼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고는 애꿎은 빈 유리컵만 꼭 틀어쥐었다.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그의 미소가 아쉬웠다. 저렇게 순수하게 웃는 얼굴 자체를 그녀가 자주 못 본 탓이 컸다.

“웃는 정도는 해 줘서 고마워.”

애리얼은 과거 그의 말을 인용해서 장난스레 굴었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쓸데없는 걸 떠올리고 있어.”

“그래도 약속 같은 거니까.”

“그럼 네가 나한테 보답한다 어쩐다 했던 것도 기억해?”

“……내가 그랬어?”

“…….”

“아, 맞아. 네가 나 과외 해 줬었다. 그때 말했지?”

“네가 해 준다고 해 놓고 잊어버리지 좀 마.”

“미안해.”

“기억했으니 됐어.”

“이왕 말 나온 김에 보답받고 싶은 거 물어도 돼?”

“뭐, 지금 해 주게?”

“……아니, 일단은 알아 두고 있고 싶어서. 나중에 백작저에 돌아가서 해 줄게. 여기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몇 개 없어.”

“꼭 그렇진 않은…….”

대화의 도중, 스카이라가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자연스레 이어지려던 말이 갑자기 뚝 끊기자 애리얼이 의아해하며 그를 보았다.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거야?”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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