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왜? 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가 극구 거부하며 말을 잘라 냈다. 그 단호한 기세에 애리얼도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를 계기로 다시 침묵이 시작되었다. 한창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가 싶더니 돌연히 찾아온 단절을 견디기 어려웠다. 애리얼은 좀이 쑤셔서 괜히 빈 유리컵에 담긴 스푼만 틱틱 건드렸다.
그러자 그의 손이 빈 유리컵을 빼앗아 가고 대신 새 티라미수 컵을 쥐여 주었다.
“난 이거 안 좋아하니까, 네가 먹어.”
애리얼은 디저트 컵을 쥐고서 그를 곁눈질했다. 코코아 파우더 자국만 남은 빈 유리컵은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걸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이처럼 배려받은 기분이었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에게 좋은 것들을 건네주고서도 전혀 생색을 내지 않았으니까.
“고마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생색도 내지 않는 그는 가끔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부끄러운 듯했다.
“넌 상냥한 사람 같아.”
“먹을 거 준다고 그러는 거야?”
“그것도 없진 않지만, 음……. 네가 네 사람에게 모진 것 같진 않아서.”
“자기 사람한테까지 인색한 지배자는 몇 없어. 특례 정도야 가볍게 줄 수 있지. 돈도 물론이고.”
“……돈을 준다는 거야?”
이야기가 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고, 이쪽의 주제를 더 반기는 눈치였다.
“거느리려면 당연히. 별로 큰 가치도 아니고, 돈 정도야 얼마든지 풀지.”
“큰돈을 막 불러도 줘?”
“큰돈이 얼만데.”
“일억 실론?”
“기본이 일억인데.”
“기본이라고……? 그렇게 많이 줘도 돼?”
“별거 아니니까.”
평이한 어조였다. 시큰둥하게 들릴 정도로.
그래서 애리얼은 차분한 얼굴로 몰래 기함했다. 일억 실론이 백작저에서 운용되는 일 년 예산에 가깝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말하는 별거 아니라는 게 얼마나 ‘별거’인지 알 수 있었다.
“필요하면 너한테도 줄게.”
스카이라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얼마를 불러도 줄 것 같은 그의 기세에, 애리얼은 혹하기보다 무서움을 느꼈다. 애리얼이 그에게 제 사람으로 인식된다는 소리였으니까.
‘개인 루트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그의 호감도 창에 하트가 세 개였던 걸 생각하면 개인 루트 직전이긴 했다. 애리얼은 여기서 대화를 끊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스카이라의 일부 집착적인 면모를 생각하면, 괜히 대화를 피했다간 말이 더 길어지기나 할 터였다. 그러니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대화를 꺼내야 했다. 어차피 당장 좋은 말 조금 한다고 호감도가 대뜸 올라가지는 않을 테니까.
“아카데미 특례나 뭐, 그런 부분만 말한 건 아니었어. 그냥…… 네가 사소하게 느껴질 만한 데서도 이렇게 배려를 해 주니까.”
그러면서 애리얼은 티라미수 컵을 들어 보였다.
“이거처럼 종종 먹을 것도 챙겨 주고, 마력학도 가르쳐 주고……. 그러기 쉽지 않은데. 귀찮기도 했을 테고. 그런데도 신경 써 준 게 너무 고마웠어. 네가 딱히 보답을 바라지도 않아서 미안했고…….”
“…….”
“난 네가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자 스카이라는 아주 드물게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낮고 조용한 웃음소리였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네.”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웃고 난 뒤 꺼낸 말은 자조하는 것처럼 들렸다.
순수하게 칭찬했을 뿐인데 그가 보이는 반응이 이유를 모르게 공허해서, 애리얼은 당황스러웠다.
***
스카이라는 애리얼이 티라미수를 다 먹을 때까지 조용히 곁을 지켰다. 그러고는 빈 유리컵 두 개를 가지고 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치우겠다며 만류했지만 스카이라는 듣지 않았다. 별거 아니지만 그녀의 손에 맡기기는 싫었다. 상냥한 사람이라는 소리에 재주를 부리고 싶어졌던 건지도 모른다.
상기하자, 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내가 상냥하다고…….’
스카이라는 실소했다. 그녀가 좋게 봐 주는 건 기쁘지만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생색을 내지 않는 건 그의 성격적인 부분이고, 베푸는 것은 그저 제 편으로 회유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황태자가 아닌 제 쪽에 붙도록 하려면 그 정도는 당연했다. 누구도 그걸 감명 깊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지위나 권력, 외모 등에 관한 찬양이나 아부는 많이 들었다. 그러나 ‘상냥함’ 같은 칭찬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제 측근에게도 ‘상냥하다’ 같은 평가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고작 티라미수 한 컵에 상냥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다니. 지금까지 그녀 외의 다른 인간들에게 쏟아부은 돈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씁쓰레하게 웃던 그는 표정을 굳히고 복도로 들어섰다. 손에는 유리컵 두 개를 들고서 시녀를 불렀다.
“공녀에게 객실을 안내해 줘. 침대 있고, 창문도 있고, 누가 봐도 객실 같은 거로.”
“알겠습니다, 저하. 그리고 빈 컵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공녀한테 가 봐.”
“네, 저하.”
묵례를 마친 시녀가 뒤늦게 그의 뒤를 따라 나온 애리얼에게로 향했다. 공녀님, 하고 애리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스카이라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문득 컵을 빌미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겼다.
그의 걸음은 별장 정문을 빠져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정원 한구석에 조경수로 가려진 좁은 길이 보였다. 주방 쪽으로 통하는, 별장의 상비 인원이 다니는 길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하녀가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과일 껍질이 가득 든 통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화,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하던 거 해.”
스카이라는 무심히 곁을 지나쳤다. 그는 좁은 길을 일직선으로 통과해 주방으로 향하는 나무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소홀했던 뒷문이 끼익 소리를 냈다.
주방에 있던 인원들이 스카이라를 발견하고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하는 말이 제각기 다른 타이밍에 흘러나왔다. 스카이라는 근처 개수대에 유리컵 두 잔을 내려놓고서 그들을 둘러보았다.
“책임자가 누구지.”
고개 숙인 이 중 검은색 조리장복을 입은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이곳의 책임자입니다, 저하.”
“황족의 식사는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로 올려지도록 명령 되었을 텐데, 왜 약속된 만찬의 시각을 변경하고 두 번으로 나누어 올렸지?”
“상부의 지시였습니다. 저희는 그냥 따랐을 뿐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만찬의 변경을 몇 시쯤 누가 알렸지?”
“오후 여덟 시경 시녀님께서 오셔서 만찬을 두 번 올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같은 곳으로 두 번?”
“아니요. 각기 다른 곳으로 두 번, 같은 시간에 올리되 기존에 정해 두었던 만찬의 시각을 더 미룬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전한 시녀의 생김새를 기억하나?”
“아뇨, 잘은……. 죄송합니다.”
“머리칼의 색이나 눈동자의 색이라도 좋아. 뭐라도 기억나는 걸 말해 봐.”
“갈색……. 아니, 그보다 좀 더 노란빛이 나는 황갈색이셨던 것 같습니다. 눈동자 색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특이한 색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머리칼과 비슷한 색이었나?”
“그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녀가 메뉴도 지정해 줬나?”
“어, 어떻게 그걸…….”
책임자라는 이가 말까지 더듬거리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걸로 충분한 답변이 되었다. 원하는 정보를 얻은 스카이라는 미련 없이 주방을 나갔다.
황갈색 머리칼.
그는 주방 하인에게서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아는 시녀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갈색이라는 머리색 자체는 흔한 머리색이지만 황족의 식사에 관한 명령을 내리는 시녀 중에서 고르라면 상당히 국한되는 색이다. 그리고 데본시아의 직속 시녀 중에 그 비슷한 머리색의 시녀가 있었다.
‘메이지 에프론.’
스카이라는 곧장 시녀를 특정했다. 플라넬 왕국에 갈 때도 데본시아는 그 시녀를 데려갔었다.
‘외교에 관한 일이 아니면 보통 시에나 로빈슨을 대동할 텐데, 다른 시녀를…… 하필이면 플라넬 왕국과 관련하여 정보가 많은 메이지 에프론을 여기에 데려왔다……. 무슨 속셈이지?’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애리얼은 새로 배정된 객실로 짐을 옮겼다. 다행히 보석은 없고 침대는 있는 멀쩡한 방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왔다. 느릿느릿 눈꺼풀을 깜박였다. 긴 이동에 지친 몸이 수면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녀는 약간의 껄끄러움 때문에 옅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오긴 했으나, 애리얼은 조금 불안했다. 데본시아가 아닌 스카이라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객실 이동이었기 때문이다.
‘데본시아는 자기 옆에 있으랬는데, 이래도 되나?’
데본시아의 호감도를 올리려면 조금 불편해도 그의 의사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애리얼은 오늘 거의 다섯 시간가량을 이동해 왔다. 피곤함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이런 밤중에 만나는 일이라면 제발 피하고 싶었다. 그 만남의 대상이 데본시아라서 더 그랬다.
그리고 스카이라에게 생길 오해도 신경 쓰였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과 한밤중에 밀회라니.
‘아무리 호감도가 높은 스카이라라도 정떨어질 일 같은데.’
그의 호감도 하트가 와장창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그런 거 다 제치고서 당장 귀찮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말이다.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하지……?”
졸음이 쏟아지는 가운데 애리얼이 느릿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두 형제를 붙들고서 아슬아슬하게 호감도를 조절해야 하는데, 그게 애리얼한테는 영 체질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잠든 애리얼은 외줄을 타는 꿈을 꿨다. 한쪽에는 끝없는 낭떠러지가, 다른 한쪽에는 뾰족뾰족한 창이 한가득 꽂힌 땅이 있었다.
***
자정.
마력이 일정하게 가득 차오르는 시각이었다.
빈 발코니에 홀로 앉아 있던 데본시아가 세티에서 일어났다. 그는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누구를 마중하러 나가듯.
“메이지.”
“예, 전하.”
황갈색 머리칼을 지닌 시녀가 그의 옆으로 와 고개를 숙였다.
“객실은 다 준비했니?”
“예.”
“시녀는 몇 명이나 대기시켰어?”
“총 다섯입니다. 왕족을 모실 때 결례가 되지 않을 인원을 충족하는 최소 인원입니다. 모두 입이 무거운 이들로 엄선했습니다.”
“그래, 조금만 더 수고해 줘.”
“예, 전하.”
“오 분에서 십 분 정도 걸릴 거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짧은 답이었다. 시녀는 눈을 감고서 배웅하듯 허리를 숙였다.
데본시아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