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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8화 (78/264)

78화

다시 별장에 나타났을 때, 데본시아는 세 명의 귀빈을 데리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전담 시녀를 붙여 객실로 안내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데본시아는 욕실에 들어선 즉시 세면대에 고개를 처박았다. 열이 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울렁이는 속에서 신물이 넘어왔다.

천 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 그것도 타인을 셋이나 데리고 한 순간 이동은 후유증이 컸다. 몸속에서 과부하가 걸린 마력이 제각기 날뛰었다. 속이 쿵쿵 울렸다. 이래서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는 소량의 위액을 토해 내고는 물을 틀어 입을 헹궜다.

그는 세면대를 붙잡고서 속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욕실로 뒤따라온 시녀, 메이지가 빠르게 수건과 각 얼음이 담긴 유리컵을 건넸다.

데본시아는 입 안에 얼음을 집어넣고서 근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두어 개 더 얼음을 녹여 먹은 후에 젖은 얼굴을 닦았다.

“아, 힘들다.”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체온이 높아진 탓에 얼음을 물고도 숨결이 차지 않고 미적지근했다.

길고 매끈한 손이 수건을 던지고 아닌 밤중에 동여맨 크라바트를 신경질적으로 풀어 헤쳤다. 그는 작아진 얼음을 까드득 깨물어 삼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일정은 뭐라고 해 뒀어.”

“도착이 늦었기에 일단 조찬은 미루고 오찬부터로 전해 두었습니다.”

“좀 늦게 준비해. 한 시나 한 시 반쯤이 좋겠다.”

“예. 귀빈께도 그렇게 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나가 봐.”

“예, 전하.”

메이지가 문을 닫고 나갔다.

데본시아는 그 즉시 억지로 갖춰 입었던 정장의 겉옷을 벗어 냈다. 각 얼음을 하나 더 입에 물고 욕조로 가서 물을 틀었다.

다행히 일은 순조로웠고, 그에게는 아침까지 제 열을 식힐 찬물만 필요했다.

***

별장은 햇살이 잘 들지 않았다. 아침이 밝아 와도 방 안에는 서늘한 그림자가 져 있다.

애리얼은 창문을 열었다. 1층이라 우거진 녹음이 창틀로 드리운 게 보였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이슬의 향기가 났다. 멀리서 산새 소리가 들렸다. 여름임에도 선선한 공기가 물기 스며든 녹음의 향을 머금고 끼쳐 들어왔다. 시원했다.

이제 곧 팔월인데 이런 날씨라니, 낙원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아예 창가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휴양지는 휴양지구나. 좋다…….”

애리얼은 시녀가 조식으로 가져다준 브리오슈에 딸기잼을 바르며 바깥을 구경했다. 고요한 정원의 너머로 침엽수림이 보였다. 시원한 바람과 어울리는 솔 향이 멀리서 은은하게 날아왔다. 이대로만 지낼 수 있다면 여기에 오래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 되겠지. 스카이라랑 데본시아가 같이 있으니까.’

한숨이 나려는 입에다 빵이나 밀어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브리오슈를 한 입 베어 먹으려는데, 창틀에 웬 새가 앉았다. 배가 희고 검푸른 날개깃을 가진 새였다. 자그마한 머리를 요리조리 기울이며 애리얼을 들여다보았다. 빵을 탐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브리오슈의 귀퉁이를 뜯어 내밀었다.

하지만 다가온 것은 새의 부리가 아니었다. 창밖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놀란 새가 푸드덕거리며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안 돼.”

타이르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날아간 새 못지않게 놀란 애리얼이 두 눈을 깜박이며 창밖에서 나타난 이를 주시했다.

블라우스 위로 얇은 로브 카디건을 걸친 데본시아가 아침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에게서 아침 햇살과 어울리는 산뜻한 향기가 났다.

“그런 걸 주면 너한테 길이 들거든.”

그가 잡아챘던 손목을 놓아주며 말했다.

애리얼은 창문 밖으로 끌려갔던 제 손목을 방 안으로 거두었다. 놀란 눈이 여전히 동글동글하게 뜨여 있었다. 손에는 브리오슈 귀퉁이를 든 채 물었다.

“길이 들어요?”

“음식을 나눠 주면 그렇게 되겠지.”

“고작 빵 한 조각에요? 야생 동물이 그렇게 쉽게 길들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네가 주는 건 그만큼 달고 중독적인 거니까.”

“……빵에 마약이라도 들었나요?”

“아니.”

그가 웃으며 부정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먹으려던 브리오슈를 전부 내려놓았다.

애리얼의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아침 댓바람부터 나타난 데본시아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이런 일이 생길까 봐 눈뜨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얇은 잠옷 바람으로 그와 대면하는 불상사는 피했다.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산책이나 할까 해서.”

“이쪽으로요? 산책로가 없지 않나요?”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보네.”

데본시아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눈웃음을 쳤다.

“시녀를 부를까요?”

“아니.”

“그러면…….”

“네가 길 좀 찾아 주지 않을래?”

“제가요?”

“들어가게 해 줄래, 아니면 네가 나올래?”

그는 막무가내로 대화를 진행했다. 어디까지나 너그러운 태도로, 강요한다.

애리얼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으면 그는 떠나지 않을 터. 그나마 방보다는 밖에서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창틀을 짚고 올랐다. 창은 허벅지까지 오는 높이였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면 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데본시아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넘어 나오는 애리얼을 신기하게 보았다. 놀란 모양인데, 그 와중에도 손은 착실하게 그녀를 향해 내미는 매너를 보였다. 창틀에서 내려올 때 잡을 수 있도록.

애리얼은 별 거부감 없이 그의 손을 잡고서 착지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전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저렇게 웃지 싶을 정도로 명품인 미소였다.

“마음에 드니?”

애리얼은 감탄하며 보다가 능청스레 건네진 그의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마음에 들다니, 무엇을 말씀하신 건가요?”

“내 얼굴.”

“…….”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제가 어떻게 감히…….”

당황스러운 질문에 애리얼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피하려 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받쳐 들었다. 바닥을 향하던 그녀의 시선이 도중에 끌어 올려져 그와 눈을 마주했다.

몽환적인 색채의 오드 아이가 애리얼의 얼굴을 가득 담고 있었다.

“괜찮아. 그러니까 말해 줘.”

“…….”

“어때? 마음에 들어?”

그가 재차 물으며 상체를 숙였다. 숨결이 느껴질 거리로 다가와선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는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임은 틀림없었다.

애리얼은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어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기쁘네.”

만족한 듯 싱긋 웃은 그가 애리얼의 턱을 놓고 물러났다.

잠깐 멍해 있던 그녀의 표정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디 가시는 길이셨어요?”

“여름 정원.”

“여름 정원?”

“응. 여름꽃을 모아 놓은 곳이야. 요즘 같은 시기에 보면 좋아.”

“하지만 여름 정원은 저도 잘 모르는 곳…….”

“그래. 그럼 같이 걸으면서 찾아보자.”

데본시아는 아예 앞장서서 걸어갔다. 어차피 길을 찾아 달라던 건 애리얼을 꾀어내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다. 그녀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도 숨길 생각 없어 보이고.

‘날 찾은 진짜 용건은 뭘까?’

차라리 대놓고 물으면 그가 답해 줄까 싶기도 했다.

애리얼은 잔디를 밟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입꼬리가 기꺼운 듯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전하.”

“응?”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길을 잃어서.”

“그거 말고요. 무슨 일이신데요?”

“진짜야. 처음엔 그랬어.”

그는 정말 우연히 그녀의 객실로 찾아온 것처럼 말했다. 거짓말일 게 뻔한데, 말하는 게 어쩐지 의미심장해서 애리얼은 더 묻지 못했다.

드물게 감상에 젖은 그의 눈빛이 줄지어 늘어선 측백나무를 바라보았다.

별장의 후원, 가지와 잎을 곱게 다듬은 측백나무로 만든 높다란 울타리. 길이 없어 보이는 그곳을 향해 데본시아가 일직선으로 걸었다. 애리얼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길이 없으리라 여겼던 측백나무의 사이, 뒤쪽 나무에 가려져 벽으로 보였던 자리에서 숨은 오솔길이 드러났다.

그가 익숙한 듯 막힘없는 걸음으로 오솔길로 들어갔다. 애리얼은 좁은 길을 앞서는 너른 등을 보며 걸었다. 그의 군청색의 로브 자락이 이슬에 젖어 있었다. 길을 잃었던 게 사실이든 아니든 정원을 상당히 돌아다닌 건 맞는 것 같았다.

밤새 차가워진 초목들이 이따금 다리를 스쳤다. 애리얼은 바지런히 그의 뒤를 따랐다.

오솔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걷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급작스러운 정지에 애리얼은 그의 등판에 얼굴을 박고 말았다.

“아, 미안.”

짧은 사과와 함께 데본시아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의 등에 가려졌던 시야가 트였다.

물씬 스미는 청량한 향기. 새파란 하늘. 푸르고 흰 꽃들이 만발한 화원은 마치 낙원의 한 군데를 떼어 놓은 것같이 훌륭했다.

애리얼은 소리 없이 감탄하며 입술을 벌렸다.

정원의 안으로 먼저 발을 내디딘 그가 애리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싱그러운 여름의 한중간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한 발 앞에 있던 꽃들이 어느새 주변을 둘러쌌다. 화사하게 개화한 꽃잎에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말 그대로 여름에 피는 꽃으로만 가득한, 여름 정원이다.

그녀는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오시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엄청 예뻐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수국을 등지고 선 그가 애리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여름 정원을 보고 싶었다던 그는 아까부터 애리얼만 보고 있었다. 정원이 목적이 아니라 그녀가 목적이었음을 말하듯.

애리얼은 제게로만 향하는 시선을 눈치채고서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이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랬더니 그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하하 웃었다.

“그런 걸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거야?”

“네…….”

애리얼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며 시인했다. 그는 다정한 웃음을 띠고서 그녀의 물음에 답을 내어 줬다.

“선물을 받고 싶어서.”

“선물…… 이요?”

“응. 네 선물이 사라져서, 아쉬웠거든. 받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그…… 당장은 어렵지만 백작저에 부탁해서 이른 시일 내에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걸 원하세요?”

“아니, 애리얼…….”

그는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하수인처럼 구는 그녀의 말을 막으며 쓰게 웃었다.

“나는 그냥 네가 주는 걸 받고 싶은 거야.”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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