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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9화 (79/264)

79화

나직하고도 상냥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진심임을 알리듯 그의 얼굴은 모처럼 진지했다. 그의 두 눈이 드물게 반짝이며 애리얼을 지그시 응시했다.

애리얼이 놀라 물었다.

지, 지금요?”

“응. 지금.”

애리얼은 당황했다. 데본시아가 뭐라도 달라 말했으나, 그녀에게는 당장 줄 게 없었다.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휴대폰만 잡혀서 더 난감해졌다.

“하지만 전 당장 드릴 게…….”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펴서 화단을 가리켰다.

“아무거나 하나 꺾어 줄래?”

애리얼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갔다. 여름꽃이 가득한 정원의 한쪽.

“꽃을요?”

“이왕이면 나하고 어울리는 거로.”

그의 요구에 애리얼은 화단을 쭉 훑었다.

‘ 데본시아와 어울리는 꽃…….’

그런 소박한 거로도 괜찮은 걸까. 어차피 이 화단은 전부 그의 것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애리얼의 눈은 각기 다른 색으로 한껏 부풀어 펴진 꽃잎들과 부드럽게 휘어진 제각각의 꽃술까지도 꼼꼼히 살폈다. 연푸른색의 수국, 하얀 라임라이트, 플록스, 델피니움, 물매화, 리아트리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확인하던 그녀가 한 군데서 멈추었다. 상체를 숙여 망설임 없이 꽃대를 꺾어 들었다. 애리얼은 찬찬히 꽃을 살펴보며 하자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데본시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팔처럼 휘어진 하얀 꽃잎을 보고서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애리얼이 그에게 내민 것은 순백색의 백합이었다.

“백합?”

“왠지 아침 햇살 같은 느낌이라서……. 오늘 황태자 전하를 봤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보통 햇살이라면 좀 다른 꽃을 고르지 않아?”

“그런가요? 약간 하얀 느낌의 햇살을 생각해서 이걸 골랐는데. 하얀 시트에 스며든 햇살 같은 느낌으로요.”

“내가 그런 느낌이야?”

“오늘 본 전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네가 그렇다면야.”

그의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차분했다. 여기까지 데려와 선물을 달라며 살살 꾀어낸 것에 비해 싱거운 반응이었다.

애리얼은 백합 줄기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 속눈썹 아래 오드 아이를 조용히 내리깐 그는 하염없이 하얀 꽃잎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묘한 표정이었다. 아련한 듯 씁쓸한 듯, 그래도 기꺼운 듯.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애리얼도 그를 따라 눈을 내리깔았다. 백조의 목처럼 우아하게 휜 꽃잎이 보였다.

흰 백합은 오늘 창문 너머로 미소 짓던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와 어울리는 꽃을 찾으라면 강렬한 색으로 화려하게 피어나 가시를 잔뜩 달고 있는 붉은 장미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장미는 이 여름 정원에 없는 꽃이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백합을 꺾었다. 아침 햇살을 닮았던 그의 우아한 미소를 상기하면서.

“한번 달아 보면…….”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다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나한테?”

데본시아가 웃으며 물어 왔다. 애리얼은 부정할 수 없어서 시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였으니 무슨 꽃이든 안 어울리겠냐마는, 그의 웃는 얼굴에는 백합이 어울릴 것 같았다.

“잘 어울리실 거 같아서요.”

“그거 꽂으면?”

“네. 해 드려도 될까요?”

그가 고분고분 상체를 숙이며 다가왔다. 애리얼은 뺨을 스칠 정도로 다가온 그의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살짝 물러났다. 대신 손만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새하얀 귓바퀴 뒤로 금발을 쓸어 넘겼다. 세사(細絲)처럼 부드러운 금발이 손가락에 감겼다.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귀 뒤쪽으로 백합 줄기를 끼워 넣었다. 손을 거두자 매끄러운 금발이 손 사이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그가 숙였던 상체를 세우고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흰 꽃잎을 매달고서 생긋 웃었다.

“어울리는지 봐 줘.”

데본시아의 금발로 이른 아침의 햇살이 은은하게 번졌다. 은색 눈동자가 가느스름하게 휜 옆으로 새하얀 백합이 빛났다.

“잘 어울리세요. 거울이 없어 보여 드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만큼.”

애리얼이 단어 하나마다 진심을 꾹꾹 담아 발음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백합의 여린 꽃잎을 만지작거리다 수줍게 웃었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 입꼬리 위로 새하얀 뺨에 옅게 분홍빛 홍조가 들었다.

그 순간,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몸에 밴 행동은 여전히 고상한데도 어쩐지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순진’이라니.

데본시아와는 정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애리얼은 그런 말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만큼 눈앞의 그는 평소와 다르게 솔직한 감정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였다.

하얀 백합을 귀에 꽂고서 부끄러운 듯 웃는 그.

그가 두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입을 움직였다.

“내가 껄끄러울 거야. 의심스럽기도 할 테고.”

그는 늘 애리얼의 속이라도 들여다본 듯이 말했다. 애리얼은 초연하고 차분한 표정을 짓느라 애를 먹었다.

“……아니에요.”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알기 쉬운 인간은 아니니까, 어쩌면 당연하지. 그런 것이 차후 황제로서의 미덕이기도 하고.”

“…….”

“그렇지만 애리얼, 나는…… 정말로 네 편이야.”

그녀가 직접 꽂아 준 백합을 매달고서 그가 조용히 말했다. 부끄러워하듯이 시선을 내리깔고, 유순한 얼굴을 하고, 무해하게. 정말로 애리얼을 신경 쓰고,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휴대폰은 아직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

애리얼은 성에 낀 거울 같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반사하는 수면이 흰빛을 띠었다. 하얀 빙하 같기도 했다. 얼음 거울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풍경이었다.

호숫가에 천막을 치고 앉아서 보니 더욱 절경이었다. 애리얼은 밀크티를 마시며 가만히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의 옆에는 나른한 얼굴로 그녀와 같은 걸 마시는 데본시아가 있었다.

데본시아는 여전히 귀 뒤에 백합을 꽂은 채였다. 애리얼은 그만 빼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권했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처음 받았을 땐 별로 기뻐하지 않았으면서.

사용인들이 그를 보고서 놀란 눈을 해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미풍이 불어 호수에 잔물결이 일었다.

애리얼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사과 향이 나는 밀크티를 머금었다.

둘은 늦은 아침 식사를 막 마친 참이었다.

와플에 딸기, 아보카도와 스크램블드에그, 베이컨 등이 나왔다. 딱 브런치로 적당한 메뉴였다.

한 입도 대지 않던 어젯밤의 저녁 식사와 달리 데본시아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 식후 차로 나온 밀크티도 함께 들었다.

왜 전날과 다른지 모를 노릇이다. 애리얼은 밀크티를 홀짝거리다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전하께선 저녁을 드시지 않는 편이신가요?”

“먹는 편이지. 어제는 사정이 좀 있어서 거른 거야.”

“그랬군요.”

“걱정해 준 거야?”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라고 하면 기분 나쁘실까요?”

옆자리의 그에게서 나긋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 관심을 가져 준다면야 뭐든, 기껍게 여길게.”

그는 애리얼에게 열렬한 구애를 보내는 사람처럼 말했다. 호감도 알림도 오지 않았는데 신기하기도 하지.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자신을 꾀어내기 위해 연기를 펼치고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이고 의심했다. 그랬던 이력도 있으니, 애리얼은 그의 말이라면 거의 믿지 않았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가끔 그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거짓을 갑옷처럼 두르고 다녀도 개중에는 진심을 내보이는 때가 있지 않을까. 자꾸만 그런 의심이 들게 만드는 게 데본시아가 무서운 이유였다.

애리얼은 데본시아에 대해 알아보려고 할수록 더 깊은 미궁에 빠졌다. 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도 그를 알아 가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해 모르는 면이 늘어나 낯선 두려움이 들 뿐이었다.

‘왜일까. 솔직히 데본시아는 나한테 잘해 주는 편인데, 왜 자꾸 의심만 들고…….’

그의 존재는 화려한 커버로 감싼 박물관의 금서 같았다. 예쁜 외관으로 눈길을 빼앗고, 귀한 몸에 부과된 위험성으로 흥미를 유발해 관심을 빨아들인다. 하지만 결국 금지된 것이기에 함부로 접근해 속을 파헤치려다간 되레 화를 입기 쉬웠다.

애초부터 연관되지 않았다면 좋았겠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데본시아는 엄연한 공략 대상에 속했다. 애리얼이 반드시 엮여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별장행은 좋은 기회였다.

별장에 온 후로 애리얼은 그와 고작 이틀을 보고 지냈지만, 꽤 가까워졌다. 이제는 전처럼 그의 얼굴만 봐도 굳어서 뻣뻣해지진 않았다. 그에 대한 경계가 상당히 허물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게 과연 호재일까 싶기도 했다. 그에게 홀리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감이 산재한다.

그럼에도,

‘일단 호강은 하는 거 같네.’

애리얼은 현 상황을 솔직하게 평했다. 그녀는 지금 향도 맛도 훌륭한 밀크티를 마시며 절경을 눈앞에 두고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황족만 쓴다는 휴양지, 현대의 에어컨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서늘한 최고의 피서지에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었나 봐? 갑자기 감사를 다 하네.”

“그냥…… 제가 너무 호강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다행이다. 네가 여기 온 걸 후회할까 봐 걱정했거든.”

“솔직히 처음엔 그랬어요. 갑자기 불려 온 데다 차도 너무 오래 탔고요.”

“내가 데리러 갈 걸 그랬네.”

“아,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황태자가 데리러 오다니, 무슨 기겁할 소리를. 애리얼은 재빠르게 부정했다.

“그냥 그만큼 고생을 해서 올 만큼 좋은 곳이어서, 불러 주신 게 지금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네가 좋다니 나도 기뻐.”

데본시아가 반만 마신 밀크티 잔을 내려놓았다. 등받이에 기대어 젖혀졌던 그의 고개가 어느새 애리얼을 향했다. 그의 눈이 애리얼의 옆모습을 가만히 담았다.

“사실 널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편히 말씀하세요.”

“못 하겠어.”

“네? 어째서요?”

그녀가 의아하다는 눈길로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데본시아는 빙그레 웃었다.

“실수가 될까 봐. 지금은 그냥 네 옆에만 있어도 좋거든.”

그의 답변에 애리얼은 더욱 의아해졌다. 황태자가 백작 공녀의 기분을 신경 써서 말조심한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 않은가. 스카이라나 렉시우스, 아나스타샤에게 말하던 걸 생각하면 데본시아는 그다지 상대의 기분을 염려하고 뱉는 이도 아닌데 말이다.

‘정말 나한테 호감이라도 있는 건가?’

단순히 스카이라에게서 뺏으려고 잘해 준다기엔, 보이는 친절이 도를 넘은 느낌이었다.

애리얼은 결국 솟아나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겠지만, 하나만 물어도 괜찮을까요?”

“무슨 질문을 하고 싶길래 실례가 될 거라 선언하고 말하는 걸까.”

“죄송합니다.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슨 질문이길래 그래?”

그는 너그럽기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애리얼은 조금 고민하다가 계속 묻고 싶던 질문을 꺼냈다.

“전하께선 혹시 제게 호감을 두신 건가요?”

“겨우 그거 묻느라고 그렇게 사과까지 한 거야?”

데본시아가 쿡쿡 웃으며 반문했다. 그 말투에는 내포된 채근이 넌지시 묻어났다. 원래 하고팠던 진짜 질문을 꺼내 보라는, 그녀를 향한 채근.

‘말해도 될까?’

애리얼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본디 물으려 했던 질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뱉었다.

“황자 저하에게서 저를 뺏어 보려고, 저에게 잘해 주시는 건가요?”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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