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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80화 (80/264)

80화

질문을 들은 데본시아의 얼굴이 다소 경직되었다. 미소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두 눈동자는 어둡게 침잠했다. 그는 귀 뒤에 꽂혀 있던 백합을 스륵 빼냈다.

“몇 가지 정정해야겠다, 애리얼.”

그의 음성이 이제까지와 다르게 고압적이고 엄중했다.

애리얼은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뻣뻣한 긴장감이 목구멍을 조였다.

서늘한 표정으로 마주 본 그가 천천히 취조하듯 말을 이었다.

“일단 넌 스카이라의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네.”

“그러니 내가 뺏는 것도 아니고.”

“네.”

“그리고 나는 고작 뺏는다는 행위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야.”

“…….”

“답변이 됐어?”

애리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고압적이던 그의 기색이 누그러졌다. 그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눈 속에 도사렸던 음습함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계속 굳은 채 눈치만 보았다.

그는 눈꼬리를 사르르 접으며 방긋 웃었다.

“화내는 거 아니야. 놀랐다면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응.”

도로 어색해져 버린 애리얼의 말투에 그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애리얼은 바닥으로 시선을 향한 채 데본시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보았던 그의 얼굴이며 말투에서 그녀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위압적인 기운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았다. 경직된 온몸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마력의 탓인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으나, 배움이 모자란 그녀는 정답을 알지 못했다. 왜 데본시아는 이토록 무서운 걸까. 알 수 없는 감각만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애리얼…….”

그가 부르는 소리에 애리얼은 움찔거리며 땅만 보던 시선을 들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도 데본시아는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능숙하게 미소만 짓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가셨기 때문일까.

애리얼은 그가 아까처럼 변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조심을 해 가며 겨우 대답했다.

“……네, 황태자 전하.”

“아니, 그렇게 말고…….”

“…….”

“이게 아닌데.”

그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지르다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내가 무섭니?”

“……조금은요.”

“조금? 왜?”

데본시아가 오드 아이를 번뜩이며 물었다.

“잘해 주기만 했잖아.”

“…….”

“대답 좀 해 봐.”

“……아, 아니에요. 무섭지 않아요.”

애리얼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잔뜩 긴장해 눈치만 보는 대답이었다. 낮아졌던 경계의 벽이 다시 높다랗게 쌓였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도로 멀어졌다.

애리얼은 그의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잠깐 보았던 위협적인 모습만이 그의 민낯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위협적이던 모습은 이유를 모르게 애리얼의 극심한 공포심을 자극했다.

애리얼은 그를 알아 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를 알기가 두려웠다.

커버에 홀려 금서를 열기 전에 멈춰야 했다.

호감도 알림에 오류가 있긴 하지만,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에 있어선 다른 공략 대상들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굳이 그를 파헤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필요할 때마다 비위를 맞춰 주고, 고분고분 굴면 된다. 지금껏 그래 왔던 그대로.

‘심연을 들여다보지 말자.’

애리얼은 그와 마주한 시선을 다시 땅으로 떨궜다. 데본시아는 더 묻지 않았다. 대화가 끊겼다. 정적이 천막 아래에 가득 찼다.

차라리 이게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대화도 없이 적막 속에 한 시간을 보냈다.

애리얼은 감히 먼저 일어서겠다고 말할 수 없었고, 데본시아는 그녀의 옆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시녀가 찾아와 데본시아에게 일정을 전하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시녀의 말을 듣는 중간에도 그는 일정을 파투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애리얼은 그가 이대로 눌러앉을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정인 듯했다.

데본시아는 자리를 먼저 일어나면서 애리얼에게 상냥한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나 애리얼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묵례만 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데본시아의 낯빛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녀가 꺾어다 준 백합을 소중하게 쥐고 떠났다. 그에 애리얼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애리얼은 객실로 돌아와 휴대폰을 켰다. 하지만 신경 쓸 만한 알림이 와 있지 않아서 금방 화면을 껐다. 데본시아의 호감도 창은 변함이 없다.

‘아직도 오류잖아.’

호감도가 올랐다는 알림도 없었고.

앞길이 막막했다. 데본시아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애리얼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도피처처럼 졸음이 찾아왔다.

***

5층 객실은 어둡고 조용했다. 커튼을 두껍게 치고 램프도 켜지 않았다. 주변을 밝히는 것이라곤 커튼 사이로 미세하게 비치는 햇살이 다였다. 하얀 빛줄기가 그림자 진 방 안에 선을 그었다.

창문이 있는 한쪽 벽면에 데본시아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 화병에다 백합을 꽂아 두고 감상했다. 팔걸이에다 팔을 세우고 이마를 짚은 채 나른한 시선으로 집요하게 백합을 훑었다. 온종일 이러고 있을 것같이, 그는 고작 보는 일에 집중했다.

테이블에는 백합이 꽂힌 화병 외에도 흰 선물 상자 두 개가 있었다. 리본도 풀지 않은 새것이었다.

그는 두 개의 선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로지 백합만 보았다.

쿵쿵, 아래층이 울렸다. 층계에서 누군가가 거친 기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제 방의 슬라이딩 도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곧이어 문이 거칠게 밀리며 예상한 인물이 들이닥쳤다.

데본시아는 인사를 건네듯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파란 안광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분노에 휩싸인 스카이라가 잡아먹을 기세로 다가와 데본시아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최근 잘 참는가 싶었는데, 오늘은 그 임계점을 넘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거칠고 낮은 음성. 스카이라는 짐승이 으르렁대듯 그를 위협했다.

블라우스가 거칠게 당겨 올려졌다. 데본시아는 머리를 뒤로 늘어트렸다. 힘없이 젖혀진 고개를 하고 큭큭 웃었다.

“화가 많이 났나 보네.”

“그럼 내가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줄 알았어?”

“불만이 있다면 말로 먼저 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니. 손을 먼저 내세우면 화를 입기 쉬워.”

다정히 타이르는 말투였다. 스카이라는 머리꼭지까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멱살을 잡은 손에 핏줄이 섰다.

항상 무례하게 굴고 선을 넘는 건 그의 형인데, 왜 정당한 분노를 내뱉는 그를 도리어 아이처럼 보이게 만드는가. 스카이라는 데본시아의 매사 봐준다는 듯한 저 시건방진 태도가 역겨웠다.

“말로 하라고? 그래.”

이를 꽉 깨문 그가 호흡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뗐다.

“어젯밤에 왔다는 플라넬의 왕과 왕비에 왕녀. 셋이나 되는 왕족을 미리 말도 없이 나한테 던져 놓고, 내가 모르는 새에 날 팔아먹는 제안까지 주고받아서 날 모욕한 것도 모자라, 내 객실에 왕녀가 들이닥치게 해? 외교를 생각해서 무례를 눈감아 주며 대했더니, 이젠 왕국의 인간들까지 날 아주 병신 호구로 대하는데, 내가 기어코 그런 인간들이랑 하하 호호 웃으며 상견례 같은 역겨운 오찬을 해야겠어?”

“제국을 위해서 한 거야. 뭐로 보나 이득인 건 너도 알잖아.”

“그걸 날 팔아먹으면서 해?”

“강요하진 않았어.”

“이게 강요가 아니면 뭔데? 설마 외교를 파탄 내는 걸 선택지라고 말하는 거야?”

“그런 선택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건 그만큼 네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진다는 거겠지.”

개같은 놈이 개같은 소리를 했다.

스카이라는 구역감이 치밀었다. 데본시아의 얼굴에 토사물을 뱉어 버리고 싶었다. 멱살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플라넬 왕녀가 좋으면 네가 왕녀랑 결혼해.”

“정략혼이야 좋아서 하는 게 아닌 거, 알 만한 나이잖아?”

“그걸 잘 아는 놈이 몇 년간 동생의 약혼녀를 주야장천 유혹하고 다녔어?”

“그러게……. 후회되네.”

데본시아의 입에서 처음 듣는 소리가 나왔다.

스카이라가 열일곱 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못 들은 말이었다. 그는 파란 두 눈을 크게 뜨며 기함했다.

“뭐? 후회?”

“…….”

“웃기지 마. 그런들 정식 약혼이 잡히기만 하면, 넌 왕녀를 유혹할 거잖아.”

“이제 안 해.”

안 하다니, 왜. 스카이라는 들불처럼 일어나던 분노가 의문과 함께 섬찟한 불안으로 변환되는 것을 느꼈다. 놀리는 기색 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데본시아가 혐오스러웠다. 입을 닥쳐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데본시아는 할 말이 남았다. 연달아 스카이라에게 통보하듯 전했다.

“그러니까 안심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제 그런 버릇 나쁜 짓은 안 하겠다는 거야.”

“왜?”

“천선하겠다는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러니까 왜 지금, 이 순간에 그런 소릴 하는가. 아래층에 애리얼이 있는 이 순간에…….

스카이라는 분노와 불안을 구분할 수 없어졌다. 양 손목의 안쪽으로 길게 힘줄이 섰다.

그는 데본시아가 거짓으로 기만하는 기색을 보이길 바라며 물었다.

“앞으로 혼담을 파투 내는 저급한 유혹은 안 하고 살 테니 플라넬의 왕녀랑 잘해 보라는 건가.”

“응.”

“그렇다는 건, 너도 샤펠 공녀에게 집중한다는 소리겠지?”

“아니.”

“그러면…….”

“나는 애리얼을…….”

거기까지만 들렸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강렬한 파열음이 데본시아의 뒷말을 덮었다. 방어술이 깨지는 소리였다.

결국 참지 못한 스카이라가 주먹으로 데본시아의 옆얼굴을 강타했다. 하지만 데본시아에게는 작은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고개조차 돌아가지 않았다.

반면 수천 개 바늘에 찔린 듯 너덜너덜해진 스카이라의 주먹에서 핏물이 흘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데본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데본시아가 엉망이 된 그의 손을 보더니 픽 웃었다.

“날 죽이려고 했구나.”

“정신 나간 새끼.”

“새삼스럽게.”

“이 정도는 아니었어. 어머니가 죽을 때도 네가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이 정도나 보여 줄 필요가 없었던 거지.”

데본시아가 섬뜩하게 웃었다. 초점 나간 눈동자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가장에 가려졌던 극단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여태 이런 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뒀다니.’

스카이라는 그의 멱살을 거칠게 놔 버리고서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이 삽시간에 복도를 통과해 층계를 향한다.

데본시아는 그가 떠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층계에서 울리는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쯤 조용히 시녀를 불렀다.

“메이지.”

황태자의 목소리에 방의 다른 쪽 문을 열고서 시녀가 들어왔다.

“네, 전하.”

“플라넬 왕녀에게 특별히 줄 게 있다고 전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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