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라는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와 애리얼의 객실을 찾았다.
“애리얼!”
격앙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대답이 없자 그는 피 묻은 손을 말아 쥐고서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쿵쿵!
큰 소리가 울리고, 상처가 터졌다. 그의 손이 닿은 나무 문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그런데도 그는 아픈 것도 모른 채 두드렸다. 아드레날린이 과분비된 것처럼 불안에서 발발한 흥분 상태가 이어졌다. 데본시아에게 주먹을 날린 순간부터 그랬다. 심장이 발작하듯 요동치고 있었다.
쿵쿵!
시끄러운 노크 소리가 두 번째 울렸다. 그제야 문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였다. 스카이라는 다급하게 외쳤다.
“애리얼, 문 열어.”
“……스카이라?”
휘청이는 듯한 걸음이 내는 소음과 함께 달칵, 문고리가 돌아갔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한 애리얼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를 맞았다.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맹해 보였다.
그 무방비함이 스카이라의 인내를 건드렸다. 내재한 불안감을 터트렸다.
그의 손가락이 원을 그리듯 한쪽으로 꺾이다 손바닥으로 감겨들었다. 손등에는 기이한 문양이 나타났다. 대련장에서도 보았던 그의 낙인화술.
애리얼은 그가 결계를 둘렀음을 알아채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는 손을 뻗었다. 우악스러운 악력이 그녀의 왼 손목을 끌어갔다. 스카이라의 파란 두 눈이 가느다란 손목에 걸린 검은색 고리를 씹어 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저걸 어떻게 해야 없애 버릴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는 손가락에 힘을 꽉 주고서 데본시아의 마력이 감도는 저주스러운 고리를 눌렀다. 엉망이 된 그의 오른손에서 핏물이 배어 나와 애리얼의 손목을 적셨다.
뒤늦게 스카이라의 손 상태를 인지한 애리얼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너, 피……!”
“신경 쓰지 마. 가만히 있어.”
스카이라는 그녀의 걱정 어린 말을 차갑게 끊어 냈다. 브레이슬릿을 쥔 손가락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스카이라의 온 신경은 그녀의 손목을 족쇄처럼 옥죄는 그 고리에만 가 있었다. 이걸 부수고 싶다. 산산조각 내고 싶다. 그리하여 검은빛을 내는 불쾌한 물건이 그녀의 손목에서 흔적조차 남지 않게 떼어 내지도록.
손톱을 세운 손끝이, 까드득까드득, 브레이슬릿의 겉면을 긁으며 지나갔다. 지지직, 스파크가 이는 소리, 혹은 무언가가 타는 소리가 났다. 방출된 마력이 그의 손끝을 타고 브레이슬릿을 갉아 대고 있었다. 일반적인 물건이었다면 이미 흔적도 없이 재가 되었어야 마땅한 힘이었다. 그런데 멀쩡하다.
오히려 그에게 경고하듯 브레이슬릿의 방어술이 발동되었다. 가시로 찌르는 듯한 날카롭고 쓰린 감각이 그의 손을 타고 전신으로 올라왔다.
스카이라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다친 손에서부터 흘려보낸 마력 때문에 상처가 벌어졌다. 울컥거리며 피가 빠져나왔다.
“스카이라!”
애리얼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러나 그는 무시했다. 오히려 브레이슬릿을 더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참을 수 없이 저렸다. 온몸이 쓰라렸다. 하지만 그런 고통도 그냥 거슬리기만 할 뿐이다. 저 끊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브레이슬릿에 증오를 쏟느라 감각이 무뎌졌다.
검은 표면이 피에 젖어 번들거렸다. 부서진 곳 없이 매끈했다.
‘왜, 안 부서져! 왜!’
스카이라는 이가 갈렸다.
마력을 가두는 결계 안이었다. 마력은 새는 것 없이 온전하게 브레이슬릿으로 모였다. 그 양은 견고한 성채를 무너트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 하나를 부수지 못했다. 이토록 마력을 쏟아부었음에도 실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무력감이 홍수처럼 그를 덮쳐 왔다.
이렇게나 철저하게 만들어 낸 저주스러운 물건이 애리얼의 손목을 감고 있다.
푸른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과도한 마력의 방출에 스카이라의 팔이 덜덜 떨려 왔다. 무시할 수 없는 대량의 혈액이 애리얼의 손목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애리얼은 보다 못해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
“그만해!”
제지하려 드는 미약한 힘에 스카이라의 시선이 브레이슬릿에서 옮겨 갔다. 경악을 금치 못하던 애리얼의 얼굴은 어느새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스카이라는 그제야 제 얼굴에 흐르는 액체의 비릿함을 느꼈다. 그는 다치지 않은 멀쩡한 왼손으로 입술을 훔쳤다. 손에 코피가 묻어났다. 절로 욕이 나왔다. 제기랄.
브레이슬릿에 걸린 고통스러운 방어술을 견디며 마력을 지나치게 쏟아부은 여파였다.
어디 그뿐인가. 강대하고 방대한 마력을 극도로 정교하게 조절하느라 눈이 빠질 것 같았다. 얇은 고리에만 마력을 집중하고 그 아래 애리얼의 피부는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과부하가 걸린 몸이 가늘게 떨렸다. 구역감까지 일었다.
그의 손목이 떨리는 만큼 애리얼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다쳤어?”
“넌 몰라도 돼.”
“왜……. 브레이슬릿 때문이야?”
“…….”
“브레이슬릿에 무슨 문제가 있어?”
“…….”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야?”
걱정이 가득한 까만 눈망울이 스카이라를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 스카이라는 뭐라 말하려 입술을 움직였다가 다시 굳게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떨어졌다.
애리얼의 손목을 처참하게 적시며 흐른 그의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피비린내가 좁은 복도를 채웠다.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제 손목을 붙든 그와 그의 상처를 번갈아 보았다.
“말하기 어려우면 말하지 않아도 돼. 일단 손부터 치료하는 게 좋겠어.”
핏발 선 눈을 내리깐 스카이라가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애리얼은 빈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았다.
“여기 황자 저하께서 다치셨…….”
“넌 네 손목부터 씻고, 쉬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스카이라는 시녀를 부르는 애리얼을 말을 끊어 내며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 작은 동작에도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뚝뚝 흘렀다. 행여나 상처에 닿을까, 애리얼은 황급히 제 손을 거두었다.
그는 미련을 내비치며 애리얼의 손목을 눈에 담았다. 검은색 고리가 감긴 흰 손목이 척척한 핏물에 절여져 있었다. 다친 것이 그가 아닌 그녀 같았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스카이라는 입술을 깨물다가 몸을 돌렸다. 저를 따라오는 듯한 발소리가 울리자 엄한 목소리를 냈다.
“따라오지 말고 있어.”
종종거리는 작은 발소리가 멎었다.
스카이라는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보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
짧은 사과였다.
“괜찮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다친 손부터 꼭 치료해.”
애리얼이 그의 뒤에서 조심스레 전했다.
스카이라는 도망치듯이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가 떠남과 동시에 결계도 사라졌다.
뒤늦게 달려온 시녀가 애리얼의 손목을 보고서 기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리얼이 뭐라 답해 주는 것 같았으나 워낙 조용한 목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말을 했을지는 예상이 갔다. 자신보다는 황자를 더 신경 써 주라는 둥 그런 말들을 늘어놓았겠지.
스카이라는 종종거리며 따라붙는 시녀의 발소리를 듣고 명령했다.
“나갔다 올 거야. 치료에 필요한 건 1층 중앙 응접실에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저하.”
시녀가 제자리에 멈추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스카이라는 돌아보는 일 없이 별장을 박차고 나갔다.
빽빽한 침엽수림은 오후의 햇살 아래서도 서늘했다.
그림자 속으로 발을 들인 그는 낮게 드리운 스프루스 가지를 신경질적으로 꺾었다. 힘없이 부러진 가지와 잎이 땅으로 떨어졌다. 추락하는 가지를 좇아 그도 고개를 숙였다. 피에 젖은 잎이 보였다. 애리얼의 손목처럼 그 잎사귀도 그의 피로 얼룩덜룩 더러워져 있었다.
흘린 피가 얼마나 많으면 애리얼의 손목을 그만큼이나 적시고도 또 나뭇가지를 적실까. 참담한 심경 끝에 문득 궁금해진 그는 엉망이 된 제 오른손을 펴 보았다.
너덜너덜한 상처에서부터 올라온 비린 혈향이 숲의 솔 향마저 뚫고 진동했다. 패배자가 풍기는 비린내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재차 그를 덮쳐 왔다. 매끈한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한심하게도 마도구 하나 부수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이라곤 고작 그녀의 손목을 피범벅으로 만든 것이 다였다. 그런 주제에 그녀에게 전후 설명조차 해 주지 않았다.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을 괜히 알려서 불안에 떨게 만들기는 싫었던 알량하고 무능한 배려심 때문이었다.
그 어리석고 주제넘은 배려의 근간을 파헤치면 보다 노골적인 감정이 나왔다.
그녀를 향한 지독한 열망. 누군가는 저급하다고 비난할 욕망. 그를 얼빠진 천치로 만들고, 경솔한 행동을 거듭하도록 사고를 흐리고, 밤새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게 만든다.
처음 느낀 것이었고, 감추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숨겨지지 못한 감정은 금세 데본시아에게 들켜 버렸다.
그의 것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고 뺏으려 드는 그의 형이 그의 첫 감정을 쉬이 지나칠 리 없었다. 감정 없이 맺어진 한낱 약혼녀도 철저히 뺏어 기어코 가질 수 없게 망가뜨린 것이 데본시아였다. 한데 약혼녀도 아닌 첫사랑이라니. 데본시아가 더욱 심기일전하여 뺏으려 들 것은 당연했다. 이전보다 더한 수를 쓰는 것 역시 당연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스카이라는 제 감정을 데본시아에게 들키고 만 것이 저주스러웠다. 티 내지 않고 삼켰다면, 능청을 잘 떨었다면 애리얼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물건을 손목에 거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애리얼…….”
길지 않은 이름이 입술에서 흩어졌다.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만, 이제 와서 그런 가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가정하기도 싫었다.
그는 애리얼을 만나 기뻤다.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지 않다. 행여 상상으로라도 싫다.
애리얼은 처음으로 아무 이득도 없이 황태자를 거부하고 그를 택해 준 이였다. 그에게 바라는 것도 없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보면 가슴께가 간질거리고, 알 수 없이 고양되고, 초조해지고, 열이 올랐다. 보기만 해도 좋았다가 부수고 싶을 정도로 손안에 넣고 싶어졌다가. 조금씩 점점 더 많이.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걸 감출 수가 없어졌다.
그런데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심장을 박동하게 하는 그 감정이 그를 처참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힘들게 한다.
“나는 애리얼을…… 그녀가 내게 종속되기를 바라.”
데본시아의 역겨운 음성이 그에게 두통을 일으켰다. 저 말을 듣고서 그는 주먹을 날렸다. 그랬음에도 오히려 상처는 그가 입었고, 데본시아는 생채기 하나 얻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스카이라는 자신의 무력함이 끔찍했다.
그녀의 손목에 걸린 데본시아의 마도구. 아직은 잠잠한 상태인 그 도구, 검은색 브레이슬릿.
그가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데본시아가 그녀에게 흥미를 잃는다면, 그 마도구가 평생 잠잠할 것을 안다. 머지않아 그녀의 손목에서 풀릴지도 모르지.
그러니 데본시아를 막기 힘들면 그가 마음을 접으면 된다. 마음을 접을 수 없으면 거리라도 벌리면 됐다. 정말 애리얼을 위한다면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앞으로 그녀와 마주하지 않을 것이다. 신경도 쓰지 않고, 알은체도 하지 않고…….
스카이라는 그림자 진 땅바닥을 멍하니 보았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