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수전 아래에다 가만히 손목을 대고 있었다. 흐르는 물에 피가 씻겨 내려갔다. 스카이라의 피였다. 하얀 세면대를 붉게 적시다 배수구로 흘러갔다.
손목에 묻은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양이었다.
“도대체 뭐 하다 이렇게…….”
말을 끝맺지 못하고 애리얼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애리얼이 자느라 접근 알림을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 스카이라는 다급히 객실 문을 두드리며 나타났다. 몹시 격앙된 모습의 그는 그녀의 왼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을 부수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브레이슬릿을 끔찍하고 증오스럽다는 듯 보았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당장 부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애리얼은 제 왼 손목을 감싼 브레이슬릿을 연신 문질렀다. 신경이 쓰여서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 검은 팔찌가 예사 물건이 아님을 인지하긴 했다. 하지만 스카이라가 저렇게 나올 정도의 물건일 줄은 몰랐다.
스카이라는 이 브레이슬릿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대강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한테 알려 주려고 하지는 않았어.’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브레이슬릿이 그에게는 해가 되어도 정작 애리얼에게 큰 해가 될 물건은 아니다. 혹은, 알려 줘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스카이라의 성격상 아마도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는 데본시아와 관련되면 인내가 굉장히 부족해지기는 하지만 엉망으로 다치면서까지 날뛰는 인물은 아니고, 또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생각보다 꽤 상냥한 사람이니까. 괜히 해결할 방도가 없는 정보로 그녀를 불안에 빠뜨리기 싫다는 배려일 것이다.
“그런 거라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하나?”
뒤로는 브레이슬릿에 관한 조사를 하더라도 표면적으론 무지한 상태인 체하는 쪽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데본시아의 귀에 들어가 봐야 좋을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데본시아는 무슨 생각으로 이걸 준 걸까?’
일전에 이야기한, 저를 보호하기 위해 건넨다는 말이 아예 거짓이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애리얼은 브레이슬릿을 문지르던 손을 거두고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쥐었다.
사실 브레이슬릿의 기능이 공략에 영향이 가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아닐 확률이 높으니 문제였다. 스카이라조차 방도를 찾지 못한 일의 대책을 그녀 스스로 마련해 놓지 않으면 안 됐다.
애리얼은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레이신의 공략도 아직인데 골 아픈 일이 늘어만 간다.
***
“황태자 전하, 이것이 무엇입니까?”
플라넬의 왕녀가 케이스에 담긴 백금 반지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앞으로 밀어진 반지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금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은 데본시아가 꽤 친절한 얼굴을 하고서 답변했다.
“황실의 일원이 되면 가지는 거야.”
“하, 하지만 저는 아직 정식 약혼녀도 아닌데…… 받아도 괜찮을까요?”
“곧 될 거니까 상관없지.”
“그런……! 저는 아직 황자 저하와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눈걸요. 저하께서 불편하게 여기시지는 않으실까요?”
“정략혼이니까 황자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괜찮으니까, 껴 봐.”
“……네! 그럼, 감사히…….”
머뭇거리던 왕녀는 황태자의 허락 아래 케이스에서 백금 반지를 꺼내 들었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는 모습이 상당히 능청스러웠다. 황태자의 약혼녀인 아나스타샤도 아직 받지 못한 귀한 것을 끼고서 왕녀가 수줍게 웃었다.
데본시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좋은 체스 말이 되어 줄 수 있을지, 왕녀를 주시하는 눈동자는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무정했다.
사랑에 빠진 왕녀는 그에 걸맞은 소유욕을 두 눈에 담아 빛냈다. 약지에 끼워진 것을 연신 쓰다듬으며 기뻐했다.
좋은 말이 될 것 같다. 판단을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황자와 정찬을 들면서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어때? 오늘 오후 여섯 시…… 아니, 일곱 시가 좋겠다.”
“저는 언제든 괜찮아요. 하지만 저하께서 수락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반지를 끼고서 화색을 띠던 왕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여지를 주는 일이 다분한 데본시아와 달리 스카이라의 성미는 매우 칼같았다. 스카이라는 정식 외교 자리가 아니면 왕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왕녀는 홀로 애가 탔다. 그녀는 황자와 엮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애석하게도 효과를 본 일은 없었다. 몰래 그의 객실을 찾아가 기다리기까지 한 일은 되레 그를 격노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플라넬의 왕이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황자가 왕녀를 무례한 이로 여기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낭패였다.
왕녀는 일방적인 제 감정을 잘 알고 있는 듯 우울감이 어린 목소리를 냈다.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저와의 만남에 응하신 적이 없으셨거든요.”
“그럼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면 되지.”
“제국과 왕국 간의 만찬 자리 말씀이신가요?”
“그보다는 좀 더 사적인 게 좋겠다.”
“그보다 사적이라면…… 어떤 식으로요?”
“왕과 왕비는 제외하고 가는 게 좋겠지?”
“그러면 확실히 사적인 자리라는 느낌이 더 짙어지겠지만, 저하께서 승낙하실까요?”
“아마도?”
데본시아는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올렸다.
왕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불안해하는 얼굴을 했다. 이미 수없이 거절을 당해 황태자가 자리를 주선한다는데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불안하니?”
“네. 아무래도 저하께선 그런 자리를 싫어하실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걱정하지 마. 왕녀는 제시간에 반지를 끼고 오기만 하면 돼.”
황태자가 확언했다. 그제야 왕녀는 불안함을 거두고 묵례하며 황태자의 배려에 감사를 전했다.
***
오후 다섯 시, 시녀가 애리얼의 객실을 찾아 황태자의 전언을 알렸다. 일곱 시에 함께 만찬을 들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애리얼에게는 만찬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일곱 시가 되어 위층으로 오르는 그녀의 기분은 시시각각 변했다.
‘데본시아와 마주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당장 오늘 오전에 그와 유쾌하지 못한 시간을 가졌다. 그런 이와 식사하는 건 썩 즐겁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카이라의 일도 있었으니, 그녀로선 데본시아를 보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갖은 생각으로 심란한 애리얼의 앞으로 어느새 만찬장이 가까워졌다. 그녀가 다가가자 대기하던 시녀가 슬라이딩 도어를 열어 주었다.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만찬장에 들어섰다.
다행히 아직 만찬장은 비어 있었다.
애리얼은 조금 안심하며 만찬이 이루어질 긴 테이블로 다가갔다.
만찬을 위해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장식들이 그녀를 반겼다.
여름 정원에서 보았던 여름꽃들로 만들어진 센터피스. 그 양옆으로 각각 두 개씩, 총 네 개의 자리가 세팅되어 있다. 크기가 다른 백자기 그릇 두 개를 겹쳐 놓고, 금색 커틀러리를 늘어놓았다. 마름모 모양으로 접힌 냅킨에 하얗게 꽃을 피운 바질이 놓였다.
‘그런데 왜 자리를 네 개나 세팅했지?’
애리얼은 테이블의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어디에 앉아야 좋을지 몰랐다. 불길한 감상을 자아내는 네 개의 접시를 가만히 주시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앉을 자리를 고민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리얼은 곧장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난 네가 가볍게 인사해 줬으면 하는데.”
“……오셨어요?”
애리얼이 어리숙하게 다시 인사를 건네자 데본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웬일로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중요한 손님이라도 맞는 것처럼.
애리얼은 테이블에 놓인 네 개의 도자기 그릇을 보며 물었다.
“만찬에 다른 분들도 오시는가 봐요?”
“오긴 하는데,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고.”
“저는 어디 앉으면 될까요?”
“특별히 좌석을 지정해 놓은 게 아니라서 아무 데나 앉아도 돼.”
테이블로 다가온 그는 그녀와 가까운 곳의 의자를 빼 앉았다.
“내 옆에 앉으면 더 좋고.”
그가 은근슬쩍 제 측석을 빼 줬다. 애리얼은 잠깐 망설이다 이내 그의 옆에 앉았다. 누군지도 모를 손님의 옆에 앉는 게 더 불편할 것 같아서였다.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고맙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가 만찬장의 입구를 응시했다.
우우우웅-
애리얼의 옷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 순간, 애리얼은 누가 만찬장에 나타날 것인지 알게 되었다.
‘스카이라.’
슬라이딩 도어가 부드럽게 밀려 열리며 초대객들을 들여보냈다. 애리얼은 손님으로 나타난 이들을 보고 긴장감에 손을 말아 쥐었다.
오늘만큼은 데본시아와 절대 합석하지 않을 것 같던 스카이라.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수줍은 표정의 소녀.
스카이라는 간단한 인사도 없이 곧장 착석했다. 깔끔한 정복 차림으로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은 모습이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상처는 완전히 치료했는지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는 손이 길고 매끈했다. 애리얼은 놀란 와중에도 그의 깨끗한 손을 보고서 안도했다.
그에 뒤이어 만찬장으로 들어온 소녀는 자리에 앉기 전 데본시아와 애리얼을 향해 묵례를 했다. 애리얼도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마주 고개를 숙였다. 데본시아는 가만히 앉아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후에야 소녀는 겨우 착석했다.
스카이라가 데본시아와 마주 앉는 바람에 애리얼은 자연스럽게 소녀와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소녀는 눈치를 보듯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연갈색 머리칼, 연녹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색소가 빠진 듯 희미하게 옅은 인상이었다. 행동하는 것이 꼭 겁에 질린 소동물 같았다. 사랑스러우나 심약해 보인다. 다만 입은 옷은 화려했고, 행동거지에는 고상함이 묻어 있었다.
‘스카이라와 혼담이 오갔다던 그 왕녀인가?’
애리얼은 어렵지 않게 소녀의 신분을 추측해 냈다. 황족만 출입이 가능한 별장에서 스카이라와 함께 나타날 이는 달리 없을 테니.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인다. 스카이라는 왜 이 자리에 왕녀와 함께 나타난 걸까. 심지어 데본시아가 주최하는 자리를 질색하는 그인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그는 순순했다. 황태자의 옆자리에 앉은 애리얼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애리얼은 차마 질문할 수가 없어 조용히 묵례만 했다.
네 개의 자리가 모두 채워지자 데본시아가 까딱 손가락을 움직였다.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만찬의 첫 코스인 4종의 아뮈즈부슈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대지 않았다. 어색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데본시아만이 유리잔을 들고서 라임이 든 물을 마셨다.
“분위기가 너무 경직된 거 같은데, 서로 통성명이라도 할까?”
장난스레 던진 농담에 스카이라가 미간을 구겼다. 데본시아는 픽 웃고는 애리얼에게로 눈을 돌렸다.
“애리얼은 왕녀와 초면이지?”
“네. 처음 뵙습니다.”
데본시아의 물음에 답하며 애리얼은 건너편에 앉은 왕녀를 보았다. 왕녀는 어쩐지 주눅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슬쩍슬쩍 애리얼을 훑는 시선이 어쩐지 자격지심에 가득 차 있었다. 애리얼은 어색함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처음 뵈어요. 플라넬의 왕녀, 헬레나 플라넬입니다.”
한마디도 꺼내지 않을 것 같던 왕녀, 헬레나가 먼저 인사했다.
애리얼은 테이블로 떨구어졌던 시선을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헬레나가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왕녀님. 허클리 백작가의 공녀,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애리얼은 정중하게 경칭을 쓰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헬레나는 난색을 표했다.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황태자 전하의 귀빈이신데…… 저에게 고개 숙이시지 마셔요.”
애원하듯 말하는 헬레나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듯 눈을 내리깔고서 연녹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 눈길은 주로 스카이라에게 가닿았다. 황태자 전하의 귀빈이라며 애리얼을 언급하고서는 황태자가 아닌 황자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희한하게도.
“네. 알겠습니다.”
애리얼이 고개를 바로 세우며 답했다.
테이블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미동도 없는 셋의 사이에서 홀로 여유로운 데본시아가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플라넬 왕녀는 스카이라의 약혼 상대가 될 예정이야.”
그는 스카이라가 민감해할 이야기를 기정사실처럼 덧붙이며 헬레나의 신원을 밝혔다.
잔뜩 긴장한 애리얼의 두 눈이 빠르게 스카이라를 살폈다.
의외로 스카이라는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이미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도 남았을 텐데. 초연한 그의 태도가 기이하고 또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