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라가 조용하게 굴자 데본시아도 그를 더 자극하지는 않았다.
만찬의 시간에는 대화 없이 침묵만 이어졌다.
애리얼은 자꾸만 목이 켕기는 느낌이었다. 음식을 손가락 반 마디보다도 더 작게 썰어 먹는데도 그랬다. 분위기는 갑갑하고 즐기는 이 없는 만찬은 형식적이기만 했다.
겉으로는 친선을 도모하는 자리겠으나, 애리얼은 이 자리를 주최한 데본시아의 속내를 알았다. 일부러 스카이라와 혼담이 오가는 중인 왕녀를 데려온 것만 봐도 그렇다. 스카이라의 속을 긁어 놓으려는 그 의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왕녀는 그걸 위한 말이었다. 애리얼 역시 그랬다.
그리하여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딱딱한 표정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데본시아는 만찬에 어울리는 은근한 웃음기를 걸친 우아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약혼식 날짜는 언제야?”
데본시아의 입에서 터져 나온 질문에 옆자리의 애리얼과 왕녀가 움찔 떨었다.
스카이라는 오히려 태연했다. 예민하게 여기는 사안임이 분명한데도 그는 과할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나오기에는 너무 일러. 아직 왕국의 제안도 다 듣지 못했어. 후학기 일정도 여유가 없고.”
“내가 일정을 좀 빼 줄게.”
“나 대신 더 일하려고? 친절도 하셔라.”
“하나뿐인 동생의 일이니까.”
데본시아가 싱긋 웃었다. 스카이라가 불쾌한 것이라도 본 듯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학기 얘기가 나온 김에 해 둘 말이 있어.”
데본시아는 시선을 애리얼에게로 향한 채 말했다.
이야기에서 빠져 있던 애리얼은 가니시로 나온 양송이를 썰다가 멈칫거렸다. 나이프를 든 손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엇나간 칼이 그릇에 마찰하며, 끼긱, 불길한 소음을 냈다.
애리얼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황태자의 말에 불순한 소음을 얹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에 왕녀도 쥐고 있던 커틀러리를 내려놓았다. 스카이라는 애초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테이블이 찰나 완전한 정적에 감싸였다. 이때를 기다린 듯 데본시아가 선언했다.
“후학기부터는 애리얼의 편입 추천인이 황자에서 황태자로 바뀌게 될 거야.”
그 말인즉슨, 애리얼이 반공식적으로 황자가 아닌 황태자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아카데미의 안에서는 그럴 것이다.
애리얼은 잠잠한 얼굴이었으나, 그 속은 의문과 혼란으로 심각해졌다. 지금 데본시아는 명백하게 스카이라에게서 애리얼을 빼앗고 있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주어질 특혜나 배려에는 모두 스카이라가 아닌 데본시아의 이름이 붙게 될 터였으니까. 데본시아는 부정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어디로 보나 그가 스카이라에게서 애리얼을 강탈한 상황이었다.
스카이라가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데본시아의 특성이다.
‘이건 아니야.’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던 애리얼의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그녀는 데본시아의 이름을 제 등에 업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인 백작이 황태자의 사람도 아니니, 대외적으로도 말이 많이 나올 일이었다. 더군다나 애리얼은 스카이라와의 의리를 이런 식으로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그가 더없이 혐오하는 데본시아의 방식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주시는 특례를 받을 만큼 전하께 이바지한 일이 없습니다. 감히 제가 전하의 후광을 받아도 될지 염려스럽습니다.”
“응. 받아도 괜찮을 거야. 이미 조처해 뒀어.”
“하지만…….”
“스카이라도 알고 있는 일이야. 괜찮다고도 말했고.”
실로 간단하고 명확하며, 추가적인 반박을 차단하는 통보였다.
애리얼은 그때야 깨달았다. 웬일로 스카이라가 굉장히 잠잠하다는 것을.
애리얼의 눈이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그는 정자세를 하고 앉은 채 허공만 보고 있었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은 데본시아의 강탈에 아무런 불만도 내놓지 않았다. 오늘 오전에만 해도 길길이 날뛰며 피를 흘리던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유독 차분하게 느껴지는 스카이라의 두 눈은 만찬 내내 애리얼을 보지 않았다. 의도적인 외면 같았다.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내게 말해.”
“네.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데본시아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걸로 이 이야기는 끝이었다. 만찬의 종료까지 다시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디저트와 함께 올라온 식후 차가 반쯤 비워졌을 때 스카이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만찬 내내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었다. 그의 앞에 놓인 잔은 차를 거부하여 엎어 놓은 상태였다.
“먼저 일어날게.”
스카이라가 말했다. 데본시아는 찻잔을 들고서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스카이라는 그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스카이라가 떠나자 헬레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움츠렸다. 비어 버린 옆자리를 불안하게 살피는 연두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저도 그럼 이만…….”
헬레나가 우물쭈물 안쓰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데본시아는 이번에도 역시 고개만 까딱거려 허락을 내렸다. 헬레나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묵례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만찬장에는 데본시아와 애리얼만 나란히 앉아 남게 되었다. 애리얼은 찻물이 남은 잔을 내려놓고 입을 뗐다.
“전하, 저도 이만…….”
“넌 가지 마.”
“…….”
“안 갔으면 좋겠어.”
“네. 말씀대로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애리얼이 충직한 부하처럼 답하자 데본시아의 한쪽 눈썹이 스리슬쩍 치켜져 올라갔다. 그는 들었던 잔을 내려놓고는 꼿꼿이 세웠던 상체를 느슨하게 뒤로 젖혔다.
“궁금한 게 많을 거 같은데, 안 물어봐?”
“왜 제 추천인을 자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황태자인 내가 황자보다 더 많은 특례를 줄 수 있으니까.”
“저는 이미 충분히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과한 걸 해 주려는 게 아니야. 안심하고 있어. 지레 겁먹지 말고.”
그는 애리얼의 말에 담긴 속내를 정확히 간파하고서 답했다. 실로 소름 끼치는 눈치였다.
“……왜 저에게 특례를 주려 하시나요?”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데본시아의 답은 간단했다. 황태자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다는데 누가 막겠는가. 더구나 스카이라도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용인했으니, 애리얼에겐 항의할 구실조차 사라진 셈이었다.
그런 처지인 그녀가 데본시아에게 전할 말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애리얼은 의자에서 일어나 데본시아를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황태자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이제까지 중에 가장 격식을 갖추어 말했다. 도로 무를 길 없이 황태자의 사람으로 아카데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사람으로서 예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데본시아는 흡족해하긴커녕 그답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선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얼굴에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언뜻 스쳐 갔다.
하기야 애리얼도 그가 이런 격식 차리는 일을 좋아할 거라고 보진 않았다. 그는 애리얼이 친근하게 구는 걸 더 선호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랫것으로서 응당 보여야 할 행동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데본시아도 조금은 포기하는 눈치였다. 오늘 오전에 별로 좋지 않게 만남을 끝냈고, 편입 추천인도 멋대로 바꾸고서 통보했으니, 애리얼이 그에게 살가울 리 없었다. 그도 이해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선 조금 더 편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네, 노력하겠습니다.”
애리얼은 그를 향해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숙였던 허리는 폈으나 시선은 여전히 아래로 내리깔려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데본시아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애가 타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랑 있기 싫지?”
“아닙니다.”
“거짓말하면 안 돼.”
“…….”
“특히나 그런 거짓말은…… 내 기대감을 부추기니까.”
가벼운 어투가 아니어서 애리얼은 표정을 굳혔다. 설마 진심인 건가. 위험한 추측이 든다. 함부로 대답할 수 없어 그녀는 침묵하고 말았다.
데본시아도 그녀를 이 이상 떠보지는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려던 찰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 편이야. 이것만은 기억해 줘.”
그는 정원에서도 했던 말을 남기고서 먼저 만찬장을 떠났다.
스카이라를 필두로 순식간에 비어 버린 공간이 썰렁했다. 사람의 시선이 얽히지 않는 편안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귀빈이 다 나가기 전까진 시녀들도 만찬장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애리얼은 만찬장을 나가지 않고 도로 의자에 앉았다. 생각을 조금 정리하고 싶었다. 그녀는 특히나 신경 쓰이는 데본시아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내 편이라고?’
상대를 현혹하려고 하는 것치곤 너무 꾸밈이 없는 말이었다. 상대를 속이려고 하는 거라면 대놓고 네 편이라 하는 건 최악의 선택지 같았다. 네 편이라며 스스로 아군을 자처하는 순간, 그를 검증하기 위한 정당한 의심이 들기 때문이었다.
데본시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눈치가 기막히게 빠른 인간이다. 권모술수는 물론이요, 연기에도 능한 자였다. 사교계도 모르고 정계는 더더욱 모르는 애리얼도 황태자 직위를 차지한 그가 사람 다루는 데 뛰어나다는 건 잘 알았다. 그런 그가 도리어 의심받을 걸 알고서도 네 편이라 말했다. 그가 애리얼의 신뢰를 얻으려고 이런 방식을 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말해 봐야 역효과라는 것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건넨 말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세운 대전제를 뒤엎어야 함을 느꼈다. ‘네 편’이라는 지나치게 직관적인 소리가 그녀를 현혹하거나 흔들려고 꺼낸 말일 것이라는 대전제. 그 대전제부터가 잘못된 거라면?
‘그런 거라면…… 무슨 의미지? 진심으로 내 편이라고 어필하는 건가?’
왜?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머리가 복잡해진 애리얼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데본시아는 사실 별생각 없었던 게 아닐까. 그녀가 고뇌하도록 적당히 던진 말이 아니었을까. 이런 가정이 오히려 신빙성 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머리 아파.”
애리얼은 미간을 짚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고민해 봐야 답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데본시아는 원래도 추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무렴 호감도 창도 오류이니 말 다 했다. 그의 의도를 일일이 헤아리려 하다간 머리가 터질지도 몰랐다.
‘답도 없는 거, 오래 생각하지 말자.’
네 편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저 상대를 흔들기 위한 수에 불과한 거겠지. 그렇게 치부하고 무시하면 편했다. 그런 식으로 가볍게 여기는 게 의외로 좋은 선택일 때도 있었다.
애리얼은 이 이상 추측하기를 그만뒀다. 객실로 돌아가 책이나 좀 보다가 자고 싶었다. 그녀는 조금 피로해진 얼굴로 만찬장을 나섰다.
“공녀님.”
계단으로 향하려던 애리얼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벽으로 막힌 반대쪽 복도의 끝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헬레나가 보였다.
만찬장의 문 주변에서 멀리 가지 않은 왕녀를 발견하자마자 애리얼은 몸을 굳혔다.
‘설마 아까 나간 뒤로 계속 기다린 건가?’
만약 그랬다면 헬레나는 애리얼과 데본시아가 나눴던 대화를 다 들었을지도 모른다.
애리얼은 불안감을 느끼며 아까 나눈 대화를 되뇌었다. 혹시 왕녀가 듣기에 부적절한 말이 있었는지 이 짧은 순간에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다행히도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앞에선 상당한 수준으로 말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설령 헬레나에게 들렸어도 문제 될 내용은 없었다.
침착함을 유지한 채 초연하게 표정을 다듬은 애리얼이 그녀에게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왕녀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가 종종거리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애리얼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