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85)화 (85/264)

알림을 확인한 애리얼의 까만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려 왔다. 

‘분기라고? 또?’

심지어 첫 번째 분기와 상황이 비슷했다. 다시금 데본시아로부터 유발된 분기였다.

분기로 인한 엔딩의 극변을 한 번 경험한 그녀는 분기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게다가 데본시아가 건네려는 것이 뭔가. 무려 ‘황실의 각인’이다. 반지에 새겨진 금독수리를 볼 때부터 예사 물건이 아니라 파장이 클 줄은 알았다. 그래도 설마하니 분기를 가르는 물건일 줄이야.

‘이래서야 도무지 안 받을 수가 없잖아!’

애리얼은 난감함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황실의 각인은 여름 정원에서 꺾어 준 백합 따위의 보답이 되어선 안 됐다. 그런 것과 교환하여 받을 만한 것이 절대 아니다. 각인은 혼담이 오가는 정식 약혼 상대에게만 빌려주다시피 건네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선뜻 건네 와도 거절하는 게 도리에 맞는 일이었다. 생각 없이 받았다간 되레 화를 입을 정도로 과한 보답이니까.

애리얼은 황실의 각인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분기만 아니었다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황실의 각인을 받고 말고 하는 게 분기를 가르는 선택이라는 거였다. 안타깝게도 그랬다.

‘어쩌지? 받으면 문제가…….’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 같아 애리얼은 이마를 짚었다. 이에 한참 깨물린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번 분기의 파장은 컸다. 일반 엔딩 두 개에 데본시아의 굿 엔딩 전부 삭제. 처음 겪은 엔딩의 변화가 그 정도였다. 아무리 특별 엔딩만을 우선한다지만 쉽게 감수할 수 있는 변화는 아니었다. 공략에도 영향이 올 정도의 변화였으니까.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각인을 거절해야 하나?’

하지만 페널티가 어떤 것일지 짐작하기 어려워 고민은 자꾸만 길어졌다. 선실 밖에서는 데본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했다. 황태자인 그를 오래 세워 둘 수는 없었다.

‘……받지 말자.’

애리얼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고민 끝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황실의 각인은 함부로 받아 들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물건이었다. 안 그래도 편입의 추천인이 황태자로 바뀐 상황이었다. 각인은 그 자체로 정치적 파장도 가지고 있는, 긁어 부스럼이 될 과한 선물이며, 엔딩에까지 큰 변화를 가져올 선물이다.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받지 않는 것이 옳았다.

페널티를 각오한 애리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선실을 나왔을 때, 마침 문 쪽을 바라보던 데본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미 애리얼의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웃음기가 조금 죽은 얼굴이었다.

애리얼은 그에게로 다가가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이라 받을 수 없습니다.”

“응, 알았어.”

데본시아는 순순했다. 그는 반지 케이스를 닫아 다시 겉옷의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더니 돌연 빈손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제 앞으로 뻗어진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묘한 흐름이 느껴졌다. 형체 없는 물길이 흐르는 감각.

마력이었다.

비어 있는 그의 손바닥 위로 마력이 모이고 있었다. 점점 크기를 부풀려 모인 마력은 단단하게 응고되며 어떤 물체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질감의 하얀 밍크지, 광택이 나는 푸른색 리본, 녹색의 줄기 끝에 피어난 다섯 장의 잎으로 이루어진 희고 푸른 꽃.

정성스럽게 만든 델피니움 꽃다발이 그의 손에 들렸다.

애리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데본시아는 지금 조화도 아닌 생화, 즉 생물을 소환한 것이었다. 그것도 다발로.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압도적인 능력 앞에 순수하게 감탄이 났다.

고난도 마법으로 유명한 순간 이동에 비견되거나 때로는 더 정교한 마력의 제어를 요구한다고 평가받는 것이 소환 마법이었다. 그중에서도 생물의 소환은 극도의 섬세함과 극한의 균형 감각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틀 없이 끼워서 맞춘 500피스 이상의 퍼즐을 세찬 바람이 부는 외나무다리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옮기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 어려운 마법으로 소환한 것이 꽃다발이라니…….’

애리얼은 놀란 것과 별개로 어리둥절해졌다.

“전하, 갑자기 꽃다발은 웬 건가요?”

“선물.”

“각인의 대신으로요?”

“응. 네가 나에게 줬던 것처럼 여름 정원의 꽃으로 만들었어.”

그제야 애리얼은 이 익숙한 꽃을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렸다. 흰색과 푸른색의 꽃잎. 여름 정원에서 그에게 어울리는 꽃을 꺾을 때 백합의 옆으로 보이던 작고 앙증맞은 델피니움.

“이건 받아 줄래?”

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그가 내민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이것까지는 거부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내민 선물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고, 또 거절할 만큼 부담스러운 물건도 아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옅은 향기가 풍기는 델피니움 꽃다발을 들고서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한 미소였으나 확연한 기쁨을 나타냈다.

데본시아는 금방이라도 옅어져 사라질 듯한 그녀의 미소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우우우웅-

휴대폰이 또 한 번 진동했다.

애리얼은 이번 진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시스템이 기적적으로 정상화되었기를, 그래서 제대로 호감도 상승 알림이 온 것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

데본시아는 배가 섬을 떠나 호수의 건너편 뭍에 닿을 때까지 애리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별 대화는 없었다. 그는 그저 애리얼의 옆에 머무르는 데 만족하는 눈치였다.

희한하게도 최근의 데본시아는 늘 이런 느낌이었다. 애리얼의 곁에 있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은, 묘한 애틋함.

이러한 그의 태도는 애리얼이 브레이슬릿을 용건으로 그의 침실을 찾아갔던 날부터 시작되었다. 저조한 몸 상태로 애리얼의 어깨에 기대 오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꾸만 애리얼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 설령 대화가 부재하더라도 그는 지루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운 듯이.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왜 이런 변화를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추측조차 어려웠다.

뭍을 향해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가던 배가 어느덧 선착장 앞에 멈추었다.

그렇게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로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여 계단을 내리자 데본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애리얼을 배웅했다.

“또 보자.”

“네. 후학기에 뵙겠습니다. 전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애리얼은 그를 돌아보며 예를 갖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선착장과 연결된 계단을 내려갔다.

데본시아는 갑판에 선 채로 떠나는 애리얼의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그녀를 태운 클래식 세단이 선착장을 빠져나가 작게 점처럼 멀어졌다. 그때까지도 그는 배 위에 있었다.

그의 시선을 뒤로한 채 황실의 세단은 흔들림도 없이 빠르게 나아갔다.

델피니움 꽃다발을 안고서 상석에 앉은 애리얼은 긴장된 눈으로 슬쩍 운전석을 훑었다. 파티션으로 앞뒤 좌석이 분리된 차인지라 중간의 작은 창문으로 운전기사의 어깨와 핸들을 쥔 손이 보였다. 뒷좌석의 눈길을 느낀 운전사가 슬그머니 룸 미러를 보았다.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애리얼은 얼른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는 척했다.

‘차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긴 어렵겠어.’

이 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조건 데본시아에게 보고가 갈 것이다. 배 위에서 울렸던 진동의 정체가 궁금해도 섣불리 휴대폰을 꺼내 들 순 없었다. 애리얼은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차창 너머로 지나치는 풍경을 응시했다.

미세한 진동을 내며 나아가는 차가 요람처럼 안락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나온 탓에 애리얼은 상당히 졸렸다. 부드러운 시트와 탁월한 승차감이 그녀의 졸음에 박차를 가했다.

백작저까지는 다섯 시간여를 달려야 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었기에 애리얼은 쏟아지는 잠에 저항하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약한 꽃 향이 났다. 품에 안은 델피니움의 향기였다.

그 향취 때문에 꿈속에서 데본시아가 나올 것만 같았다.

***

다섯 시간을 이동하는 동안 애리얼은 깊은 잠과 선잠을 오갔다. 그 탓에 그녀는 꽤 피로한 상태로 백작저에 도착했다. 황실의 세단은 애리얼을 내려 주고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

애리얼은 오른손으로 델피니움 꽃다발을 안고 왼손에는 가방을 든 채 저택에 귀환했다.

불시에 연락도 없이 돌아온 터라 백작저는 조금 썰렁한 상태였다. 애리얼을 마중 나온 인원은 하녀장과 카논뿐이었다. 카논이 한걸음에 달려와 꽃다발과 가방을 받아 들었다.

백작과 집사장은 일이 있어 외출한 터라 저택에 없었다.

하녀장은 심혈을 기울여 백작의 부재에 관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둥, 알았다면 백작이 일도 팽개치고 왔을 거라는 둥. 그녀는 마중하러 오지 않은 백작을 열심히 대변했다. 혹시라도 애리얼이 백작의 부재에 실망했을까 봐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애리얼은 연신 눈치를 보는 하녀장에게 괜찮다며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제야 하녀장은 안심한 표정을 했다.

장시간의 이동으로 피로에 젖은 애리얼은 곧장 제 방으로 올라갔다. 떠났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방이 그녀를 반겼다. 청록색 벽지, 마호가니 가구, 하얀 시트의 침대, 하얀 커튼. 편안한 분위기가 몸을 감쌌다. 애리얼은 온수에 들어간 듯 노곤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집에 온 거 같아.”

“집이니까요.”

카논은 왜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는 투였다.

빙의와 같은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애리얼은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오랜 승차로 피로감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유능한 전담 하녀인 카논은 제 주인의 상태를 기민하게 파악했다.

“목욕물을 받아 둘게요. 십오 분 후에 욕실로 오시면 돼요.”

“고마워.”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아가씨는 푹 쉬기만 하세요.”

“응.”

애리얼이 웃으며 대답하자 카논도 약간의 미소를 짓고는 방을 나섰다.

카논이 짐을 정리하고 목욕물을 받아 주는 사이 드디어 홀로 된 애리얼은 곧장 휴대폰을 꺼냈다.

『두 번째 분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떠오른 알림을 보고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배 위에서 울렸던 두 번의 알림은 모두 분기에 관한 것이었다.

애리얼은 시스템 창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기가 덜컥 겁이 났다. 첫 번째 분기가 가져온 파장이 컸기에, 그녀에게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다시금 눈을 뜨고 화면을 마주했다.

『황태자의 선물(황실의 각인)을 거절하였습니다.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페널티 - 후학기 중 위험 상황(사망 위험)에 1회 강제 노출 됩니다. 1회 진동 알림 후 상황이 발생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