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위험. 사망.
‘죽는다고?’
사망이라는 단어가 몽롱하던 정신을 세차게 후려쳤다.
애리얼이 지금까지 평탄하게 지내 온 것은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악천후 속에 내던져진 손마디만 한 보석을 찾느라 밤새 비를 맞은 적도 있고, 아카데미의 낡은 별관에 들어갔다가 결계 부작용으로 기절한 적도 있다. 다치고 아팠던 적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사망 가능성을 선고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각인을 받았어야 했어!’
애리얼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 정도의 페널티일 줄 알았다면 거부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온 뇌리에 후회라는 말이 넘실거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어두워진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애리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진정하려는 듯 느리고 깊은 호흡이었다.
‘일단 무조건 죽는 건 아닐 거야. 위험도가 그렇다는 거겠지.’
시스템 창을 바라보는 두 눈에 냉정함이 돌아왔다. 애리얼은 자신에게 내려진 페널티를 차분하게 읽어 내렸다.
『*페널티 - 후학기 중 위험 상황(사망 위험)에 1회 강제 노출 됩니다. 1회 진동 알림 후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부터가 아닌 후학기에 발생한다는 점. 더불어 1회 진동으로 사전 예고가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 대비할 시간은 있어.”
애리얼은 스스로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곧장 대책을 강구했다.
그녀는 우선 스카이라에게 따로 설정해 둔 접근 알림부터 껐다. 당분간은 접근 알림이 없는 게 나았다. 진동에 의한 사전 예고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공략도 공략이지만 사망 위험을 벗어나는 게 중요해.’
하지만 휴대폰이 예고한 위험 상황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대비할 방향을 특정하기도 어려웠다. 대강으로나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는 게 필요했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서랍에 넣고서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일어날 수 있는 사망 위험 상황
1. 단순 사고 - 물에 빠지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
→1회 진동으로 사전 알림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확률이 낮음.
마력 연마를 통한 상시 방어술 전개로 어느 정도 대비 가능.
2. 재해 - 폭발, 화재 또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휘말려 사망.
→가능성 있음.
역시나 마력 연마를 통한 상시 방어술 전개로 어느 정도 대비 가능.
3. 병 - 급성 질환이나 불치병으로 사망.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나, 1번과 같은 이유로 확률이 낮음.
대비 어려움. 의술로는 한계가 있으나 마법 치료로 살 수 있을지도?
4. 암살이나 살인 청부 - 누군가의 물리력에 의해 사망.
→가능성 있음. 다만 황립 아카데미라는 치안이 좋은 환경과 주어진 특례로 보아 실제로 암살이 일어날 확률은 크지 않음.
이것 역시 마력 연마를 통한 상시 방어술 전개로 대비 가능함. 다만 상대가 능숙한 암살자나 용병인 경우 어지간한 수준의 방어술로는 택도 없음.
5. 기타 다양한 가능성…….」
애리얼이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이 정도였다. 모아 보면 모든 대책은 마력을 연마하여 방어술을 두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앞으로의 방향성이 정해졌다.
‘상황이 발생하는 건 후학기. 남은 하계 방학 동안 마력과 마법을 최대한 익혀서 적당한 방어술을 두를 수 있는 수준은 돼야 해.’
애리얼은 차분하게 할 일을 정리했다.
***
카논이 목욕을 마친 애리얼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말려 주었다. 애리얼은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긴 채 테이블의 화병에 꽂힌 델피니움을 바라보았다. 하얀 도자기 화병이 델피니움의 푸른 꽃잎과 잘 어울렸다.
애리얼의 시선이 줄곧 델피니움에 가 있음을 눈치챈 카논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꽃다발을 주신 분 상당히 묘한 취미를 가지셨네요.”
“꽃다발이면 평범한 편 아냐?”
“무슨 꽃을 써서 만들었냐가 중요한 거죠. 왜, 제국에선 꽃을 선물할 때 그 꽃말을 꽤 중요시하잖아요.”
“그랬어? 몰랐네…….”
애리얼은 전혀 몰랐던 것을 들은 얼굴로 반문했다. 사교계라 불리는 귀족들의 파티에 가 본 적도 없고 사적인 교류도 거의 없었으니, 그런 쪽으론 심각하게 문외한이었다.
‘그러고 보니 백합의 꽃말은 뭐였더라?’
애리얼은 데본시아에게 꽃을 건넸던 일이 떠올라 문득 궁금해졌다. 꽃말을 중요시하며 꽃을 선물하는 문화를 그가 모를 리는 없는데, 애리얼이 건넨 백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또 그는 무슨 생각으로 델피니움을 선물한 걸까.
“델피니움의 꽃말은 뭐야?”
“좀 희한해요. 일반적으론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의 의미로 쓰이는데, ‘당신은 왜 나를 싫어하나요’라는 의미도 있거든요.”
“왜 나를 싫어하나요……. 그게 꽃말이야?”
“희한하죠? 그런 꽃말을 지닌 꽃을 선물하다니……. 제국의 관습상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의미의 꽃말을 가진 꽃은 선물하기를 극도로 지양하는데 말이에요.”
카논이 말하자 애리얼은 다소 핏기가 가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꽃말을 중시하는 제국의 선물 문화 때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엽게 보였던 델피니움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파란 꽃잎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저 파란 꽃잎을 보고 있으니 데본시아가 떠올랐다. 왜 나를 싫어해, 하고 데본시아가 묻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델피니움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졌다.
“화병은 중앙 응접실에 놔 줄래?”
“방에 안 두시고요?”
“응. 모두와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애리얼은 적당히 둘러댔다.
카논은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애리얼의 긴 흑발을 꼼꼼히 말려 준 뒤 화병을 들고서 방을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되자 애리얼은 지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도 꺼릴 만큼 꽃말을 중시하는 게 제국의 꽃 선물 문화인데, 데본시아가 모르고 델피니움을 선물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애리얼에게 향한 일종의 질문 혹은 원망.
“원망이라니. 몇 번 본 적도 없으면서.”
오히려 원망하고 싶은 쪽은 애리얼이었다. 데본시아로 인해 촉발되는 위협들에 휩쓸리고 피해를 보는 그녀야말로 그를 원망해야 했다. 그의 행동은 공략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정도를 넘어 큰 파장을 남기고 있었다.
‘데본시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구체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데본시아는 어느 순간부터 스카이라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고 애리얼을 대했다. 그가 애리얼에게 보이는 호의는 더 이상 스카이라를 도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행동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있는 피서지로 향했었다. 그러나 심연을 마주칠 것만 같은 기분을 맛봤고, 예기치 못한 왕족의 방문을 핑계로 그에게서 도망쳤다.
데본시아는 헤어지는 그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큰 동요를 안겨 주었다.
애리얼의 머릿속에 아까 거절했던 백금의 반지가 떠올랐다. 그 중앙에 새겨진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색 독수리가 떠올랐다. 황자와 혼담이 오가는 왕녀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반지. 황실의 각인. 황실의 일원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인 귀중품.
‘받았다면 엔딩이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겐 엔딩의 변화 대신 목숨의 위협을 받는 페널티만 남았다.
다만 애리얼은 아직도 각인을 받은 이후를 상상하는 게 무서울 정도로 각인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그녀는 프러포즈라도 하듯이 황실의 각인을 건네던 데본시아에게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은 공포를 불러왔고, 공포의 근원은 그녀가 모르는 심연과 맞닿아 있었다.
그녀가 도망쳤던 심연, 그 밑바닥에 잠긴 진실.
감히 확인하기 두려운 데본시아의 진심.
***
이른 아침부터 하늘이 어두웠다. 정오쯤 되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배수로가 잘되어 있지 않은 곳은 금방 물에 잠길 것 같았다.
애리얼은 마력학 서적을 보다가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억센 빗방울이 유리창을 깰 듯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호수에도 비가 오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휴대폰을 들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호수에도 비가 내리는 걸까. 황족 형제는 나란히 황성으로 돌아가 있었다.
의문이 이는 행적이었다.
악천후 탓에 피서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유라면 이른 귀환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장에는 왕족이 와 있었다. 제국과 왕족 간의 중요사를 논하는 자리로 쓰인 것이다. 애리얼이 이르게 별장을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왕국과의 약혼 제안이 벌써 마무리된 건가?’
하지만 애리얼이 떠난 게 바로 어제였다. 고작 하루 만에 왕국과의 일이 전부 마무리되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저께 저녁만 해도 스카이라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더 갈 사안일 터였다. 그러니 장소를 옮겨서 혼담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아무래도 비 오는 별장보다는 황성이 제안을 주고받기에 훨씬 좋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황성에서 하지 않은 거지?’
그 의문을 이제야 가진 순간, 애리얼은 소름이 끼쳤다.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일까. 왕족이 황태자가 머무는 개인 별장에 방문한 일을…….
추적추적 비 오는 소리가 이명처럼 귀를 울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음부터 데본시아가 짜 놓은 판이었던 거다. 별장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스카이라의 혼담 자체가.
데본시아는 필요한 이를 모두 모을 수 있는 별장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일부러 선택했다. 그래야 모두로 하여금 별장이라는 피서지의 특성 덕에 해이해진 정신 상태로 마주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답에 도달한 순간 애리얼은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이를 악물며 간신히 휴대폰을 붙들었다.
애리얼은 이제야 데본시아의 의도를 읽어 냈다.
‘데본시아는 나를…… 아주 좋아하거나 혹은 아주 싫어하는 거야.’
그는 스카이라 때문에 애리얼을 신경 쓴 게 아니었다. 그 반대로 애리얼 때문에 스카이라를 신경 쓴 거였다. 그 방증으로 최근의 그는 스카이라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애리얼과 둘만 있는 시간을 점점 늘리려 했다. 그래서 그는 스카이라의 이름이 올라간 편입 추천인 자리도 빼앗았다. 스카이라와 왕녀의 약혼을 추진했다. 방해가 되는 스카이라는 혼담으로 치워 버릴 생각인 거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애리얼의 고립이었다.
추천인의 입장도 아니게 된 스카이라는 이미 그녀와의 접점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거기에 약혼까지 진행되면 관계가 아예 단절될 가능성이 컸다. 반대로 추천인 자리를 가져간 데본시아와의 접점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나마 렉시우스가 선배라는 형태로 애리얼에게 남아 있기는 하나 오래갈 인연은 아니었다. 까딱하면 그녀의 인간관계는 데본시아 외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걸 위해서 그는 황실의 각인까지 넘기려 했다. 받았다면 그길로 애리얼은 렉시우스와의 관계도 끊기고 말았을 거였다. 대공가는 황실에 우호적인 세력이니까. 각인까지 주면서 황실의 사람으로 낙인찍어 둔 이를 대공자인 렉시우스가 건드리진 않을 터였다.
애리얼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제의 분기는 최악의 양자택일이었다. 각인을 받았다면 후학기에 애리얼은 완전한 고립 상태가 되었을 거고, 공략의 길도 요원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거절한 결과 고립은 면했으나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애리얼은 억하심정이 들었다. 책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