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87)화 (87/264)

데본시아가 의도하는 것이 애리얼의 고립이라면, 애리얼은 그에 맞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애리얼은 스스로 성장할 필요가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력의 성장. 마법의 체득. 그러려면 당장 혼란과 충격으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억지로라도 읽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이론보다도 중요한 건 실전에서의 활용…….’

그것도 당장 방어술을 펼칠 수 있는 수준의 활용이어야 했다. 문제는 애리얼이 실전에 특출나게 약하다는 점이다. 마력은 가장 기초적인 수준으로밖에 다루지 못했고, 마법으로의 응용은 아예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지식의 수준만 앞서갔다. 방어술을 어떻게 펼치는지 이론은 아는데, 활용이 안 됐다.

마력학 서적을 앞에 둔 채 애리얼은 손톱을 깨물었다. 고뇌에 빠진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과연 홀로 연습한다고 이게 될까. 애리얼은 회의적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하루 몇 시간씩 실전 연습을 했었는데 결과는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데본시아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마력을 나누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데본시아였다니, 애리얼의 목소리에 탄식이 섞여 나왔다.

“너무 빨리 배우지 마, 애리얼.”

데본시아가 뱉었던 그때의 말이 떠올랐다. 오싹하게 소름이 끼쳤다.

“마법 같은 거 하나도 못 써도 돼.”

그녀를 고립시키기 위해 했던 말인가 싶은 그 말들. 그때의 대화가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애리얼의 머릿속에서는 오롯하게 한 가지 생각만 강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법을 익혀야 한다.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애리얼은 책을 덮었다. 이미 이론은 어느 정도 알고, 턱없이 부족한 건 실전이었다. 방을 나서는 애리얼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력은 불규칙한 흐름을 지닌 응축된 에너지였다. 활용이 능숙하지 않다면 외부 환경과 충돌하여 스파크가 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력의 실습은 야외에서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날씨가 궂은 탓에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복도에는 창문을 때리는 비의 소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애리얼은 마법의 연습장으로 활용할 적당한 공간을 찾아 헤맸다. 이왕이면 넓고, 물건이 별로 없고, 조금 부수어져도 괜찮은 곳.

삼십 분을 돌아다닌 끝에 애리얼은 오래 버려둔 창고 방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가구가 별로 없는 방은 먼지 냄새가 났다. 창문도 몇 개 없고 청소도 별로 하지 않는 듯했다. 한구석에는 쓰지 않는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처치 곤란한 물건들을 쌓아 둔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연습용으로 써도 문제없어 보였다.

애리얼은 하녀장에게 이곳을 쓰겠다고 미리 전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방 밖에는 카논과 함께 하녀 두 명이 대기했다.

가구를 밀어 놓은 방의 한중간에 선 애리얼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방어술은 일정한 양의 마력을 지속해서 방출하며 몸을 감싸는 것이 기초 이론이었다. 방출한 마력이 몸의 주변을 벗어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처음은 소량의 마력을 방출해 몸을 감싸는 것부터.”

애리얼은 말과 동시에 마력의 방출을 시작했다. 곧게 편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흐르듯 마력이 흘러넘쳤다. 언제나 방출까지는 쉬웠다. 중요한 건 방출한 마력을 얼마나 제 몸 주변에 붙들어 둘 수 있느냐다.

서적에 따르면 마력의 유지는 방출과 차단 사이의 균형을 잡는 느낌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별로 와닿지 않는 설명이었다.

‘방출이 열림이고 차단이 닫힘이라면 유지는 반개폐의 형태인 건가?’

애리얼은 대강 비유를 통해 그 느낌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렇게 애리얼은 방출하는 마력의 양을 조금 줄였다. 그러나 몸 주변에 마력이 머무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예 차단을 해 보면 어떨까. 그랬더니 아주 잠깐 마력이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다가 뚝 그쳤다. 마력이 완전히 닫혀 몸 주변이 허해졌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한데…….”

중얼거리며 애리얼은 다시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고는 다시 조금씩 마력을 줄여 가다가 차단.

이번에는 몸 주변으로 마력이 몽글몽글 뭉치는 감각이 확연하게 들었다.

“이거네.”

애리얼은 커다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출이 마력을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거라면 차단은 마력을 빨아들이는 거였다. 그러니 그 중간으로 균형을 맞추면 마력은 흘러 나가지도 빨려 들지도 않고 몸을 감싸며 유지된다. 방출과 차단을 만유인력처럼 작용하게 하는 것이다.

감각을 깨친 애리얼은 그대로 방출과 차단의 적절한 균형을 잡는 데 몰두했다.

한 시간.

또 한 시간.

다시 또 한 시간.

재차 반복해서 한 시간 더.

총 네 시간을 쉼 없이 방출과 차단을 반복하던 애리얼은 그대로 무너졌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색색 가쁜 숨을 내쉬는 모습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애리얼이 불규칙한 호흡 사이로 한탄하듯 내뱉었다.

네 시간을 연습했으나 마력의 유지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몽글거리며 뭉치는 감각만 몇 번 반복되었을 뿐.

이제는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연습도 더 할 수 없었다.

한계에 부딪힌 애리얼은 자신을 가르쳐 줄 선생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

“대공저에 방문 요청을 넣어 달라?”

“네. 미리 대공자 저하와 이야기를 나눈 사안이니 문제없을 거예요.”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부탁을 꺼냈다. 일을 마치고 귀환한 백작과의 독대였다. 가벼운 안부 인사에 이어 짤막한 일상 이야기 끝에 나온 본제.

“아카데미서 교양 수업을 들었을 때, 대공자 저하께서 대공저에 오지 않겠냐고 초대해 주셨어요.”

“그래. 일전에 한 약속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 되겠니?”

“네.”

“알았다. 어디 연락이 가능한지 알아보마.”

“감사합니다.”

애리얼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을 나간 백작이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십 분여가 지났을 즈음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백작을,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마주했다.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공저에서도 알고 있더구나. 대공비 전하께서 직접 나와 통화하셨다. 바로 차량을 보내겠다고 하시더라.”

“지금 당장요?”

“아니. 그건 네가 곤란할 것 같아서 내일 보내 달라고 청했다.”

“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일 오전 열한 시쯤 차가 오기로 했으니, 너도 그만 방으로 올라가 보렴. 벌써 시간이 꽤 되었구나.”

“네, 어머니.”

애리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백작에게 묵례했다. 그녀를 향해 백작은 짧게 인사를 던졌다.

“잘 자렴.”

꽤 다정한 어투의 저녁 인사였다.

애리얼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잠깐 본 백작의 얼굴에 미세한 웃음기가 어린 것도 같았다. 어색하지만, 기쁜 듯한 찰나의 표정.

“잘못 봤나?”

위층으로 오르던 애리얼이 확신 없이 중얼거렸다. 늘 미온적이던 백작이 부탁만 하면 적극적으로 나오는 게 놀라워 헛것을 본 걸 수도 있었다. 애리얼은 그렇게 치부했다.

어차피 떠나게 될 세계였다. 이곳에선 유일한 가족이라지만 백작에게 정을 붙여서 좋을 게 없었다.

***

다음 날, 오전 열한 시.

대공저의 하얀 클래식 세단이 백작저의 정문으로 진입했다. 맑게 갠 하늘이 세단의 새하얀 보닛을 푸른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보닛 끄트머리에 세워진 자그마한 흰색 사자 장식이 햇살을 받아 광택을 냈다. 대공가의 상징인 백사자였다.

미리 외출 준비를 끝낸 애리얼은 양산을 들고서 곧장 세단으로 향했다. 카논이 양손 가득 짐을 들고서 애리얼을 뒤따랐다. 전부 대공저에 보낼 선물이었다.

카논이 트렁크로 가서 짐을 싣는 동안 애리얼은 상석에 앉았다. 애리얼은 교복과 비슷한 오버올 원피스 차림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렉시우스에게 과외를 받던 상황을 고려해 되도록 유사한 옷을 골랐다. 백작 공녀로서의 체면은 지키면서 마법의 실전 연습을 하러 간다는 본분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나저나 렉스 선배가 흔쾌히 어울려 줄까?’

교양 수업에서 그가 했던 초대는 그냥 미술품을 보러 오라는 거였다.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만큼 애리얼의 방문 요청은 흔쾌히 받아들여졌으나 실전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말에는 반응이 또 다를 것이다. 그걸 성사시키기 위해 선물을 잔뜩 준비해 가고 있긴 하지만…….

고민이 깊어지는 동안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카논이 동승했다.

황성과 달리 대공저에는 사용인을 대동할 수 있었다. 애리얼은 앞좌석과 이어진 작은 창으로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속이 조금 느슨해졌다. 애리얼은 카논의 동행에 내심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

대공저까지는 두 시간이 걸렸다.

황성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세워진 대공저는 지역 명물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애리얼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푸르른 벌판, 깎아지른 암벽 위에 세워진 거대한 성채. 군청색의 높은 지붕 아래 회백색의 벽이 암벽과 비슷한 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걱정도 잊고 압도적인 풍광에 홀렸다.

그러는 사이 대공저의 세단은 암벽을 오르는 높다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운전사가 먼저 내려 상석의 문을 열자 애리얼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의 앞에는 오르다 죽을지도 모를 만큼 까마득히 많은 회백색의 계단이 놓여 있었다. 오르는 데 족히 두 시간은 넘게 걸릴 높이였다.

애리얼은 설마 하는 불길함을 느끼고서 운전사에게 물었다.

“여기로 걸어서 가?”

“예. 그렇습니다.”

운전사의 대답에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던 카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물이랍시고 잔뜩 가져와 날라야 할 상자들이 트렁크에 한가득했다.

카논의 안색을 살피던 애리얼이 운전사를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짐도 전부 들고 올라야 해?”

“아뇨. 짐은 도르래로 옮깁니다.”

그제야 카논이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운전사는 트렁크로 가서 짐을 옮기는 것을 돕더니 계단의 한쪽에 놓인 쇠판으로 안내했다. 카논은 운전사와 함께 사각형의 쇠판에 짐을 쌓아 올리고는 사슬로 단단히 묶었다. 운전사가 도르래 옆에 비치된 종을 울리자 도르래가 감겨 올라갔다.

애리얼은 그 광경을 보곤 궁금증이 일어 질문했다.

“도르래로 사람을 옮길 순 없어?”

“안전장치가 부실해서 되도록 피하고 있습니다. 포로나 심문할 죄인을 호송할 때는 쓰기도 합니다.”

운전사의 대답에 애리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계단이 힘들 것 같으니 도르래에 타고 싶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운전기사를 선두로 두고 애리얼은 카논과 함께 까마득한 계단 앞에 섰다. 고될 것이 분명한 눈앞의 풍경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마법 실력이 우월했다면 순간 이동을 했겠으나, 안타깝게도 애리얼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잠자코 등반할 수밖에.

애리얼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계단을 밟았다.

등 뒤로 여름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다행히 습도가 낮은 지역이라 후텁지근하지는 않았으나 그늘이 없어 더운 건 매한가지였다. 적당한 속도로 나아가던 애리얼의 걸음은 고작 오 분 만에 느려지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떨어지는 체력을 지닌 애리얼에게 한여름의 등반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애리얼은 방어술을 익혀야 했고, 그러려면 렉시우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애리얼은 척척 앞서 나가는 대공가 운전기사의 뒤를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그렇게 십오 분이 지나자 체력이 꽤 괜찮은 편인 카논의 걸음도 느려졌다. 애리얼은 거의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운전기사만이 처음과 똑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십 분이 더 지나자 애리얼은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조금만…… 천천히…….”

애리얼은 죽어 가는 소리를 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가파른 앞 계단을 짚는 그녀의 모습에 귀족 공녀로서의 체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뒤를 돌아본 운전사와 눈이 마주쳤으나 애리얼은 자세를 고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힘들어 곧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은 턱 끝까지 찼다. 거칠게 호흡을 몰아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돌았다. 다리가 휘청거렸고, 발목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사망 위험이라는 게…… 이거 아냐? 혹시 휴대폰에 진동이 왔는데 내가 못 들었나? 지금 곧 사망할 것 같은데…….’

예기치 못한 시련에 애리얼은 별 시답잖은 생각이 다 들었다. 초점을 잃어 가는 눈으로 고지를 응시했다.

보이는 것은 온통 계단, 계단, 계단…… 계단뿐!

계속 반복되는 똑같은 장면에 질린 건지 시야가 흐릿해졌다. 위를 보던 고개가 계단을 향해 힘없이 고꾸라졌다.

“공녀님!”

“아가씨!”

운전기사와 카논이 차례로 애리얼을 불렀다. 그러나 애리얼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야가 검게 잠기며 의식이 툭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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