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88)화 (88/264)

이마를 적시는 서늘한 기운에 애리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찬 수건을 얹어 주던 카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걸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구나.’

애리얼은 안도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응. 그런 거 같아.”

“다행이다…….”

카논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걱정과 원망이 반반 섞인 눈으로 애리얼을 보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앞으로 쓰러지시고, 의식도 없으시고……. 운전기사께서 빠르게 조처해 주시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요.”

“미안해.”

“정말이지…… 힘들면 말씀을 해 주세요.”

“힘들긴 하지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아가씨 몸 약하신 거 아시잖아요. 어린애들한테도 달리기로 지시는 분이.”

“그 애는 체력적으로 타고난 리리의 아이였잖아. 장차 육상의 재능을 꽃피울 아이에게 지는 건 괜찮아.”

“그래 봐야 아홉 살배기한테 진 건 변하지 않아요. 거기다가 리리는 저보다 체력이 조금 더 좋을 뿐이에요. 그런 리리의 아이가 체력적으로 크게 타고난 건 아닐 텐데요.”

“…….”

“아무튼, 조금 더 주무시다가 일어나세요. 링거를 놓긴 했지만 조금 더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일어나시면 물 많이 드시고요.”

“응……. 그런데 여긴 대공저야?”

애리얼이 훌륭한 명화가 그려진 아치형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대공저의 귀빈용 객실이에요.”

“그렇구나.”

애리얼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마에 얹혔던 수건이 떨어지고 오른손에 연결된 링거 줄이 흔들거렸다. 그에 카논이 사뭇 엄한 얼굴로 애리얼을 제지했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리려던 애리얼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더 누워 있으시래도요.”

“그래도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 인사는 드려야지. 이렇게 객실도 제공해 주신걸.”

“대공 전하께선 부재중이세요. 대공비 전하께선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누워 쉬시라는 말씀을 하셨고요.”

“벌써 대공비 전하와 만난 거야?”

“그럼요. 아가씨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 나오신 게 대공비 전하이신걸요. 그러니 그분 말씀을 따라 링거액을 다 비울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계세요.”

“……응. 일어나면 곧장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전해 드려 줘.”

“네. 그러니 아가씨는 조금 더 주무세요.”

진지하게 당부한 카논이 재차 애리얼을 눕히고 이마에 찬 수건을 얹었다. 그녀는 애리얼이 제대로 눈을 감는 걸 확인하고서야 객실을 나갔다.

카논의 당부대로 애리얼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생각보다 몸이 많이 지쳐 있었던 건지 눕자마자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애리얼은 남은 링거액을 확인했다. 팩에는 사분의 삼 정도의 양이 남아 있었다. 링거액은 느릿하게 한 방울씩 떨어졌다. 다 비우려면 한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한 시간이면 조금 기네.’

시간의 넉넉함을 인지하자 심신이 느긋해졌다. 포근한 시트에 파묻힌 애리얼의 정신은 깊은 잠 속으로 편안히 잠겼다.

***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첨예한 관찰자의 시선이었다. 강렬한 호기심이 닿아 오는 걸 느낀 애리얼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가 낯선 이의 얼굴을 담았다.

장미색을 닮은 진한 적발이 보였다.

“렉스 선배……?”

“우와악! 일어났다!”

어떤 인물이 큰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그 음성은 렉시우스의 것이라기엔 상당히 높고 경박했다. 상대가 놀라는 소리에 덩달아 놀란 애리얼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견습용 기사 제복을 입은 붉은 머리칼의 앳된 소년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렉시우스와 닮았으나 아이 같은 티가 물씬 나는 얼굴이 괴물이라도 본 듯 기겁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한 애리얼의 얼굴 역시 적잖이 기겁해 있었다. 커다래진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그러자 물러났던 소년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푸른색의 눈동자를 두어 번 끔뻑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 형이랑 아는 사이야? 형 애인이야?”

“아니에요. 아카데미 선후배 사이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형은 여자 후배 없어. 여자를 데려온 적도 없고. 여자 이름은 말도 꺼낸 적 없어.”

“…….”

“그, 그것도 너처럼 예쁜 사람은…….”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소년이 대뜸 삿대질을 해 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애리얼의 방문에 대해 미리 듣지 못해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이 잠든 방에 함부로 들어와 소리를 지르는 건 좀 아니긴 하지만. 뭐,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 많아 봐야 열둘이나 열셋 정도 돼 보이는 소년이었다. 애리얼은 대공가의 일원으로 보이는 소년을 향해 차분한 얼굴로 설명했다.

“허클리 백작가의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대공자 저하께 초대를 받아 오늘 대공저에 방문하였습니다. 사전에 일찍 말씀드리지 못하고 방문해 놀라게 해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누가 놀랐다고 그래! 나 안 놀랐거든?”

“……네.”

애리얼은 어쩐지 그의 반응이 전형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쉽게 동요하는 성격.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요란한 대답. 어딘지 당찬 무례함까지.

‘생긴 건 렉시우스랑 닮았는데 성격은 상당히 딴판이네.’

맹수 같은 렉시우스의 금색 눈동자와 달리 어딘가 순진한 구석이 있는 파란 눈도 특이하게 다가왔다. 애리얼은 호기심이 서린 얼굴로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동요한 소년은 왜 보냐며 버럭 소리를 지를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애리얼의 오른 손목에 꽂힌 링거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너…… 어디 아파?”

“계단을 오르다 기절했습니다.”

“계단? 설마 암벽에 있는 그거?”

“네.”

“그걸 오르다 기절했다고? 우리 가문에선 다섯 살만 돼도 다 오르는 건데?”

“제가 체력이 조금 없어서요.”

“체력이 조금 없는 수준이 아닌데? 완전 산송장 수준…….”

“우레우스! 이 개념 없는 것!”

누군가가 큰소리를 치며 객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붉은 드레스를 고상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온통 화가 난 얼굴로 들이닥쳤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흑발에 꽂은 나비 장식이 거친 움직임에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쳤다.

여인은 성이 나 치뜬 눈으로 소년의 뒷덜미를 휙 잡아챘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습니까!”

“모르는 이는 신원을 확인해 두는 게 대공저의 철칙…….”

“정식 손님한테까지 그러라는 소린 안 했습니다! 그것도 아파서 기절한 사람한테……!”

한창 잔소리로 열을 올리던 여인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여인의 파란 눈동자가 애리얼을 담고는 크게 요동쳤다.

애리얼은 소년을 보았을 때보다 두 배는 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여인은 곧장 일그러뜨렸던 인상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이어 소년을 놓고서 우아한 자세를 취했다. 한껏 올라갔던 목소리도 우아하게 가다듬었다.

“아, 그……. 편히 쉬게, 공녀.”

“……덕분에 많이 쉬어서 이제 괜찮습니다.”

애리얼은 눈치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와 고개부터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공비 전하. 허클리 백작가의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지 않아도 돼. 대공저에 있는 동안은 편하게…….”

“너 진짜 형 애인 아니야?”

소년은 또 눈치 없이 무례한 말을 던졌다. 대공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애리얼의 시선을 신경 써서 지켰던 체통을 곧장 팽개치고서 제 아들의 뒷덜미를 재차 잡았다.

“너, 나와!”

“어머니, 저 아직 쟤랑 얘기 안 끝났어요!”

“입 닫고, 얌전히 굴어!”

대공비는 아들의 옷깃을 억세게 쥐고서 방 밖으로 끌고 갔다. 이윽고 두 사람이 객실을 완전히 나가고, 문이 다소 거칠게 닫혔다.

쾅!

꽤 큰 소음이 울렸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더니 닫혔던 문이 슬쩍 다시 열렸다. 문 틈새로 대공비가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미안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편히 쉬렴, 애리얼.”

“네, 가,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애리얼은 얼떨떨해하며 겨우 인사를 전했다. 대공비는 눈웃음을 지은 뒤 문을 닫고 나갔다.

문밖에서는 다시 고성이 울렸다. 대공비가 무례했던 제 아들을 혼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애리얼은 모자가 사라진 문 쪽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까 나…… 자다가 일어났지?’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매무새를 확인했다. 입은 원피스는 조금 구겨진 상태긴 했지만 잠옷 바람보다는 나은 상태였다. 머리칼도 크게 헝클어지진 않았다. 애리얼은, 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바깥의 고성도 멈추고,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애리얼은 그제야 방금 마주쳤던 대공비와 렉시우스의 동생에게 생각이 미쳤다.

대공비는 생각 외로 권위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렉시우스가 위압감 넘치는 분위기를 가진 데 비해 그의 어머니인 대공비는 편안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이였다. 그리고 렉시우스의 동생으로 보이는 소년도, 다소 당황스럽긴 해도 싫은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렉스 선배는 어디 갔지? 여기 없나?’

문득 가장 중요한 인물이 부재함을 깨달았다.

애리얼은 그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대공저 북쪽 외곽(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진짜로 여기에 없네…….”

애리얼은 탄식했다. 렉시우스에게 부탁을 하려고 온 건데 정작 그가 없다니. 다시 방문일을 잡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싫었다. 그 끔찍한 계단을 또 오를 수는 없다. 상상만으로도 애리얼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오늘 안에 오긴 하겠지?”

그래야만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헛걸음한 거나 다름없었다.

난감한 상황에 당면한 애리얼은 머리를 싸맸다. 팔이 들어 올려지며 링거 줄이 당겨졌다. 옆에 세워 둔 수액걸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목에 걸린 줄이 팽팽해졌다. 애리얼은 뒤늦게 오른 손목을 확인했다. 빈 팩과 이어진 링거 호스로 피가 역류하고 있었다.

몸도 괜찮으니 슬슬 링거를 뽑아야 했다.

애리얼은 호출 벨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때마침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카논의 목소리였다.

“응. 들어와.”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익숙한 카논의 모습 뒤로 사람이 한 명 더 들어왔다. 대공가에 고용된 의사였다.

의사는 이제 움직여도 괜찮다는 진단을 내린 뒤 오른쪽 손목에 연결된 링거를 제거했다.

의사가 떠나자 애리얼은 침대에서 내려와 매무새를 재차 가다듬었다. 곧장 대공비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카논이 눈치 빠르게 따라붙어 애리얼의 머리칼을 깔끔히 정돈해 주었다.

“대공비 전하를 뵈러 가실 거죠?”

“응. 미리 대면 요청을 드리고 싶은데, 누구에게 말하면 돼?”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방금 뵙고 왔습니다. 바로 안내할게요.”

“고마워.”

애리얼은 카논을 따라 객실을 나섰다.

명화가 잔뜩 걸린 복도가 그들을 맞았다. 하얀 벽면과 모래색의 대리석 바닥이 예술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과연 렉시우스가 말한 대로였다. 대공저의 그림들은 아카데미의 전시실에 있는 것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다.

애리얼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카논의 뒤를 따랐다. 신기한 그림들이 많아 절로 눈이 돌아갔다. 예술적 조예가 깊은 건 전혀 아니지만 신화 속 장면을 그린 듯한 화려한 명화들을 보는 게 즐거웠다. 그런 의미에서 대공저에는 애리얼의 취향과 맞는 작품들이 가득했다. 오늘의 목적은 그림 감상이 아니었으나 언젠가 그 이유로 다시 오고 싶다…… 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살인적인 높이의 암벽 계단을 떠올리자 애리얼은 방문 욕구가 싹 가셨다.

‘그냥 지금 지나가면서 많이 봐 두자.’

애리얼은 벽면에 걸린 명화들을 빠르게 훑었다.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대공저에 두 번 오지 않을 수 있을까 고심했다.

‘렉시우스에게 백작저를 방문해 달라고 요청해야겠어. 어떻게든 선물을 잔뜩 주면서 빌든가 해서……. 안 그러면 답이 없어. 아무리 배우려는 입장이지만 여길 주기적으로 오는 건 도무지…….’

애리얼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 앞서가던 카논이 어느덧 속도를 늦췄다. 양옆으로 계단을 둔 커다란 더블 도어의 앞이었다. 문 앞을 지키던 집사가 애리얼을 보고서 고개를 숙였다.

“대공비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말에 카논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다녀올게.”

애리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카논이 완전히 뒤로 빠졌다.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응접실의 더블 도어를 열었다.

독대의 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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