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이 거대한 원형 응접실로 들어섰다. 정면으로 커다란 대리석 벽난로가 보였다. 그 앞에 놓인 검붉은 체스터필드 소파에 대공비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애리얼을 맞았다.
“여기 앉으렴.”
그녀가 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애리얼은 꾸벅 묵례를 한 뒤 착석했다. 집사가 로즈메리티를 따라서 애리얼의 앞에 놓았다.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오른 손목에 링거 자국을 감싼 밴드가 드러났다.
대공비가 웃음기를 거두고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애리얼, 더 쉬지 않고……. 몸은 괜찮니?”
“네, 덕분에 좋아졌어요. 초대해 주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무슨 그런 소릴! 아들이 초대한 손님을 신경 쓰지 못한 내 잘못이란다. 애리얼의 몸이 약한 걸 알았다면 미리 사람을 보냈을 텐데, 미안하구나.”
“아녜요.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우인걸요. 계단에서의 일은 제 불찰입니다.”
“어머, 애리얼! 책임 의식도 강하고 예의도 바르고, 왜 이리 착하니?”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대공비는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애리얼은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대공비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기대감이 서린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었다.
“그런데…… 애리얼은 우리 아들하고는 무슨 사이일까?”
그 질문에 애리얼은 하마터면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놀라 굳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애써 태연함을 유지한 애리얼은 정석적인 대답을 골랐다.
“좋은 선후배 사이입니다. 아카데미에서 대공자 저하께 크게 신세를 졌어요. 저하께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렉시우스가 좋은 선배라고?”
“네. 제 공부를 봐주시고 부족한 부분을 끌어 주셨어요. 그 감사를 전하기 위해 오늘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 그건 잘 보관해 두었단다. 고마워. 백작이 신경 써서 보낸 모양이던데, 감사의 서신을 따로 보낼게.”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렉시우스와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혹시 렉시우스가 애리얼한테 잘 대해 주니?”
“네. 무척 잘해 주세요. 아카데미에서 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 애가……. 과연, 그렇구나.”
대공비는 모호한 소리를 흘리며 저 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연푸른색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애리얼을 응시했다.
“애리얼, 혹시 렉시우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도 될까?”
“대공자 저하는 저에게 좋은 선배이자 스승이시기도 하고, 여러모로 본받을 점이 많은 고마운 분이세요. 언제나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 렉시우스하고 약혼하지 않을래?”
대공비가 태연하게 권유했다. 마치 차를 더 줄까 묻듯이.
애리얼은 온몸을 흠칫 떨었다. 만약 찻잔을 들고 있었다면 이번 질문에 기어코 깨트리고 말았을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혼란에 빠진 애리얼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렉시우스는 3대 공작가보다도 권력이 앞선다는 대공가의 장남이었다. 어찌 보면 황자인 스카이라와 비슷한 수준의 지위다. 그러니 그 역시 스카이라처럼 왕국의 왕녀나 공작가 또는 명망 있는 후작가의 여식과 맺어지는 게 옳았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와의 약혼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그건 공략에 있어서 최악인 선택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스카이라의 황자비 권유를 피해 왔는데, 미래의 대공비 자리 역시 극구 사양이다.
“저, 저는…… 고작 백작 가문의 여식입니다. 저하께서는 저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신 훌륭한 분과 맺어지셔야 하는걸요.”
“아냐, 애리얼도 나와 같은 귀족인걸? 이보다 훌륭한 지위가 어디 있겠니!”
“그렇지만 저는 사교계 경험도 없고 아카데미의 수업도 겨우 따라가는 데다 예절도 완벽하지 못해요. 저하께 비해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 애리얼은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이야. 사실 예의는 렉시우스가 없지. 사교 예절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녀석인걸.”
“…….”
“렉시우스는 성격이 아주 모난 녀석이라 애리얼이 아니면 평생 혼자 살 거야. 그러니 제발 불쌍히 여기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렴.”
대공비는 제 아들인 렉시우스를 까 내리면서까지 애리얼을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렉시우스와의 약혼을 제안했다.
애리얼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빈말로라도 렉시우스의 성격을 좋다 포장할 수는 없으나, 그는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외관도 훌륭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는 렉시우스를 흠모하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대공비가 말하는 것과 달리 그의 약혼녀가 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은 줄지어 있을 것이다. 구태여 애리얼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어째서 초면인 제게 이런 제안을 주시나요?”
“렉시우스가 여자애와 접점이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제가…… 처음이라고요?”
“응. 이야기를 꺼낸 것도, 따로 이름을 말한 것도, 대공저에 방문을 허락해 두라고 한 것도. 심지어 선물받은 걸 착용하고 다니기까지 하는걸!”
“……제가 드린 걸 착용하셨다고요?”
“그럼! 크로스 모양의 백금 이어링 맞지?”
대공비는 애리얼이 선물한 선물이 무엇인지, 어떤 생김새인지 정확히 설명했다. 매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이다.
이번 이야기는 너무 의외여서 애리얼은 그만 말을 잃었다. 당황해서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니…… 그러니 말이다. 렉시우스와의 약혼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렴. 대공자의 약혼녀가 되면 대우는 정말 남부럽지 않게 해 줄게!”
“아, 말씀은 정말 감사합…….”
“우리 아들이 성격은 저래도 외양은 쓸 만하단다! 부디 승낙해…….”
“어머니.”
서늘하며 차분한 저음이 울리며 대공비의 말이 끊어졌다. 응접실의 온도가 내려간 듯 느껴졌다. 위압감을 뿌리는 그 익숙한 음성에 애리얼은 뒤를 돌아보았다.
살벌한 미소를 지은 렉시우스가 검은색 제복을 입고서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문 여닫는 소리는커녕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서. 그는 인기척을 지우는 데 능숙한 맹수처럼 고요하게 움직였다. 마침 사냥이라도 나갔다 온 건지, 왼쪽 뺨에 피가 튀어 있었다.
피비린내를 풍기는 그가 애리얼이 앉은 소파의 등받이를 짚고 서서 대공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들을 파는 일은 적어도 아들 앞에서 하시지요.”
“아무렴, 아들 앞에서도 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네. 대공자가 미온적이니 이 어미라도 나서야지요. 아닙니까?”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포장을 잘해야 팔리지 않겠습니까. 대부분 제 흉만 보시던데, 그러다 공녀가 도망치겠습니다.”
“그런 꼴이어서야 제가 어찌 포장하겠습니까? 피 냄새가 심합니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세요, 대공자.”
“그리 역합니까?”
“예, 그걸 말이라고요.”
“공녀가 느끼기에도 그런가?”
렉시우스가 갑자기 대화의 대상을 바꿔 질문했다.
애리얼은 움찔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 오른쪽 귀에서 늘 보던 체인 이어링 대신 십자 모양의 이어링이 반짝거렸다.
‘대공비께서 하신 말씀이 진짜였어…….’
애리얼은 커다래진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이어링을 주시했다.
렉시우스는 엉뚱한 데 정신이 팔린 그녀를 채근했다.
“말을 잃을 정도로 역한가?”
“아닙니다. 다만 피는 씻으시는 게 좋겠어요. 감염이 일어날 수 있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애리얼이 질문에 제대로 답했다.
“공녀가 씻는 게 좋겠다는데, 씻어야지. 그래야 팔릴 테니까.”
렉시우스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농담임이 분명한데 어째선지 진담으로 들리는 소리였다.
애리얼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와 눈만 맞추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몸이 굳었다. 그가 씻기 위해 먼저 자리를 비울 때까지 애리얼은 계속 정지 상태였다.
대공비는 제 아들의 언행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제 아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애리얼을 보았다. 파란 눈동자로 애리얼을 슬그머니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래 보여도 잔악한 일을 하고 온 건 아니란다. 대공령 북쪽의 위험한 조수(鳥獸)를 구제(驅除)하고 온 거야. 유능한 아이거든.”
대공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제 아들의 몸에서 풍기던 피비린내를 애써 포장했다.
애리얼은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몇 분 후, 대공비는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다. 렉시우스가 대공령의 북쪽 지대에서 행한 조수 구제와 관련된 일인 것으로 보였다. 어려울 것 없는 간단한 사안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애리얼은 대공비가 돌아올 때까지 응접실에서 홀로 기다렸다. 웅장하고 화려한 공간을 감상하며 로즈메리차를 홀짝이니 크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아치형 천장에 그려진 천국의 상상도가 아름다웠다.
애리얼은 고개까지 젖히고서 천장의 그림을 열심히 관찰했다. 온통 하늘과 구름으로 가득한 가운데 이따금 작게 그려진 사람이 포착되었다. 그 후부터 애리얼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그림에서 사람을 세었다. 젖혀진 목이 조금 아팠지만 그래도 꽤 즐거웠다. 그렇게 그림에 한참 몰두한 그녀가 다섯 번째 사람을 찾아냈을 때였다.
달칵.
뒤에서 홀연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애리얼은 젖혔던 고개를 원위치하고서 문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녀를 보고 무례한 소리를 툭툭 뱉어 내던 소년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름이 우레우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푸른 눈동자를 지닌 렉시우스의 동생이다.
“안녕하세요.”
애리얼은 소파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가 주춤하더니 어색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녕…….”
우레우스는 애리얼을 경계하듯 굴면서도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지며 기어코 애리얼이 있는 소파로 와 앉았다. 애리얼이 멀뚱히 서 있으니 앉으라는 듯 눈치를 주기도 했다.
애리얼이 소파에 앉자 우레우스는 긴장한 것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아까 말하는 거 들었어. 너, 진짜로 우리 형하고 아무 사이 아닌 거지?”
“아무 사이가 아닌 것까진 아니고, 아카데미의 선후배 관계예요.”
“어쨌든 형의 애인은 아닌 거 맞지?”
“네. 애인은 아니에요.”
“어머니는 너랑 형을 약혼시키고 싶어 하는 거 같던데.”
“과분한 말씀이세요. 대공자 저하께는 따로 더 어울리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으래?”
“네. 그럴 거예요.”
“그럼 넌 형하고 약혼 안 하는 거지?”
“네.”
“그, 그럼…… 나하고 할래?”
“……약혼을요?”
“응, 그거.”
우레우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했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엄하지도 않고, 날 존중해 주고…… 엄청 예쁘고……. 어머니가 소개해 주신 다른 여자애들이랑 다르게 차분하고, 아픈데 울지도 않고.”
한마디를 더 할 때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소년의 풋내기 같은 첫사랑의 대상이 된 애리얼은 몹시 난감해졌다. 대공저에 올 때만 해도 이런 일을 마주하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다. 계단을 오르다 기절한 것도 모자라, 대공비에게서 렉시우스와의 약혼 제안을 받았고, 심지어 있는지도 몰랐던 렉시우스의 어린 동생에게 고백을 받고 있었다.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데, 너무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도 좋진 않겠고…….’
애리얼은 어떻게 하면 이 어린 소년의 마음을 현명하게 거절할 수 있을지 고뇌했다. 그러나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거절을 위한 변명은 가장 무난한 나이 차로 귀결되었다. 그녀는 우레우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저하께선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열둘이야.”
“저는 열일곱이에요.”
“다섯 살 차이네. 그 정도는 괜찮아!”
“저는 연상이 좋아요. 죄송합니다.”
“뭐? 거짓말……. 너,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에요. 저는 연상이 이상형이에요.”
“어떻게 너보다 늙은 게 이상형일 수가 있어! 너 역시 형이 좋은 거야?”
“대공자 저하는 존경하는 분이에요. 좋아하는 감정은 없어요.”
“그럼 역시 연상을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이잖아.”
“대공자 저하가 아닌 다른 연상을 좋아해요.”
“그런 거……! 그런 거면 이제부터라도 연하로 취향을 바꿔! 사 년만 지나면 나도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키도 커질 거니까…….”
잘 말하던 우레우스는 갑자기 뒷덜미를 잡혀서 소파의 반대쪽으로 끌려갔다.
“누굴 건드리는 거야. 이 건방진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