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멀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렉시우스가 제 동생을 한 손으로 가뿐히 들어 옮겼다. 우레우스는 뒷덜미 쪽 옷을 틀어쥔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거 놔! 렉시우스!”
“시끄럽네. 나가 있어.”
렉시우스는 우레우스의 격한 저항에도 미동 하나 없었다. 그는 쓰레기를 버리듯 응접실 문밖으로 우레우스를 던졌다. 속수무책으로 쫓겨난 우레우스가 항의하듯 문밖에서 소리쳤다.
“야! 문 열어! 렉시우스!”
기함할 만큼 방자한 태도와 말투였다.
그럼에도 렉시우스는 태연한 얼굴로 문을 잠그고 돌아왔다. 당연히 제 동생이 내는 항의의 소리는 전부 무시했다.
맞은편에 앉은 렉시우스가 검은색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귀찮게 공격술만 익혀 와서는.”
우레우스한테 어지간히도 세게 쥐어뜯겼는지 핏줄이 불거진 팔뚝에 자잘한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아물어 사라졌다.
애리얼은 그의 상처가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선배, 그건 무슨 마법이에요?”
“이건 마법이 아니고…….”
그는 말을 잇다가 문득 거슬린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근데, 왜 존댓말이야? 여기 너랑 나밖에 없어.”
“바깥에 듣는 귀가 있잖아요.”
“철저하시네.”
“선배도 그래요.”
애리얼의 대답에 그는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느긋이 상체를 기댔다. 그러고는 아까의 화제로 돌아왔다.
“마법이라기보단 체질? 우리 가문 인간들은 유독 특출난 치유력을 타고나거든.”
“그럼 마법으로 흉내 낼 수는 없는 거네요.”
“꼭 그렇진 않아. 마력이 뛰어나면 높은 치유력을 체화시킬 수 있거든.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거지. 방어술로 충분하니까.”
“그렇군요. 말이 나온 김에 선배, 저 방어술 좀 가르쳐 주세요.”
“본론이 그거야?”
“네.”
애리얼이 솔직하게 인정하자 렉시우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애리얼이 이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내가 여기 오는 걸 허락한 건, 네가 그림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 보러 오라고 그런 거야.”
“네……. 그림들은 전부 훌륭했어요.”
“복도를 지나치다 훑은 게 다면서, 자세히 본 척 말하네.”
“…….”
“오랜만에 보는데 안부나 더 주고받자.”
“……잘 지내셨어요?”
“아까 그게 잘 지낸 거로 보였어?”
그가 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애리얼은 그가 온통 피 묻은 옷을 입고 응접실에 나타났던 걸 떠올렸다. 잘 지냈을 리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하는 일을 하면서 잘 지내기는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애리얼은 고개를 숙이고서 진중하게 사과를 전했다.
그는 뭐가 그리 심각하냐는 투로 픽 웃었다.
“농담이야. 피 묻히고 산 건 사실이지만, 지루한 거 빼곤 잘 지냈지.”
“다행입니다.”
“너는 보아하니 잘 못 지냈을 거 같고.”
렉시우스는 애리얼에게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애리얼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질문을 던지려던 차였다.
“듣자 하니 연상이 좋다고?”
그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애리얼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금세 답했다.
“거절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나이 차를 이유로 들면 반발심만 더 들걸? 그냥 싫으니까 꺼지라고 말해.”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신분도 저보다 높은 분이신데.”
“내가 허락할 테니까, 그놈이 다음에 또 그러면 뺨을 날려 버려.”
“폭력은 좋지 않아요. 하물며 아직 아이인데…….”
“자기 형한테 곰도 죽일 만한 공격술을 남발하는 놈이 애라고?”
“……그랬어요?”
“자주 그래.”
“자주, 라니…… 힘드시겠네요.”
“그렇진 않고.”
동생이 자길 자주 죽이려 했다는 소릴 하면서도 렉시우스는 몹시 태평했다. 정말 일상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쁜 애처럼은 안 보였는데.’
오늘 처음 만났지만 애리얼은 우레우스가 악랄한 인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하니 진심은 아닐 거예요.”
“장난이면 더 나쁜데.”
“……저하의 뛰어남을 알고 그러는 걸 거예요. 그 정도에 저하께서 당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포장 한번 잘하네. 너 내 동생한테 관심 있어?”
“아뇨, 없어요.”
단호한 대답에 렉시우스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조금 기분이 좋은 것도 같았다. 삐딱하게 호선을 그린 입술이 제 동생을 향해 비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취향까지 닮아서는…….”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애리얼은 못 들은 체를 하느라 갖은 애를 먹었다. 그 돌연한 혼잣말로 렉시우스의 하트가 두 개라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잠시 같이 있는 것만으로 호감도가 무작정 상승하진 않을 테지만, 그런 쪽의 이야기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안 그래도 대공비가 약혼이라는 민감한 제안을 꺼낸 참이었다.
이래서야 마법을 배우기는커녕 엉뚱하게 약혼 준비를 하게 될 판이다. 빨리 원래의 목적과 관련된 쪽으로 이야기를 돌려야 했다.
“아무튼, 선배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방어술 쪽으로…….”
“아, 그래.”
렉시우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직은 그쪽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흥미 없는 티를 팍팍 냈다. 그의 눈은 테이블에 남겨진 대공비의 찻잔을 쓱 훑어보고 있었다.
애리얼은 불길한 예감을 진하게 느꼈다.
이윽고 그가 새로운 화제를 꺼냈고, 그 화제는 애리얼이 가장 피하고 싶던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너한테 약혼 얘기를 꺼냈다며.”
“대공비 전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신 것 같아요. 무척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에게는 과분한 이야기예요. 전하께서도 그냥 하신 말씀이실 거예요.”
“아닐걸?”
“그렇다기엔 신분 차이도 크고…….”
“평민 중에서도 내 배우자를 찾던 분이셔. 어머니는 진지해.”
그의 말에 애리얼은 잠시 호흡까지 멎었다. 물에 잠기는 듯한 부담감과 압박감이 들이쳤다. 대공자와의 약혼이라니, 말을 얼버무리고 도망치기는 어려웠다. 확실하게 거절해도 들어줄지 미지수다.
‘마법을 배우러 와선 약혼 제안을 받았어! 약혼 철도 아니고 별장에서도 대공저에서도 온통 약혼 이야기야!’
애리얼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곤란하다 못해 힘겨웠다.
‘하트 두 개부터는 약혼 이야기가 무조건 나오는 건가? 세 개부터는 어쩌려고 벌써 약혼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골이 아팠다. 이놈의 게임은 하트 네 개부터가 개인 루트라더니, 하트 두 개부터 약혼의 위험을 던져두고 있었다. 이래선 계속 약혼에 시달리게 될 터. 당장이라도 대공저를 떠남이 옳지만, 애리얼은 지금 렉시우스가 아니면 기댈 곳이 없었다. 방어술을 익혀 놓지 않으면 당장 후학기에 목숨이 위험했다.
한숨이 나려는 얼굴로 애리얼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대공비 전하께선 초면인 저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겠지? 뭐, 본질은 약혼으로 날 대공가에 잡아 두려는 속셈이시겠지만.”
“선배는 집에 잘 안 붙어 있는 성격이신가 봐요?”
“응. 조만간 또 나가게 될 거야. 그러니 어머니도 초조하시겠지. 아카데미도 일 년 반만 더 다니면 졸업이고, 남부 상황은 끝날 기미가 없으니…….”
애리얼은 그가 아카데미 졸업 후 취업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대공자로서 차후 대공 지위를 이어받을 줄 알았는데, 선배는 그럴 생각이 없는 건가? 그래서 대공비께서 섭섭하신 거고?’
남부의 전쟁 상황에 대해 모르는 애리얼로서는 그렇게밖에 추측이 되지 않았다.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돌아온 그가 재출전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당연히 몰랐다.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전후 상황을 추측할 뿐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까지 네가 알 필요는 없고.”
그는 애리얼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덮어 일축해 버렸다. 그러더니 예의 황금빛 눈동자로 애리얼을 지그시 응시했다.
“우리 어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제쳐 두고,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약혼에 대해서요?”
“어때? 나하고 약혼하고 싶어?”
그는 훤칠한 얼굴에다 그린 듯한 미소를 만들어 띄우며 물었다.
확실히 렉시우스는 사람들이 혹할 만한 매력적인 외관을 갖고 있었다. 그에 더해 지위며 재능 또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으니, 아카데미 내에서도 그를 따라다니는 이가 많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감탄하기 이전에 공략이 우선이라는 의무감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애리얼이 곧장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자 렉시우스는 시큰둥하게 웃음기를 지웠다.
“기분 나쁠 정도로 단호하네.”
“죄송합니다.”
“사과받으면 더 비참해지거든?”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돌려 애리얼에게서 시선을 뗐다. 창문을 향해 휙 돌려진 그의 얼굴 옆으로 귓불에 매달린 은색 십자가가 찰랑거리며 움직였다. 크로스 모양의 백금 이어링이었다. 애리얼이 일전에 과외의 보답으로 선물했던 것.
“선배, 그거…… 하고 다니시네요.”
“뭐?”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턱을 괸 그가 눈동자만 슬그머니 움직여 애리얼을 보았다. 애리얼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어링이요. 제가 드린 거.”
“아, 급히 오느라 빼는 걸 잊었…….”
그는 무심코 답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어 입술을 꽉 깨물고선 황급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리얼은 제가 선물한 것을 착용해 주는 그가 그저 고마워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끼고 다니시나 봐요. 감사합니다.”
“…….”
렉시우스는 대답이 없었다. 이런 주제로는 무심함을 잃는 법이 없던 그가 드물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의 볼이 옅게 홍조로 물들었다.
애리얼은 그가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신기함에 멀뚱히 그를 주시하다가 갑작스럽게 그의 감정을 인식했다. 하트 두 개의 렉시우스는 그녀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워낙 능숙하여 얼굴로는 잘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었다. 그의 상기된 뺨을 보고서야 느낀다. 호감을 드러내며 동요한 것은 그인데 애리얼까지 덩달아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둘의 시선이 완전히 어긋나며 분위기가 몹시 어색해졌다.
“아, 그러니까 저는…… 그게…….”
우우우웅-
말을 꺼내는 중에 옷 속의 휴대폰이 울려 댔다.
애리얼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