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방어술을 쓰고 싶다고?”
견디기 어려운 적막에 빠지려는 찰나 먼저 말을 꺼낸 건 의외로 렉시우스였다. 동요한 기색을 말끔히 정리한 그는 무표정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전환되며 껄끄러웠던 분위기가 물러갔다. 애리얼은 이때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렉시우스가 다른 데 두었던 시선을 애리얼에게 향했다. 애리얼은 마주쳐 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애리얼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말했다.
“네 수준으로 방어술은 어려울 텐데.”
“그래서 선배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이론은 알아?”
“네. 어느 정도 연습도 해 봤어요.”
“그럼 바로 실전부터 가르쳐 줄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애리얼은 잽싸게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고지대에 세워진 대공저는 여름임에도 서늘했다.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 들어가면 으슬으슬해질 정도였다. 실전 연습을 하기에 적당한 온도였다.
복도를 지나 후문으로 나간 렉시우스의 걸음이 야외 훈련장에 다다랐다. 높게 쌓은 담을 넘어 철창으로 된 문을 지나자 대공저의 기사들이 보였다.
열을 지어 원형으로 선 기사들의 중심에서 일대일 대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챙, 챙. 날과 날이 충돌하는 소리에 이어 흙먼지가 날 듯 분주하게 구르는 발소리가 섞였다.
연이어 울리는 둔탁한 소음에 애리얼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아카데미 실습장에서의 대련이 생각나는 광경이었다.
렉시우스는 주춤거리는 애리얼을 제 등 뒤에 숨기고서 대련을 주관 중인 기사단장을 불렀다.
“아론.”
멀리 있던 기사단장이 귀신같이 반응했다. 날랜 동작으로 한달음에 렉시우스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대공자 저하.”
“오늘, 별채 쪽 특수 훈련장을 쓰는 이가 있나?”
“없습니다. 특수 훈련장 쪽 일정은 삼 일 후에나 잡혀 있습니다.”
“알겠다. 남은 훈련 수고해라.”
“네, 저하.”
묵례하는 기사단장을 뒤로하고 렉시우스가 걸음을 옮겼다. 벽처럼 막고 서 있던 그의 등이 움직이자 애리얼도 바쁘게 움직여 따라갔다.
기사들이 모인 훈련장을 빠져나가 높은 담이 쌓인 사잇길을 걸었다. 담 너머에서 삐죽 튀어나와 드리워진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좁은 길에 그늘을 만들어 냈다.
저 멀리 훈련장의 소음이 멀어지고 딱딱한 바닥에 닿는 발소리만 크게 울렸다. 마치 동굴을 걷는 것 같았다. 좁고 긴 돌담길의 끝에 환한 빛이 보였다.
렉시우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를 따라 길을 빠져나간 애리얼의 앞에 흰모래가 깔린 넓은 원형 공간이 나왔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공터는 그 직경이 족히 300m는 되어 보였다. 아까 렉시우스와 기사단장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특수 훈련장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넓은 터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간 렉시우스가 손을 휘둘렀다. 달걀 피막과도 같은 얇고 반투명한 결계가 훈련장을 감쌌다.
“여기 중간에 서 봐.”
그는 웃지도 않고 애리얼을 불렀다. 그의 표정에 애리얼은 다소 긴장한 상태로 걸어갔다.
“방어술, 이론은 안다고 했지?”
“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반말하고.”
“응.”
곧장 반말로 바꾸었더니 렉시우스의 표정에 피식 웃음기가 스쳐 갔다. 그는 두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애리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아는 이론대로 한번 해 봐.”
애리얼은 백작저 창고 방에서 하던 대로 손을 펼치고 마력을 방출했다. 타인의 앞에서, 그것도 마력이 뛰어나고 마법적 조예가 깊은 렉시우스의 앞에서 하려니 긴장으로 손이 떨렸다.
첨예한 금안이 그녀를 향한 채 햇빛 아래 번뜩이고 있었다. 송곳 같은 눈빛 속에서 애리얼은 다음 단계를 위해 서서히 마력을 닫았다. 제 주변으로 마력이 뭉치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백작저에서 안 되던 것이 이곳에서 될 리가 없었다. 이론에 따라 응당 뭉쳐져야 했을 마력은 물처럼 흘러나가기만 할 뿐. 미간을 구기고서 사력을 다해도 한계에 부딪힌 듯 애리얼은 실패하기만 했다.
그렇게 진전 없는 채로 오 분이 지나자 렉시우스가 입을 뗐다.
“그만.”
더 볼 것도 없다는 투였다. 애리얼은 시무룩하게 마력의 방출을 멈췄다.
“너, 적성 어느 쪽인지 검사한 적 없지?”
“응. 최초 검사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것들 외엔 몰라.”
“그럴 줄 알았어. 따라와.”
렉시우스가 걸음을 옮겼다. 애리얼이 곧장 따라붙었다. 그가 가는 대로 피막과 같은 결계가 크기를 넓혔다.
다시 좁은 길이 나타나고 그 끝에 돌로 쌓은 별채가 보였다.
렉시우스가 단단한 나무 문을 밀고 별채로 들어갔다. 내부는 복잡한 듯 단순한 구조였다. 커다란 책상을 중앙에 두고서 벽면에는 갖가지 도구를 걸어 놓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것이 창고라기보단 작업실 같았다.
“선배, 여긴 뭐 하는 데야?”
“간단하게 마력을 점검하는 데.”
짧게 설명을 마친 그가 벽에 걸려 있던 도구를 줄줄이 꺼내 책상에 놓았다. 크기와 생김새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 간단한 숫자와 기호를 표시하는 작은 화면이 붙어 있었다. 측정기의 일종으로 보였다.
애리얼이 호기심을 보이며 책상으로 다가갔다.
“검사 기구야?”
“어. 왼손부터 내밀어 봐.”
렉시우스가 개중에 가장 작은 도구를 들고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반지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애리얼이 왼손을 내밀자 그가 반지와 같은 물건을 끼워 넣었다.
애리얼은 제 손가락에 끼워진 흰 측정기를 신기해하며 내려다보았다. 검지가 빠듯하게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측정기가 알아서 크기를 조절하는 모양이었다.
렉시우스는 차례로 애리얼의 오른손 검지와 약지, 오른쪽 손목, 목에도 각각의 측정 도구를 끼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자처럼 생긴 백색 막대만 입에 물리면 끝이었다. 그는 막대의 포장 비닐을 벗겨 내밀었다.
“앞니로 살짝만 깨물어.”
애리얼이 입술을 살짝 벌려 다가온 막대를 물었다.
그녀의 이가 막대를 깨물자 렉시우스는 묘한 표정을 짓다가 움찔 떨었다. 그러더니 얼른 막대를 놓았다.
한 걸음 물러난 그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애리얼이 그를 의아해하며 보았다. 그는 모른 체하며 곧장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방법은 간단했다. 측정 기구를 전부 착용하고서 마력을 방출하기만 하면 됐다. 1분 정도가 지나자 측정기에는 각기 다른 기호와 숫자가 표시되었다.
렉시우스는 측정기의 화면을 전부 확인하고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복잡한 버튼이 잔뜩 달린 기기가 나왔다. 그는 그 기기에다 확인한 기호와 숫자를 입력했다. 기기는 계산기처럼 작동하며 어떤 값을 산출해 냈다. 기호와 숫자로 이루어진 족히 스무 자리는 넘는 결과가 화면에 표시되었다.
렉시우스는 기기의 화면을 응시하다가 툭 내뱉었다.
“너, 방어술은 못 쓰겠는데?”
“결과가 그렇게 처참해?”
막대를 빼낸 애리얼이 걱정스레 물었다.
“방어 쪽은 네 적성이 아니야. 방어뿐만 아니라 회복, 치료, 결계, 은신, 그 밖에 마력량을 적당히 조절하고 다루는 건 싹 다 못 해.”
“그러면…… 아예 못 하는 거야?”
“못 해.”
그가 냉정하게 일축했다.
애리얼은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실제로 시한부 선고와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후학기에 사망 위험이 닥쳐올 텐데 최선의 대비책으로 여겼던 것이 무용지물이 됐다. 이제 무엇으로 대비해야 하는가.
애리얼의 얼굴이 석고처럼 희게 굳었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관찰하던 렉시우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근데 굳이 방어술 같은 거 배워야 해?”
애리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러댈 말을 찾느라 대답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손과 목에 채워진 측정기를 제거해 주며 말을 이었다.
“네 주변은 보안이 좋아. 아카데미는 당연하고, 백작저도 보안이 썩 나쁘지는 않을 테고. 거기다 넌 내 비호도 받고 있잖아. 누가 널 건드리겠어?”
“그 외의 일에서 필요할 수도 있어.”
“전쟁터에 나갈 것도 아니고, 쌈박질을 즐기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일?”
“재해나…… 뭐, 그런 거.”
“재해는 예측할 수 있는 체계가 잡혀 있어. 제국의 재해 대비는 귀족 공녀가 죽을 만큼 허술하지 않아.”
“…….”
“그리고 넌 방어술을 익히는 게 거의 불가능한 마력 구조야.”
그가 재차 강조했다. 애리얼은 가까스로 표정을 정리하고서 그 말을 들었다. 렉시우스의 앞에서 동요하고 우울해해 봤자 괜한 의심만 살 것이다.
“안 된다니 어쩔 수 없지.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선배.”
애리얼이 순순히 포기하자 렉시우스는 의아해하는 눈길을 보냈다. 책상을 짚고서 삐딱하게 선 자세로 보아 뭔가 못마땅한 부분이 있었던 듯했다.
“뭐가 불안해서 이래?”
“그런 거 아냐. 그냥…… 태생적으로 못 쓰는 마법이 있다는 게 서글퍼서.”
“아니긴 뭘 아냐. 방어술 못 쓴다고 말하니까 얼굴이 허옇게 질리던데.”
“…….”
“솔직하게 털어놔.”
애리얼은 뭐라 둘러댈까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어술이 있으면 편할 것 같아서 그랬어. 다칠 걱정이 많이 줄어드니까……. 그게 다야.”
어느 정도는 진실인 대답이었다.
그에 렉시우스는 무엇을 느낀 건지 묘한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지켜 줄게.”
“……응?”
애리얼은 갑자기 무슨 맥락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아니, 흐름은 알겠는데, 그가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힘이 들어간 미간이나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 그의 표정에서 죄책감이 엿보였다.
애리얼은 과거의 일을 불현듯 떠올렸다.
‘설마 내가 전에 기절해서 다쳤던 일을 신경 쓰는 건가?’
하지만 아카데미 별관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몇 달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걸 아직도 담고 있을까 싶었는데…….
“선배, 난 그냥 방어술이 있으면 활용하기 좋겠다 싶어서…… 그런 거야. 체력이 약한 걸 보완하려고…….”
“그러니까 다치지 않게 지켜 줄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어딘가 결연해 보일 정도였다.
애리얼은 그가 죄책감으로 괜한 책임을 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대공비에게서 약혼 제안을 받은 것도 신경 쓰였다. 혹시라도 그 두 가지 요소가 연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잘라 내야 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 벌써 몇 달도 전 일이잖아. 이젠 기억도 안 나는데.”
“죄책감이 아니면. 그러면 지켜 줘도 되는 건가?”
굳어 있던 렉시우스의 얼굴이 풀리며 픽 웃음소리를 냈다. 이번엔 반대로 애리얼이 굳었다.
죄책감이 아니라고……. 그러면 무슨 감정일까.
그의 귀에 걸린 십자 모양 이어링이 반짝였다. 렉시우스의 사심을 드러내는 증거. 애리얼은 그가 뭘 말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아까처럼 하얗게 질려 버린 애리얼을 보면서 그가 조용히 내뱉었다.
“건드려서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좋아하지 않을 건 알았지만, 그런 표정까지 할 건 없잖아. 뇌까리고 싶은 걸 렉시우스는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