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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92)화 (92/264)

애리얼은 방어술과 상극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방어술을 배울 수 없었고, 렉시우스도 그런 그녀를 가르칠 마음이 없었다. 구멍 난 그릇에 물을 부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렉시우스는 그런 비효율적인 데에 굳이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는 애리얼을 데리고 대공저의 본저택, 중앙 응접실로 돌아왔다.

여태 기다리고 있던 대공비가 기대감이 충만한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가득 차려진 다과가 못 견디게 달콤한 향을 풍겼다. 누구에게 뭘 원해서 차렸는지, 너무 뻔해서 렉시우스는 실소가 터졌다.

“어머니, 약혼 이야기는 그만하시지요. 초면인 상대에게 너무 밀어붙이는 것도 대공비라는 격에 어울리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나를 어떻게 보고…….”

대공비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으나 제대로 변명하지 못했다. 그녀는 렉시우스를 노려보다가 그 옆에 선 애리얼을 보고서 무안한 듯 표정을 바꿨다. 어색하게 지은 쓴웃음이 그녀의 심경을 말해 줬다.

“애리얼, 내 너에게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과분한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여 쉽게 답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괜찮아! 그럼, 괜찮고말고! 시간은 여유로우니 얼마든지 고민하고 되도록 좋은 쪽으로 답을…….”

“어머니.”

렉시우스가 또다시 앞서가려는 대공비의 말을 끊어 냈다. 대공비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고는 표정을 관리했다.

“내 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편히 쉬다 가렴, 애리얼.”

대공비는 참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해 보였다. 한편으론 아쉬워하는 것이 표정 곳곳에 스며 있었다. 고압적이지 않고 천진하게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감사합니다.”

대공비는 미소 짓는 애리얼을 보고서 기대감이 반짝이는 눈을 했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까지 했다. 필시 약혼에 관한 제안일 것이다.

그 낌새를 눈치챈 렉시우스가 단호한 행동으로 대공비의 앞을 막아섰다. 대공비는 입을 떼기도 전에 제지당했다.

“그럼 전 애리얼을 객실로 안내해 주고 오겠습니다.”

허락은 기다리지 않았다. 렉시우스는 대공비가 한마디라도 더 얹기 전에 애리얼을 데리고 나왔다. 등 뒤로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그렇게 대공비에게서 벗어난 그는 애리얼을 두고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의 팔이 복도가 꺾어지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끌어냈다.

“무슨 짓거리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한심스러워하는 말투. 렉시우스의 손에 우레우스가 붙들려 나왔다. 그는 제 동생을 한 손으로 들어서는 근처의 방에다 던져 넣고 마법으로 문을 잠갔다. 걸리적거리는 쓰레기를 치우는 듯 가차 없는 동작이었다.

쾅! 쾅!

우레우스가 닫힌 문을 거칠게 가격했다. 아마도 발로 차는 게 아닐까 싶었다. 부서지지 않는 게 용한 수준의 소음이었다.

“열어! 미친놈아!”

“말본새 봐라.”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스토커 퇴치.”

“누, 누가 스토커야! 난 그런 짓 안 했어!”

“가자, 애리얼.”

“열어! 열라고!”

그는 갇혀 소란 피우는 우레우스를 무시하고서 앞장섰다. 뒤에서는 고함과 함께 둔탁하고 요란한 충돌음이 연달아 울려 댔다.

애리얼은 걱정스레 뒤쪽을 돌아다보았다.

“저렇게 둬도 괜찮은 거야?”

“앞뒤 없이 날뛰는 놈은 가둬야지.”

그는 단호했다. 그래도 그의 행동은 매정하기보단 엄격한 것에 가까웠다. 우레우스는 어린 나이를 고려해도 무례한 면이 없지 않았다.

렉시우스는 우레우스가 피워 대는 난동의 소음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걸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거대한 저택의 3층 복도, 오른쪽 끝. 외진 자리에 조용한 객실이 보였다. 렉시우스는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에 곧장 몸을 기대고 앉았다.

“드디어 좀 조용해졌네.”

그가 등받이 뒤로 고개를 젖혔다. 적발과 함께 은빛 이어링이 흔들거리며 아래로 늘어졌다.

애리얼은 잠시 주춤하다가 근처의 소파로 가 앉았다. 엉거주춤 자리한 그녀가 방을 둘러보았다.

“선배, 여기가 내 객실이야?”

“자고 가려고?”

“아……. 바로 가야 하는 거였구나.”

“있고 싶으면 있어도 되는데, 있어 봐야 좋을 건 없어.”

그가 단언했다. 애리얼도 동의하는 바라 묵묵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방어술을 배울 수 없게 된 지금, 대공저에 있으면 대공비의 약혼 제안에 부딪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지금 갈게. 혹시 돌아갈 차량만 좀 제공해 줄 수 있을까?”

“뭘 또 그렇게 급하게 굴어? 나 나갈 때 같이 나가.”

“선배 또 어디 나가?”

“어. 한두 시간 뒤에.”

“선배는 방학인데도 바쁘네.”

“그래도 지금은 사정이 나은 거야.”

“예전엔 더 바빴어?”

“까딱하면 죽을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

렉시우스는 남부 전쟁을 상기하며 젖혔던 고개를 원위치했다. 자연스레 애리얼과 눈이 맞았다. 먹물 같은 흑발보다는 조금 연한 색을 띠는 눈동자에 호기심과 걱정이 깃들었다. 그를 향한 것이었다.

렉시우스는 갑작스럽게 마주한 상냥한 관심에 심장이 조금 불편해졌다. 두근두근, 불규칙한 박동이 이어졌다. 기대감, 고양감. 자극을 받은 속이 눈치 없이 동요했다.

썩 유쾌하진 않은 기분이다.

렉시우스는 마주해 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싶기도 하고, 독점하고 싶기도 했다. 팽팽한 균형 속에 미세하게 독점욕이 앞섰다.

그래서 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박동이 흐트러진 심장이 조금씩 더 빠르게 요동쳤다.

렉시우스는 이 감정을 뭐라 부르는지 알았다. 소중히 감싸고 싶은 마음과 과격하게 틀어쥐고픈 욕구가 동시에 들었다. 참으로 이중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금색 눈으로 애리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피하지 않고 마주 보던 애리얼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뭐 때문에 바빴는지 물어봐도 돼?”

“시답잖은 일이야. 들어도 재미없어.”

그는 답을 피했다.

사실은 전쟁터에서 굴렀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가 얼마나 걱정해 줄지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만뒀다. 그런 식으로 동정이나 걱정을 사도 그다지 기껍진 않을 듯했다. 그에게 있어 기꺼운 건, 그런 불쌍한 감상보다는 이성적 관심이었다.

“듣자 하니 방학 중에 거울 호수에 갔다며? 황족 전용 피서지.”

“알고 있었어?”

“황성에 심어 놓은 귀가 많거든. 데본시아가 불렀다고 하던데.”

“……응.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셔서 갔는데, 특별한 일은 없었어. 그냥 식사만 몇 끼 같이 했어. 이틀 정도 있었나 그럴걸?”

“그럼 거긴 불러서 간 거고, 여긴 원해서 온 거고. 그러네?”

노골적인 유도성 질문이었다.

애리얼은 그의 질문을 곧장 부정하려다 멈췄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도움이 필요해서 스스로 이곳에 왔다.

그녀는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데본시아보다 내가 좋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방어술을 배우고 싶은 거라면 데본시아한테 부탁해도 됐을 거 아니야. 스카이라도 선택지에 있을 거고.”

“…….”

“그런데 왜 굳이 나였는지 궁금해.”

그의 눈이 애리얼을 똑바로 주시했다. 맹렬한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의 궁금증에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방어술을 배우려는 게 게임의 분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 페널티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해서 방어술이 꼭 필요하다고……. 데본시아는 믿을 수 없고, 스카이라는 왕녀와 혼담이 오가기에 함부로 불러낼 수 없었다고…….

“선배가 제일 잘 가르치니까.”

애리얼은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선생이자 스승이었고, 그 덕에 애리얼은 엘리트만 모인다는 황립 아카데미에서 낙제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아, 그래. 고마워.”

나름 추켜세운 거였는데 렉시우스는 시큰둥했다.

그는 애리얼의 답변이 별로 기쁘지 않았다. 저런 정석적인 답변은 그의 기대감을 조금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왕이면 좀 더 사적인 이유인 게 좋았다.

이를테면 데본시아가 거북하다든가 스카이라가 부담스럽다든가, 애리얼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무난한 답을 골랐다. 거짓이든 장난이든, 그에게 호감을 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애리얼은 그러지 않았다. 렉시우스는 그게 못내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내 가르침을 못 받아서 어쩌냐.”

그의 말투가 삐딱해졌다. 미처 숨기지 못해 사적인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정정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유치한 행동이었다. 유치한 감정이었고.

애리얼은 눈치를 보듯 어물거리다 덧붙였다.

“괜찮아. 선배랑 만나서 반갑기도 하고, 대공비 전하께서도 좋게 맞아 주셔서 감사하고, 와서 좋았어.”

그를 만나서 반갑고 좋았다고, 그가 바라던 답을 얼른 내놓는다.

고작 그 정도에 렉시우스는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다. 눈 녹듯이 서운함이 녹았다. 어쩌다 이렇게 쉬운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한심스럽다고 여기면서도 마음이 들뜨고 말았다. 아, 이렇게 등신이 되는 거구나. 렉시우스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냉소했다.

실망감에 다소 날카로웠던 그의 기색이 누그러졌다.

애리얼은 슬그머니 그를 살폈다. 실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래도 될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의 기분이 나아진 지금이 기회일 것이다.

“근데 선배, 아까 검사한 거 있잖아……. 방어술이랑 이거저거 다 못 쓰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내 적성이 있을 거잖아? 내 적성은 뭐야?”

“공격술. 근데 몸이 약해서 네가 직접 싸우는 쪽은 안 맞고, 방어술도 못 쓰니까 칼 같은 것도 안 될 테고, 그나마 저격술 정도는 하겠네.”

“저격술이면, 총이나 활처럼 쏘는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는 거야?”

“그렇지. 관통하고 파괴하는 게 네 적성이 되겠네. 부차적으로 정밀한 추적과 조준도 가능할 테고.”

“관통하고 파괴…….”

“웃기지도 않지? 등급은 ‘특수 방어 마법’ 등급인데 적성은 순수할 정도로 공격술에만 치중되어 있다니.”

애리얼은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부수고 공격하는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성격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성격과 적성은 아주 별개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적성대로 익혀 두긴 해야 하나……. 방어술도 못 쓰는데 다른 저항의 수단이라도 갖추는 게 낫겠지?’

사망 위험에는 암살자를 만나거나 린치 상황에 부닥치는 일을 빼놓을 수 없었다. 방어용 공격술을 익혀 두면 그래도 조금은 유용할 것이다.

“선배, 공격술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싫은데.”

즉각적이고 단호한 대답에 애리얼은 말문이 막혔다. 휘둥그레진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보았다.

“왜……. 이유가 뭐야?”

“방어술보다 공격술이 가르치기 훨씬 어렵거든. 그걸 공짜로 가르치려니 너무 자선 사업 같아서.”

“아…… 미안해. 내가 너무 당당하게 요구를 했네.”

“사과받자는 건 아니고.”

“아니야. 내가 너무 뻔뻔했던 거 같아. 그…… 과외비를 내면 될까?”

“돈은 많은데.”

“그럼 보석으로…….”

“그것도 많은데.”

“…….”

“나한테 제안할 거 더 없어?”

그가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게 기댔던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말했다. 마주 보는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애리얼은 고작 그 정도의 접근에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침묵을 지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애리얼이 렉시우스에게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녀가 그나마 가지고 내세울 수 있는 건 재물이 다였고, 그게 제구실을 못 하자 말문이 막혔다. 애리얼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결국 마땅히 제안할 거리를 찾지 못해 물었다.

“뭘 더 제안해야 할지…… 모르겠어. 선배가 원하는 건 뭔데?”

그가 방긋 웃었다. 해맑은 미소인데도 사악하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다.

“후학기에 부탁 하나만 할게. 그거 들어주면 돼.”

“부탁? 뭔데?”

“그때 돼서 말해 줄게.”

“…….”

“어려운 거 주문 안 할 거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고.”

“거래하자는 거야?”

“그런 거지. 어때? 들어줄래, 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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