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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93)화 (93/264)

“들어줄게.”

애리얼은 선뜻 대답했다. 렉시우스의 부탁이 무엇이 될지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애리얼에겐 그보다 좋은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가르치는 방식은 애리얼과 잘 맞았으며, 단기간에 실력이 향상되어 좋았다. 당장 후학기를 대비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 렉시우스는 최고의 선생이었다. 온 제국을 다 뒤져도 그보다 뛰어난 선생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손쉽게 긍정을 얻어 낸 렉시우스는 유쾌한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과외는 오늘처럼 대공저에서? 아니면 백작저에서 할까?”

“난 백작저에서 했으면 하는데, 괜찮아?”

애리얼은 대공저의 계단을 매번 오르고 싶지 않아 그렇게 제안했다.

“그래, 그럼.”

“날짜나 시간은 언제로 해?”

“내가 자주는 못 봐줄 거 같고,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오후 네 시 어때?”

“난 언제든 괜찮아.”

“그러면 토요일에 보는 거로 하고, 수업은 기본 세 시간. 하는 거 봐서 줄이든 늘이든 할 거야.”

“응. 알았어.”

그렇게 일정이 얼추 잡혔다.

그 후 렉시우스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꺼내려 할 때, 그의 보좌관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

“저하,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알았다. 먼저 내려가서 대기해.”

“예, 저하.”

문밖에 있던 보좌관이 물러갔다.

렉시우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자. 데려다줄게.”

그가 애리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애리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선배, 한두 시간 정도 여유 있다고 하지 않았어?”

“…….”

“거짓말이었어? 설마 급한 와중에 잠깐 온 거야?”

렉시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과묵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가서는 앞장서 복도를 걸었다.

떠나기 전 애리얼은 마지막으로 대공비에게 인사를 했다. 대공비는 애리얼을 향해 좀 더 머물고 가라는 의사를 온 얼굴로 내비쳤다. 하지만 애리얼을 끝내 붙잡지는 못했다.

사실 대공비는 애리얼에게 제대로 된 말조차 붙이지 못했다. 렉시우스가 둘 사이를 막아선 채 작별의 시간을 짧게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애리얼은 초고속으로 인사를 마치고 저택의 출입문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우레우스는 갇힌 상태였다.

렉시우스는 자신이 부재하는 대공저에 애리얼만 두고 싶지 않은 듯 서둘렀다. 너른 정원을 지나 대공저의 입구인 깎아지른 암벽 계단까지 순식간에 다다른다.

수많은 계단의 시작점에서 그는 애리얼에게 팔을 뻗었다.

“잠시만 안길래?”

“왜?”

“빨리 내려가게.”

“괜찮아. 계단 정도는 혼자 내려갈 수 있어.”

“두 시간 넘게 걸릴 텐데.”

“…….”

“여기 올라오다 기절도 했다며.”

“……꼭 안겨야 해? 순간 이동은…….”

“이런 데서 소모할 마력 없어. 내가 뭐 하다 왔는지 아까 봤잖아.”

애리얼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나타났던 그를 떠올렸다. 또 그 일에 불려 가는 모양이니, 순간 이동 같은 마력 소모가 심한 마법을 그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 가기는 망설여졌다. 그녀의 종잇장 같은 체력으로는 아무리 내리막이라 한들 힘든 게 당연했다. 기절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그에게 안겨서 도움을 받는 것이 나았다.

애리얼은 제 앞으로 다가온 렉시우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부드럽게 손이 포개어졌다. 그렇게 피부가 맞닿자마자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오금을 받쳐 들었다. 어느새 휙 들어 올려진 그녀의 두 발이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애리얼은 떨어질까 무서워 반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단추를 두어 개 푼 셔츠 사이가 벌어지며 울대가 도드라진 목과 푹 팬 쇄골이 보였다. 그의 살결에선 갓 씻은 듯한 비누 향이 풍겼다. 호흡하는 그의 가슴팍이 그녀의 팔에 밀착했다. 세찬 맥박 소리가 쿵쿵 들려왔다. 당황한 애리얼은 얌전히 손을 거두었다. 어색함이 가득한 얼굴로 까만 눈을 내리깔았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단단히 안아 들고서 계단에 발을 디뎠다.

“너 혹시 고소 공포증 같은 거 있냐?”

“글쎄……? 조금?”

“그래? 무서우면 눈 감아.”

그 말을 끝으로 렉시우스가 계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바닥이 사라진 듯 몸이 훅 꺼졌다. 갑자기 무중력 상태가 된 듯하다가 빠른 속도로 급강하가 일어났다. 강한 바람이 뺨을 벨 듯이 스치고 갔다.

연필심 같은 색의 두 눈이 꽉 감겼다. 애리얼은 구명줄을 붙들듯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목에 불거진 핏대가 애리얼의 뺨에 닿았다. 가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맞닿은 피부로 달아오른 체온이 전해진다.

세찬 바람 속에 놓인 애리얼은 그의 온기에 달라붙었다. 렉시우스는 매달려 오는 그녀를 세게 감싸 안았다.

계단을 박차고 뛰는 그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내려가는 게 아니라 추락하는 것 같았다.

한두 번 땅을 디디는가 싶은 감각이 들었다가 다시 훅 꺼지길 반복했다. 그러더니 오 분도 되지 않아 계단의 끝에 도착했다.

세찬 바람도, 추락의 아찔함도 없었다. 주변을 감싼 더운 공기가 오히려 기꺼웠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렉시우스를 꽉 붙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떨어지는 공포가 컸다.

두근두근. 맥박이 요동쳤다. 빠른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애리얼의 위로 그의 긴 한숨이 흩어졌다. 그 끝에 낮은 웃음소리가 따라붙는다.

“계속 이러고 있게?”

“아니…….”

경직되어 있던 애리얼은 땅에 착지한 것을 뒤늦게 체감했다. 바짝 긴장한 몸에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그의 목을 옥죄던 팔을 풀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애리얼은 휘청거리며 땅을 디뎠다. 그나마 그가 계속 손을 잡아 준 덕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피했다.

애리얼은 매일같이 디디던 단단한 땅에 새삼스레 감사하며 심호흡을 했다. 두 시간 이상을 소모하며 계단을 내려오는 수고를 오 분으로 줄이게 된 건 좋으나,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여전히 그 여파가 남아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와 손을 맞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계단 아래에는 하얀 세단과 위장 페인트를 바른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세단과 지프의 운전기사들과 미리 명을 받고서 내려온 듯한 카논이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작별이네.”

렉시우스가 못내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쥐고 있던 애리얼의 손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그러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아카데미의 그늘진 건물 사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입술이 애리얼의 손등을 눌렀다.

그 광경에 대공가의 운전기사 둘은 사색을 하고서 놀랐다. 대공자가 여인의 손에 입술을 누르고 사교적 인사를 건네다니! 대공자의 일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공비가 봤다면 까무러치다 일어나 약혼을 부르짖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짧은 입맞춤을 끝낸 렉시우스가 미려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조만간 찾아갈게.”

그는 마치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했다.

애리얼이 오해를 사겠다며 우려에 찬 목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그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렉시우스는 곧장 발길을 돌려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지프의 시끄러운 시동음이 들려왔다. 모르는 새에 차에 올라탄 운전기사가 출발 준비를 마쳤다.

애리얼은 떠나는 지프를 멍하게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공녀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단의 운전기사가 상석을 문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날이 더웠다.

애리얼은 곧바로 세단에 올라탔다. 지프보다는 얌전한 시동음을 내며 하얀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애리얼은 운전석으로 통하는 작은 창을 슬그머니 살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까 렉시우스의 앞에서 이어링에 대해 언급했을 때 진동이 울렸었다. 그때 온 알림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줄곧 렉시우스와 있느라 확인하지 못한 그때의 알림음이 혹시나 분기 알림은 아닐지, 애리얼은 불안했다.

옆자리에 앉아 애리얼을 유심히 지켜보던 카논이 눈치 빠르게 작은 창을 닫았다. 애리얼은 카논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남기고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자주 생각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현재 위치: 대공령』

다행히 아까 울린 건 호감도 상승 알림이었다.

애리얼은 분기 알림이 아닌 것에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목표치에 거의 다다른 렉시우스의 호감도를 보고서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페이스가 너무 빨라.’

하트 두 개를 채운 이후부턴 호감도 상승에도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와 단둘이 진행될 마법 과외가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이러다 혹시 렉시우스의 루트에 진입하는 것은 아닐까…….

‘일주일에 한 번인데, 설마…… 괜찮겠지?’

***

며칠이 지나고 토요일이 왔다.

렉시우스는 정확히 오후 네 시에 백작저를 방문했다. 그는 응접실에서 애리얼과 마주 보고 앉아 안부를 물었다.

“나 없는 동안 공부 좀 했어?”

“이론은 외웠어. 실습도 기초적인 건 조금씩…….”

애리얼은 자신 없다는 투였다. 일전에 방어술을 대차게 실패한 여파였다. 심지어 공격술은 미숙한 그녀 홀로 연습했다간 사고가 날 확률이 높아 시도조차 못 했다. 결계도 못 치는 애리얼의 자습은 마력을 방출하고 나누는 정도에 그쳤다.

테이블에는 그녀가 공부한 서적들이 죽 놓여 있었다. 렉시우스가 그 책들을 하나씩 들고 훑으며 물었다.

“방출, 차단, 분할까지는 쉽게 할 수 있지?”

“응.”

“그럼 바로 응용으로 넘어가자.”

“뭐 어떤…….”

“나가서 말해 줄게.”

그는 대강 방향을 잡은 듯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저에는 대공저와 달리 이렇다 할 훈련장이 없었다. 계급상 기본적인 호위 병력을 제외하곤 일정 이상의 사병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법을 연습하기 위해선 저택을 벗어나야 했다.

렉시우스는 백작저에서 백 미터가량 떨어진 초원에서 결계를 쳤다. 유백색의 반구형 막이 나타났다.

“처음 할 건 마력의 사출. 한 지점으로 화살을 쏘듯이 일정한 마력을 쏘아 보내는 거야. 책을 봤으니 원리는 알지?”

“응.”

“좋아. 그럼 바로 해 보자.”

렉시우스는 결계의 경계로 물러나며 애리얼의 앞으로 뭔가를 던졌다. 애리얼은 제 앞에 툭 던져진 물건을 보았다. 주먹만 한 크기의 흰색 공이었다.

“마력을 사출해서 공에 맞혀 봐.”

그가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 주었다. 애리얼은 곧장 공이 놓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방출하고 조준……. 그다음에 응고해서……!’

지지직, 전기 튀는 소리와 함께 마력이 파란 줄기로 쏘아졌다. 공을 약간 비껴 치며 땅으로 꽂힌 마력에 잔디가 검게 탔다. 흰색 공에도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렉시우스가 마력에 맞은 공을 회수했다. 그의 손안에 들어간 공이 천천히 색을 바꿔 갔다. 실선이던 부분이 서서히 넓어져 공 전체를 검게 물들였다. 완전히 새카매진 공을 들고서 렉시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이 공은 일회성 검사 도구였다. 사출된 마력에 닿으면 색의 변화로 마력이 가진 파괴력을 나타냈다. 흰색이 가장 낮은 등급이며 황색, 녹색, 청색, 적색의 순으로 등급이 높아졌다. 검은색은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등급이었다. 다만 그 확률이 너무 낮아 검은색은 실제 등급에 포함하지 않았다. 일종의 돌연변이로 취급하고 있다는 뜻이다. 파괴력으로는 인정받는 렉시우스도 적색을 띄웠으니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애리얼에게서 검은색이 떴다. 방어술 하나 못 쓰는데 파괴력에서 규격 외가 떠 버린 것이다.

렉시우스의 눈이 애리얼의 왼 손목을 채운 브레이슬릿을 넌지시 훑고 갔다.

‘데본시아는 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등급을 속인 것도 모자라 마력의 극심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파괴력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방어적 능력을 하나도 못 쓰면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애리얼은 체력도 약했다. 그런 상태에서 지나치게 높은 공격력은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마력에 다칠 가능성도 있으며, 타인에게 위험 요소로 여겨져 제거당할 확률도 없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애리얼은 강해질수록 누군가의 보호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선배, 공이 까맣게 됐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애리얼의 질문에 렉시우스는 한참 심각해져 있던 표정을 지웠다. 그는 태연한 태도로 검게 변한 공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네 잠재력이 꽤 높게 나왔어.”

“그래? 아까 그 공, 측정기 같은 거야?”

“어.”

“나 많이 강한 거로 나왔어?”

“뭐, 나름.”

렉시우스는 정확한 답변을 미뤘다. 구체가 검은색으로 물든 건 의외였으나, 그거 하나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애리얼의 마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데본시아, 그 새끼가 결과지를 대체 얼마나 속인 건지 알아봐야겠어.’

그의 금안이 예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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