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을 마치자, 순간적으로 주변의 소음이 싹 사라진 것 같았다.
애리얼은 멀뚱히 뜬 두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꿈에서 깨어나려는 사람처럼.
“좋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지금 너한테 고백하는 거야.”
고백.
귀로 흘러드는 말 중에 가끔 뇌가 거부하는 말이 있다.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하고파 감히 묻기조차 겁나는…… 그러나 결국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
‘나한테 고백하는 거라고……? 렉시우스가?’
눈 깜빡임이 멎었다. 애리얼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렉시우스에게 잡힌 턱이 가늘게 떨렸다.
이 순간에 그에게 고백을 받다니, 믿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돌발적인 그의 고백은 로맨틱하거나 극적이지 않았다. 렉시우스는 그저 하나의 사실을 전하는 것같이 차분했고 담담했다. 그럼에도 고백이었다.
후학기만 신경 쓰던 애리얼을 향해 경종이 울렸다.
설마 하던 개인 루트가 코앞에 와 있었다. 그것도 스카이라가 아닌 렉시우스의 개인 루트가.
“표정이 왜 그래?”
렉시우스가 물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투였다. 그는 핏기가 가신 애리얼의 얼굴을 뜯어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살해 협박이라도 들은 표정이다?”
그가 비아냥거렸다. 실제로 애리얼의 표정은 그의 비아냥거림과 다를 바 없었다.
애리얼은 굳은 입술을 힘겹게 움직여 대답을 내놓았다.
“그…… 너무 갑작스러워서.”
“다른 감상은?”
“…….”
“없나 보네.”
렉시우스는 고백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딱히 듣고 싶은 눈치도 아니었다. 그는 애리얼의 턱을 놔주고는 백작저를 향해 걸어갔다. 일대를 감싸던 희뿌연 결계가 지워졌다. 오늘의 과외는 이걸로 끝이라는 의미였다.
애리얼은 피 묻은 소매를 접어 올리며 백작저로 향했다. 여름용 얇은 블라우스에 흠뻑 배어든 핏물은 팔목에까지 붉은 자국을 남겼다.
***
백작저로 돌아간 렉시우스는 백작과 만나 몇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첫째, 애리얼이 혼자서 마법 연습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둘째, 애리얼이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 잘 수 있도록 할 것.
셋째, 하루 한 번 적성 검사를 하고, 그 결과를 기록해 보여 줄 것.
넷째, 검사 결과는 외부에 필히 함구할 것.
위 모든 사항을 꾸준히 준수할 시 대공자는 백작저에 달마다 천만 실론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의 요구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에 비해 천만 실론이라는 보상은 꽤 컸다.
백작은 그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요즘 애리얼이 자꾸만 무리하는 탓에 마음이 쓰이던 차였다. 그녀는 기어코 과외에서까지 코피를 흘리며 돌아온 딸아이를 더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대공자의 요구가 아니었어도 백작은 애리얼을 제지할 생각이었다.
피를 씻고 옷을 갈아입은 애리얼이 응접실로 왔을 때 이야기는 벌써 끝나 있었다. 렉시우스도 이미 떠난 상태였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요구 사항을 통보받기만 했다. 선택지조차 없었다. 그녀는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연습마저 금지당한 애리얼에게 남은 건 오로지 이론과 책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카데미의 개학일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후학기의 사망 위험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인 데 반해 그녀의 대비는 무척 허술했다. 도움이 될 줄 알았던 렉시우스는 훼방을 놓는 것도 모자라 고백이라는 큰 폭탄까지 던졌다.
분기의 페널티에 대비하려다 개인 루트의 위험성만 얻은 꼴이었다.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령(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하트 세 개. 목표 수치를 달성했음에도 애리얼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다음 주 수업에서 만날 텐데…… 그때 뭐라고 말하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렉시우스는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렉시우스가 백작에게 한 요구, 단독으로 하는 마법 연습 금지. 이 요구 때문에 애리얼은 개인 연습을 할 수 없어졌다. 그녀에게 허락된 연습 시간은 오직 렉시우스가 있을 때뿐.
후학기에 있을 위험 상황에 대비하려면 마법 연습은 필수인데, 낭패였다.
애리얼은 어쩔 수 없이 개인 루트의 위험성을 감수하며 렉시우스와의 만남을 이어 가야 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인 백작마저 ‘애리얼이 혼자서 마법 연습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그의 요구에 동조하고 있으니…….
“……혼자서 하는 것만 아니면 되잖아?”
애리얼이 문득 중얼거렸다. 렉시우스가 요구한 건 애리얼이 홀로 연습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녀를 지켜봐 줄 다른 선생을 구하면 되는 일.
“카논.”
애리얼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제 사람을 불렀다. 카논이 문을 열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네, 아가씨.”
“제국 마법사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 줄래? ‘특수 방어 마법’ 이상 등급으로만.”
***
다시 일주일 후, 렉시우스가 찾아왔다. 다행히 그는 고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답을 요구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문제는 그가 수업마저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응접실에서 애리얼과 마주 보고 앉은 렉시우스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었다.
“향이 좋네.”
“선배, 연습은?”
“급하게 굴지 마.”
그가 찻잔을 입에 댔다. 어울리지 않게 우아한 자세로 홍차를 홀짝이는 모습이 얄미웠다.
애리얼은 찌푸려지는 얼굴을 간신히 무표정으로 유지했다.
“선배, 난 안 급할 수가 없어. 선배 때문에 선배랑 만나는 날이 아니면 마법도 못 쓰니까.”
“그럼 일주일 내내 나만 기다렸겠네?”
“……그렇게 말하면 이상한 의미로 들리는데.”
렉시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했다. 애리얼은 그에 넘어가지 않고 따져 물었다.
“선배, 이러다 해 지고 나가겠어.”
“아직 다섯 시야. 해는 여덟 시에나 져.”
“그러니까, 해 지기까지 세 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거잖아. 일주일 동안 연습 하나도 못 했어. 오늘 적어도 네 시간은 하려고 했는데.”
“누가 그렇게 시켜 준대?”
“그럼 몇 시간 시켜 줄 건데?”
“오늘은 쉬어. 저번 주에 힘들었잖아.”
제멋대로인 그의 대답에 애리얼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선배, 이럴 거면 집에 가.”
“와 달랄 땐 언제고, 왜 또 말을 바꿔.”
“선배가 불성실하니까 그렇지.”
“네가 무리한 게 먼저잖아.”
“자꾸 이런 식으로 수업 안 하고 미룰 거면…… 나도 선배가 후학기에 한다던 부탁, 안 들어줄 거야.”
“그래, 그럼.”
애리얼 딴에는 강수를 둔 건데, 렉시우스는 대수롭잖게 그러라고 대꾸했다. 애리얼로선 할 말이 없어지는 반응이었다.
“선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뭐가?”
“왜 수업도 안 하고, 연습도 못 하게 하고……. 나한테 왜 이러는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그가 그렇게 물어 오자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렉시우스는 바로 저번 주에 애리얼에게 고백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날 애리얼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과도한 연습 때문에 마력의 과부하로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좋아하는 애리얼이 아픈 게 싫은 거였다. 그래서 개인 연습을 금지하고, 수면 시간을 챙기도록 요구했다. 마력을 매일 검사해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확인까지 하도록 했다.
어떻게 보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의 사심과 친절을 마냥 고마워할 상황이 아니었다.
“선배, 배려해 주는 건 고마워. 고마운데, 적어도 이 시간엔 마법을 연습하고 싶어. 선배가 도와줬으면 좋겠고.”
“도와줄 거야.”
“그러면 지금이라도 나가자. 나가서 실습 좀 시켜 줘.”
애리얼의 거듭된 재촉에 렉시우스는 들고 있던 컵을 탁 소리 나게 놓았다.
“넌 용건이 있을 때만 나를 찾지.”
“…….”
“오해하지 마. 네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니까.”
“……문제없는 거지?”
그는 픽 웃었다.
“문제 있으면?”
“…….”
“해결해 주게?”
“내가 과하게 무리하지만 않으면 되잖아.”
“난 그쪽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닌데? 뭐, 아예 관계없다곤 할 수 없나.”
“대체 무슨 문젠데?”
“네 문제라기보단 내 문제야.”
그는 검지를 펴서 제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렸다.
“여기에 문제가 있거든.”
“……제정신이 아니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좀 더 감상적인 추측은 못 하는 거야?”
그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사실은 애리얼도 감상적인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가 머리가 아닌 가슴께를 가리키며 말했다면, 그 추측에도 힘이 실렸을 것이다. 그녀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날 가르칠 지식이 날아간 거야?”
“지식은 그대로 있어. 널 가르칠 생각이 없는 거지.”
“대체 왜?”
“네가 코피 흘리는 모습이 온종일 머릿속에 꽉 차 있어서, 기분이 뭣 같았거든.”
“…….”
“난 네가 또 그럴까 봐, 가르치기가 싫은 거야.”
“……앞으론 무리하지 않을게.”
“내 뒤로 몰래 다른 마법사를 알아보면서 그런 소릴 해?”
그의 한마디에 애리얼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럼에도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가누었다.
“무슨 소리야?”
“네 전속 하녀, 혼자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던데. 수도 이곳저곳을 다닌다지?”
정곡을 찔린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차분하던 표정이 깨어졌다. 검은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백작이 렉시우스에게 정보를 제공한 게 분명했다.
“아주 약았어. 내가 제재 좀 했다고 바로 갈아 치울 생각이나 하고.”
렉시우스의 말투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슬그머니 내려간 입꼬리에서 기저에 깔린 그의 감정이 슬쩍 엿보였다. 애리얼은 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었으나 밝힐 수 있을 리 만무한 사정이었다.
“다른 선생을 구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구할 수나 있다면 말이야.”
그는 변명도 해명도 없는 애리얼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
며칠 후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남긴 비아냥거림에 깔린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카논이 일주일을 넘게 수소문했으나 그 어떤 마법사도 애리얼의 선생이 되어 주지 않았다. 부탁 가능한 대부분의 마법사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외비로 상당한 거금을 불렀는데도 수락하는 이가 없었다. 대공자인 렉시우스가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압박을 행사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라면 이럴 리가 없어.”
“저도 동의해요.”
카논이 퇴짜를 놓은 마법사들의 리스트를 잘게 찢으며 말했다. 족히 삼백이 넘는 이들의 이름이 찢어져 기름 램프에서 소각되었다.
“아카데미 개학까지 고작 이 주 남았는데 연습도 못 하고…….”
애리얼이 한숨을 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그녀에게 허락된 건 마법 관련 서적을 보며 이론만 주야장천 학습하는 것뿐.
그런 애리얼을 바라보며 카논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 한 명, 승낙한 분이 계세요.”
“정말? 누구?”
애리얼이 엎드렸던 몸을 순식간에 일으키며 소리쳤다. 기대감에 가득 찬 두 눈이 카논을 향했다.
카논은 앞치마 안에 숨겼던 명함 하나를 가져와 애리얼에게 내밀었다.
「무하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