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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96)화 (96/264)

흰색의 빳빳한 명함 종이에 은색으로 쓰인 성씨와 계급. 그 글씨의 배경에 그려진 검은색 제비나비. 

애리얼은 다소 화려하게 꾸며진 명함을 받아 들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하 공작이면…… 삼 대 공작가? 그 무하야?”

“아마도요.”

“정말로 무하 공작가의 공작님께서 내 과외 선생 같은 걸 해 주신다고?”

“사실은 사칭이 아닐까 의심이 들어서 여태 말씀을 못 드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카논은 명함의 뒷면을 가리켰다.

애리얼은 곧장 명함을 뒤집어 보았다.

「클라우스 백작의 추천으로 애리얼 허클리를 초대한다.」

“클라우스 백작? 이분이 누구신데 나를……?”

애리얼이 카논을 보며 물었다.

카논은 연신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곧 결심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클라우스 백작. 풀네임은 아리앨라 클라우스. 과거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 하셨고…… 현재는 무하 공작가의 수석 마법사로, 아가씨와는 사촌 관계인 분이십니다.”

“내 사촌이라고?”

“네. 백작님의 손위 자매이신 전대 클라우스 백작 부인의 외동딸이십니다. 아가씨의 이종사촌이시죠.”

“그런데 그분이 왜 나를 추천하셨어? 그것도 무하 공작가라니?”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다만 허클리 백작님과 아리앨라 님은 혈연관계이니 각별하다면 각별한 사이이긴 해요. 아가씨를 눈여겨보고 도움을 주려고 명함을 보내셨는지도 몰라요.”

“그래? 그렇다면 한번 속는 셈 서신을 보내 보는 것도…….”

애리얼이 승낙하듯 말한 순간, 그녀의 손에 있던 명함이 빛을 발했다. 뿜어져 나온 빛이 애리얼을 감싸고 돌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마력의 빛은 애리얼에게 닿자마자 사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명함이 까맣게 타기 시작했다.

애리얼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명함을 떨어트렸다. 명함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게 대체?”

그녀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한 순간, 방 안에 아까와 같은 빛이 일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굽이치는 흑발이 애리얼과 무척이나 닮은 사람.

난데없이 등장한 그녀는 프릴이 잔뜩 달린 검은색 고딕 드레스 차림으로 양산까지 들었다. 굽이 높은 신발이 또각거리며 바닥을 밟았다.

“그쪽이 애리얼?”

둥근 이마를 드러낸 하얀 얼굴이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다가와 애리얼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선명한 보라색이었다.

“클라우스 백작님?”

“어머, 너무 딱딱한 호칭이네요. 아리앨라라고 부르면 돼요.”

“아리앨라…….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신 건가요?”

“애리얼을 부르려고 했는데 마법이 실패해서요. 사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데……. 애리얼, 대체 어떤 방어술을 쓰고 계신 거죠? 제 마력을 튕겨 내다니!”

그녀는 웃는 얼굴로 유쾌하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덧 애리얼의 얼굴에서 왼손으로 옮겨 가 있었다.

“그 왼쪽 손목의 소매 안쪽에 무슨 장치를 했나 보죠?”

“네? 아, 이건…….”

“이토록 강력한 마력 반응! 황족과 관여되었다더니, 혹시 그것도 그 산물인가요?”

아리앨라가 새로운 발견을 한 학자처럼 호기심으로 무장한 두 눈을 공격적으로 빛냈다.

애리얼은 쏟아지는 질문에 뒷걸음질을 쳤다. 이종사촌의 존재를 안 것이 고작 몇 분 전인데, 그 이종사촌이 당장 눈앞에 나타나 일방적으로 말을 퍼붓고 있었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아리앨라와 초면이라 어리둥절한 애리얼 대신 카논이 앞으로 나섰다.

“클라우스 백작님.”

“카논, 오랜만이야! 많이 컸네? 처음 봤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작았는데. 한 요 정도?”

아리앨라가 제 명치 부근에 손을 가로로 세우고서 말했다. 그녀의 언행 곳곳에는 카논을 향한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카논은 적당히 미소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서 예를 갖췄다.

“저도 오랜만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다만 아가씨께서 클라우스 백작님의 등장에 당황하신 듯 보여요. 우선은 백작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어머, 그렇지! 따지고 보면 나는 이모님네 집에 무단 침입을 한 거구나. 카논, 안내 좀 부탁할게.”

“네, 클라우스 백작님.”

카논이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아리앨라는 애리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뒤늦은 인사였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미안했어요.”

“아, 네. 괜찮아요.”

“상냥하시네요. 고마워요, 애리얼.”

아리앨라가 산뜻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

백작은 아리앨라를 그다지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누군들 갑자기 나타나면 반기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해도 아리앨라를 대하는 백작의 반응은 좀 과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아리앨라 자체를 꺼리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백작은 잠자코 아리앨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리얼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둘의 대화는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백작은 무척 조용했고 간간이 아리앨라의 명랑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대화가 끝나 응접실 문이 열렸을 때, 백작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애리얼을 찾아가 의사를 물었다. 혹시 아리앨라를 따라 무하 공작가에서 마법을 배울 의사가 있느냐고. 한시가 급한 애리얼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애리얼은 아리앨라와 함께 무하 공작가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배웅하는 백작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평소에도 아주 살갑지는 않은 사람이었으나, 저 정도로 쌀쌀맞은 적은 없었다. 그래도 애리얼을 볼 때는 나름대로 다정한 편이었다. 다만 아리앨라를 대할 때는 차원이 달랐다.

공작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리앨라는 백작이 자신을 꺼리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저는 제국에서 공식적인 기록을 말소당한 문제의 마법사거든요.”

“말소라면…… 마법사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태라는 건가요?”

“그렇죠. 공식적으로 저는 마법사가 아니에요. 아무리 마법을 잘 써도 인정받을 수 없는 상태예요. 마법에 관한 일에 참여할 수 없고, 공헌한다 쳐도 공로로 인정받을 수 없어요. 소위 없는 취급을 받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무하 공작가에서 수석 마법사로 일하고 계시잖아요?”

“그건 무하 공작가에서만 적용되는 특별한 경우라……. 무하 공작께서는 제 재능을 알고서 마법사로서 인정해 주시지만, 제국은 전혀 아니에요. 사실 제가 무하 공작가에서 일한다는 것도 극비인 사안이고요. 애리얼도 비밀로 지켜 주길 부탁드려요.”

“네. 반드시 비밀로 지킬게요. 그런데…….”

“왜 기록을 말소당했느냐고요?”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리앨라는 담담히 털어놓았다.

“신성 극계 마법에 손을 대려고 했거든요.”

실로 파격적인 이유였다.

애리얼은 놀란 표정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마법에는 위계가 있었다.

일반, 특수, 신성으로 나뉜 계급은 각각 3계부터 1계까지로 등급이 매겨졌다. 그리고 가장 높은 신성 1계 위에 신성 극계가 존재했다.

적성 검사의 마력 등급도 이 위계를 따라 정해졌다. 다만 마력 등급은 그 사람의 평균을 나타내는 것일 뿐, 노력 여하나 마력 소모량에 따라 그 위의 위계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력 보유자들은 자신의 위계만 익히기에도 버거워했다. 특히나 위계의 이름이 바뀌는 단계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신성 극계는 궤를 달리하는 마법이었다. 창조신의 권능이라고 불릴 정도이며, 정립된 세계를 근본부터 뒤엎을 수 있는 위험성을 지녔다. 그렇기에 극계 마법은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절대 금기이기도 했다.

아리앨라는 자신이 그런 경지의 마법을 건드리려 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기록을 모조리 말소당했다고…….

“아리앨라는 신성 마법사이신가요?”

애리얼이 묻자 아리앨라는 하하 웃었다.

“제국의 신성 마법사는 오로지 황태자 전하뿐이시죠. 저도 나름대로 높은 등급이긴 하지만 그분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째서…… 어떻게 신성 극계 마법을 건드리신 건가요?”

“실제로 그 마법을 사용한 건 아니에요.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경지였으니까요. 아무리 저라도 신성 극계 마법을 써 보려는 허무맹랑한 자신감은 없었고요. 그 마법에 관심을 가진 건 그저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었죠. 마법의 끝이니까…….”

극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아리앨라의 눈에는 위험한 동경이 가득 차 있었다. 광기와 닮은, 닿아선 안 될 아득한 것을 향한 탐구열.

“저는 극계 마법을 파헤치고 연구해 일종의 공식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도식이 없는 신성 마법을 여타 다른 마법들처럼 명확하게 만들 시도를 한 거죠. 그게 문제가 되어서 영구 제명과 같은 기록 말소형을 당하게 되었어요. 공식의 정밀도가 높아 제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죠.”

“…….”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아리앨라가 씁쓸히 웃었다. 미련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애리얼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신성 극계 마법에 대해 완전히 손을 뗀 것이다. 아니라면 저렇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아리앨라를 조금이나마 신뢰할 수 있었다.

***

무하 공작가는 수도에서 상당히 먼 편이었다. 수도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백작저에서도 서쪽으로 세 시간을 더 가야 했다. 하지만 애리얼은 한 시간도 안 되어 공작저에 도착했다.

아리앨라는 백작령을 벗어나자마자 차를 자가 부상 시켰다.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일이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본인의 차멀미가 심해서라는 이유였다.

공작저 앞에 차가 세워지자마자 아리앨라는 차에서 뛰쳐나갔다. 애리얼도 그녀를 따라 내렸다. 자욱한 안개가 둘을 맞았다.

애리얼은 차 주변에서 주춤거렸다. 시야가 탁했다.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의 불빛만이 안개 속을 밝혔다. 스산한 기운이 풍기는 장소였다.

아리앨라는 차의 트렁크에서 램프와 함께 우산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우산을 펼친 뒤 애리얼의 곁으로 다가왔다.

“비가 올 거예요.”

“아직은 괜찮은 거 같은데……. 저택까지 많이 머나요?”

“저도 걸어 본 적은 별로 없어서 모르겠어요. 원래는 워프 터널을 이용하면 되지만 애리얼은 지금 모종의 이유로 마력이 통하지 않는 상태 같아요. 아마 워프 터널도 사용하지 못할 테니 되도록 빨리 걷도록 하죠.”

아리앨라는 램프를 공중에 띄우고서 애리얼을 바짝 당겨 팔짱을 꼈다.

“저에게 꼭 붙으세요, 애리얼. 무하 공작저의 결계는 사람을 미아로 만듭니다.”

섬뜩한 주의 사항이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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