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97)화 (97/264)

걸은 지 오 분이 지나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너무 굵어 우산은 별 소용이 없었다. 옷이 다 젖었고, 어느새 발목까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나름대로 가까운 듯 보였던 저택과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리앨라는 넓게 펼쳐진 길을 마치 미로를 다니듯이 걸었다. 직진 중 갑자기 오른쪽으로 틀더니 다시 직진. 몇 분 걷다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돌고, 그런 다음 뒤로 돌았다. 그러자 시야를 가리던 희뿌연 안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깨끗하게 맑아진 하늘 아래 우레와 같던 빗소리가 멎었다.

아리앨라가 우산을 접었다.

환한 햇살 아래 높은 첨탑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클라우스 백작님, 허클리 공녀님.”

공작저의 하녀들이 정문을 열고 나와 둘을 맞았다.

햇살이 잘 드는 큰 창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차갑고 적막하게 느껴지는 내부가 둘을 반겼다.

애리얼은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가까운 객실부터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 공작저의 하녀가 미리 준비한 옷을 꺼냈다. 장식이 없는 단정한 흰색의 원피스였다.

옷을 갈아입고 휴대폰을 따로 챙긴 애리얼은 하녀의 안내를 따라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허클리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문 안쪽에서 무하 공작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녀가 응접실의 더블 도어를 열어젖혔다.

육각형의 거대한 방이 드러났다.

청록색 소파에 앉은 아리앨라가 애리얼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하얀 백발을 말끔하게 정리해 틀어 올렸으며 검은색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팍에는 제비나비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무하 공작이 틀림없었다.

애리얼은 공작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허클리 백작가의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무하 공작 서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하 공작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허클리 공녀.”

무하 공작은 계급에 걸맞지 않게 애리얼을 존댓말로 대했다. 애리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작 서하, 제게 하대를 부탁드립니다.”

“아니요. 뛰어난 마법사는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마법사를 이끄는 가문으로서 당연한 도리.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마시고 이리로 앉으시지요, 공녀.”

공작은 온화한 어투로 단호하게 대답한 후, 건너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뭐라 반박하기도 어려워진 애리얼은 짧게 묵례를 보낸 뒤 소파에 앉았다.

무하 공작은 바로 본제를 꺼냈다.

“마법을 지도해 줄 선생을 구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홀로 공부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주로 실전 연습 위주로 가르쳐 주실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공녀는 무하 공작가에서 배워 볼 생각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배울 수 있다면 크나큰 영광이에요.”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곧장 대답했다.

무하 공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리앨라는 공녀가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다더군요. 아무렴 황자 저하의 이름을 달고서 편입한 인물이니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바이긴 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리앨라를 선생으로 두고 마법을 배우는 건 어떠한가요?”

“영광인 일입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애리얼은 곧장 대답했다. 아리앨라는 무려 신성 극계에 관련된 공식을 만들어 냈던 인물이었다. 금기를 건드린 것은 맞지만 그만큼 실력이 출중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럼 결정되었군요. 아리앨라, 오늘부터 공녀를 지도해 주세요.”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리앨라가 공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둘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공작을 불렀다.

“공작 서하.”

“말씀하세요, 공녀.”

“지도의 보상은 무엇으로,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무하 공작가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재목들을 아낌없이 지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법사를 이끄는 이 가문의 가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가는 어떤 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난 애리얼은 기쁨에 고개를 푹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부디 훌륭한 마법사로 재능을 꽃피우길 기대하겠습니다. 아리앨라, 공녀를 실습실로 안내해 주세요.”

“네, 서하.”

아리앨라가 공작을 향해 짧게 묵례를 하고선 소파에서 일어났다. 애리얼 역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공작에게 묵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앞장서는 아리앨라를 따라 이동했다.

긴 복도와 홀을 한 번씩 지난 후, 애리얼은 실습실에 도착했다. 붉은색의 더블 도어를 열자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의 중심에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인물이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한 소년. 땀에 젖은 목덜미와 구겨진 블라우스가 보였다. 마법을 연습하고 있었던 듯했다.

“어머, 공자님! 여기 계셨어요?”

아리앨라가 알은체를 하자 소년이 바닥을 짚고서 천천히 일어났다. 탁하게 가라앉은 재색 눈동자가 아리앨라를 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뒤에 선 애리얼을 보고선 눈을 내리깔았다.

“손님이 있네요.”

차분한 미성이 들려왔다.

“네. 공작가에서 후원하기로 한 새 인재예요. 제 사촌이기도 하답니다.”

아리앨라는 발랄한 태도로 애리얼을 소개했다. 소년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움직여 애리얼을 보았다.

시선을 느낀 애리얼은 소년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허클리 백작가의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소년은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 인사 이후에는 애리얼을 흘금거리기만 했다. 언뜻 보기엔 수줍어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애리얼은 소년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가지런한 눈썹과 부드러운 눈매, 매끈한 콧날로 이루어진 단정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나이대는 애리얼과 비슷한 것 같았다.

애리얼의 시선을 느낀 소년이 주춤거리다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전 볼일이 끝나서, 먼저 가 볼게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을 전한 그가 문으로 걸어왔다. 아리앨라가 문에서 비켜섰다. 애리얼도 그녀를 따라 얼른 길을 터 줬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편하게 쓰세요.”

짧게 말하고서 소년은 도망치듯 빠르게 걸어갔다.

소년, 아마도 무하 공작의 아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대귀족답지 않게 시종 소극적인 태도였다. 무하 공작처럼 자신보다 하위 계급인 애리얼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도 보였다. 현재까지 애리얼이 만났던 높은 계급의 귀족들과 정반대인 그의 반응이 신선했다.

애리얼의 눈이 저만치 멀어진 그의 뒷모습을 응시할 때였다.

우우우웅-

갑작스레 울린 휴대폰에 애리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흠칫, 전신이 경직되었다.

애리얼의 격한 반응에 아리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추우신가요? 몸을 떠시네요.”

“아…… 잠깐 다리가 저려서……. 별일 아니에요. 이제 괜찮습니다.”

애리얼은 재빠르게 얼버무리곤 실습실로 들어갔다. 아리앨라가 문을 닫으며 뒤따랐다.

알 수 없는 상황을 겪어 불안해진 애리얼의 머릿속이 질문을 가득 쏟아 냈다.

‘왜 휴대폰이 울린 거지? 지금은 주변에 공략 대상이 없는데……? 설령 있다 하더라도 접근 알림은 꺼 놨는데?’

애리얼은 아까 울린 진동의 의미를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휴대폰을 확인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리앨라가 애리얼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마법에 능통한 그녀에게 휴대폰을 보이는 건 위험했다.

아리앨라는 수업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녀가 옷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을 꺼내 들었다.

“자, 기본적인 마력을 측정하고 교육의 방향을 정하도록 하죠. 처음은 가장 기초적인 방출부터!”

그토록 바라던 실전 수업의 시작이었다.

애리얼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휴대폰의 알림음을 억지로 밀어냈다. 지금은 어렵사리 얻은 과외의 기회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천천히 마력을 방출했다.

아리앨라의 수업은 느슨한 듯 힘겨웠다. 그녀의 지도 방식은 잘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여 발전시키는 방향이었다. 여러 가지를 두루 익히게 해서 실전에 빠르게 적용하는 렉시우스와 달리 높은 수준의 정교함을 요구했다.

애리얼은 마력 사출 연습만 두 시간을 이어 갔다.

아리앨라가 꺼낸 수정 구슬은 공중에 띄워진 채 시시각각 색을 바꾸었다. 아리앨라는 애리얼이 연습하는 틈틈이 수정을 확인했다.

수정구는 주로 검은색으로 빛났고, 그럴 때마다 아리앨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연속으로 쏘아진 애리얼의 마력이 대리석 바닥에 까만 그을음 자국을 만들었다. 그제야 아리앨라는 휴식 시간을 선언했다. 애리얼은 긴 호흡을 내쉬며 벽에 기댔다. 다리가 아파서 어디든 앉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실습실에는 의자가 없었다.

아리앨라는 애리얼의 마력이 사출된 자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남은 그을음 자국은 벌써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애리얼은 씻은 듯 지워진 바닥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방 안의 모든 것은 공격에 부서지거나 타더라도 금방 복구가 되었다. 애초에 작게라도 부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장소라고 했다. 기초만 다루는 수준인데도 그을음을 남긴 애리얼은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아리앨라가 놀라운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력 순도도 높고, 양은 뭐 압도적이네요. 그런데도 ‘특수 방어 마법’ 등급을 받았어요?”

“네. 검사지에는 그렇게 나왔어요.”

“그래요? 이상하네……. 이 정도면 마력량만 보고서도 높은 등급을 줄 만한데. 불안정성이 커서 등급이 내려갔을까요?”

“제 마력량이 그렇게 많은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측정이 어려울 정도로 많아요.”

아리앨라가 애리얼에게 바짝 다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강조했다. 그녀의 눈빛은 위험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왠지 모를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애리얼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제야 아리앨라는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 제가 혹시 얼굴을 너무 들이댔나요? 죄송해요. 마법적으로 굉장한 것을 보면 달려드는 습성이라…….”

“괜찮아요. 저는 그냥…… 아리앨라가 그런 반응을 할 만큼 제 마력량이 많다는 게 신기해요.”

“자랑스러워하셔도 돼요! 이런 마력량은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똑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아리앨라의 말을 끊었다.

“누구시죠?”

“아리앨라 님, 보안부의 테오도르입니다. 바깥에 불청객이 등장하여서, 급히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결계를 뚫었나요?”

“예, 그것도 단번에!”

강한 마력 보유자의 등장이었다.

아리앨라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성이 놀라 물러났다. 그녀가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불청객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 저택의 정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상대할 테니, 테오도르는 사람을 물려 주세요.”

“예.”

테오도르라는 남자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복도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쾅! 굉음이 울렸다. 정문으로 향하던 테오도르가 기겁하며 반대쪽으로 뛰어왔다. 황급히 아리앨라와 애리얼의 옆을 지나쳐 뒷문으로 향했다. 테오도르의 다소 경박하며 빠른 발소리가 복도를 마구 울리다 사라졌다.

그렇게 잠깐 찾아온 적막 속에서,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와 척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에 대응하여 아리앨라는 애리얼을 실습실 안으로 숨기려 했다. 그러나 애리얼은 오히려 그녀를 만류하고 앞으로 나섰다. 복도 끝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인영이 매우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놀라 입술을 벌린 애리얼이 복도에 서서 침입자를 정면으로 맞았다.

검은 정복은 비를 맞았는지 온통 젖어 있었다. 그가 축축해진 적발을 쓸어 올리며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씨익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 얼굴이 그토록 위협적일 수 없었다.

“왜 여깄어, 애리얼. 오느라 애먹었잖아.”

렉시우스의 지독히 낮은 저음이 그녀를 불렀다. 은근하게 다정한 말투가 폭풍 전야의 고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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