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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98)화 (98/264)

뚝뚝, 물방울이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지독히도 크게 들렸다.

복도에는 오직 세 사람뿐이었다. 렉시우스와 애리얼, 그리고 아리앨라.

그중에서 한 사람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대공자 저하를 뵙습니다.”

어느덧 앞으로 나선 아리앨라가 렉시우스에게 묵례를 했다. 렉시우스는 그녀를 귀찮은 것 보듯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비켜.”

“저하, 공작 서하를 먼저 만나시는 게 어떠신가요?”

“공작한테는 서신이 따로 갈 거야. 미리 이야기한 사항을 어긴 건 그쪽이니까.”

“미리 이야기가 오간 상황이었나요?”

“그래. 그러니까 나는 지금 꽤 많이 참아 주고 있는 거야.”

분노를 간신히 참아 누른 금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아리앨라는 그냥 물러날까 하다가 숨기려던 말을 꺼냈다.

“애리얼은 제 사촌이에요.”

“알아.”

렉시우스가 아리앨라를 치워 내듯 밀고 애리얼의 앞에 섰다. 아리앨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벽면으로 물러났다. 애리얼은 당혹한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렉시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저하, 저는 아직 용무가 남아…….”

“애리얼, 내가 지금 여유가 없거든.”

“…….”

“일단 차에 타서 말해.”

그는 이제까지 본 중에 가장 심상치 않은 얼굴이었다. 형형한 금색 눈동자에 기가 죽은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나섰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서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공작저 정문 앞에는 대공가의 흰색 세단이 와 있었다. 렉시우스는 세단의 뒷좌석에다 애리얼을 밀어 넣으며 차에 올랐다.

“출발해.”

결계가 걷어져 드러난 똑바른 길을 통해 세단이 나아갔다.

렉시우스는 피로에 물든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옷은 여전히 젖은 그대로였다.

애리얼은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그 시선에 렉시우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하 공자는 마력에 문제가 있어. 마저증이라고, 마력이 갑자기 저하되어 회복되지 못하는 현상이야. 거의 빈 깡통이나 다름없지. 그것 때문에 무하 공작은 마력이 강한 인간을 닥치는 대로 모으고 있어.”

그의 설명은 애리얼을 섬뜩하게 했다. 마력량이 뛰어나다며 눈을 빛내던 아리앨라를 떠올리자 뒤늦은 공포가 찾아왔다. 허클리 백작이 그녀를 꺼림칙하게 여기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애리얼에겐 구명줄같이 느껴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렉시우스는 실없는 거짓말로 겁을 주지 않는다.

애리얼은 떨리는 손가락을 깍지 껴 맞잡았다.

아리앨라가 애리얼을 실험체처럼 쓰기 위해 데려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아리앨라는 믿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혈연관계라곤 하나 초면인 사이가 아니던가. 렉시우스보다 아리앨라를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데리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자 저하.”

말을 마치자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애리얼은 눈썹을 잔뜩 구긴 렉시우스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추궁했다.

“여기까지 와서 같잖은 공격술을 배워야겠어?”

“그럼 저하께서 가르쳐 주세요.”

“지켜 준다고 했잖아.”

그는 화를 억누르는 음성이었다.

애리얼은 그가 이토록 화가 난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어코 새 선생을 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첫 번째 이유겠고, 무하 공작가의 위험한 소문을 모른 채 무턱대고 발을 들인 그녀의 경솔함이 두 번째 이유다. 지켜 준다는데도 자꾸만 혼자 독립적으로 해결 보려는 애리얼의 태도도 탐탁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었다. 애리얼은 당장 분기의 페널티로서 닥쳐올 후학기의 사망 위험이 중요했다. 아리앨라를 믿은 건 경솔했으나, 공격술이라도 익히는 것이 최소한의 방어책이었다. 최소한 독학이라도 가능했다면 애리얼은 공작저에 오지 않았을 거였다.

그녀는 갑갑했고,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 애리얼에게 렉시우스의 심기에 맞춰 줄 여유까지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하트 세 개를 채운 인물이었다.

“저하께서 온종일 제 옆에 붙어 계실 것도 아니잖아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불가능하다는 거 알아요.”

애리얼이 담담히 말했다.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아무리 애리얼을 향한 사심을 불태운들 온종일 애리얼과 함께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국의 영웅이자 대공자라는 명칭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렉시우스는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애리얼이었다. 대화가 끊기자 그녀의 머릿속은 아까 무하 공자의 뒷모습을 볼 때 울렸던 휴대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검은색의 멍한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갈 곳을 잃은 렉시우스의 분노는 허망하게 흩어졌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긴 하지?”

애리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들었음에도 못 들은 체, 계속 창밖만 보는 그녀를 렉시우스가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래. 차라리 대답하지 말고 있어.”

“…….”

“희망 고문이라도 좀 오래 끌고 가고 싶으니까.”

짜증 서린 음성을 내뱉은 그가 젖을 대로 젖은 겉옷을 벗어 차 바닥으로 던졌다. 겉옷만큼이나 젖은 셔츠가 상체에 달라붙었다. 널찍한 어깨와 균형 잡힌 근육이 젖어 비치는 셔츠 아래로 드러났다. 그는 셔츠마저 벗으려다 애리얼을 흘금거렸다. 애리얼의 멍한 얼굴은 여전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렉시우스는 신경질적으로 셔츠마저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상체를 완전히 탈의한 그가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댔다. 이 정도면 의식하려나 싶어 애리얼을 주시했으나, 개뿔도 관심 없어 보였다.

***

대공가의 세단은 백작저에다 애리얼을 내려다 주고서 대공저로 떠났다.

허클리 백작이 친히 나와 애리얼을 맞았고,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애리얼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아무 의심도 사지 않았다.

흰 원피스 차림으로 백작저에 돌아온 애리얼은 제 원래 옷을 공작저에 두고 왔다는 걸 떠올렸다. 휴대폰은 따로 챙겼으니, 옷 정도야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완전히 혼자가 되자 미뤄 뒀던 고민들이 들이닥쳤다.

차를 타는 중간에 렉시우스는 그녀를 꽤 당황스럽게 했다. 갑자기 고백을 재차 상기시키질 않나, 상의를 탈의하질 않나. 사실 그가 옷을 벗었다는 건 한참이 지난 후에나 알았지만, 아무튼. 렉시우스가 오늘 보인 행동은 그녀에게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휴대폰 알림에 신경이 팔린 덕분에 그나마 태연한 척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러고 보니까, 그 알림…….’

무하 공자와 헤어질 때 울렸던 진동은 뭐였던 걸까.

애리얼을 호기심 이십 두려움 팔십으로 휴대폰을 켰다.

『새로운 공략 대상이 추가되었습니다.』

『공략 대상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렉시우스 크레시앙]

*[레이신 디 솔렘]

*[???]』

애리얼은 제 눈을 의심했다. 화면에 떠오른 내용은 그녀를 당혹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새 공략 대상이라니?’

아직 레이신도 공략하지 못했다. 새로운 인물을 더 어떻게 공략한단 말인가. 황당함이 도를 넘어서면 차분해진다더니, 애리얼은 얼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새로 떠오른 칸을 눌렀다.

『???

*직위: 공자(제국의 개국 공신 중 하나인 무하 공작의 외동아들)

*나이: ???

*???

▷당신을 향한 호감도: ???

▷현재 위치: ???』

『위의 공략 대상은 히든 캐릭터로 공략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물음표 일색인 시스템 창. 그 끝에 떠오른 추가 시스템 창의 문구에 애리얼은 안도했다.

‘그나마 꼭 공략할 필요는 없구나.’

굳이 마주칠 필요도 없고, 혹여 마주치게 되더라도 굳이 환심을 사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안도하는 건 어디나 거기까지. 새 공략 대상의 등장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히든 캐릭터…….”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있어서 히든 캐릭터는 초반에는 비밀리에 숨겨져 있거나 공략이 불가능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히든(hidden: 숨겨진) 캐릭터인 것이다. 히든 캐릭터의 공략은 보통 특정한 조건을 달성했을 때나 다른 엔딩을 보았을 때 가능해졌다.

애리얼은 가늘어진 눈으로 이름도 없는 새 프로필 창의 지위에 주목했다. 이제껏 만나자마자 바로 정보가 해금되었던 공략 대상들과 달리 정보가 얼마 없었다.

새 대상에 대해 유일하게 주어진 정보는 무하 공작의 외동아들이라는 것. 애리얼은 오늘 실습실에서 만났던 잿빛 머리의 소년을 빠르게 떠올렸다. 바로 그가 시스템 창이 말하는 히든 캐릭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여타 다른 공략 대상들과 비슷할 터.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 학생 명단에 명시되지 않았다. 무하 공자라는 지위라면 레이신, 아나스타샤와 나란히 제1 기숙사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텐데 말이다.

‘렉시우스의 말로는 마저증…… 마력이 바닥난 상태라고 했어.’

만약 마저증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무하 공자는 아카데미에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고위 계급이라 해도 마력이 없는 자를 입학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는 건 무하 공작저에 걸음하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은 없다는 거.

‘렉시우스 덕분에 적성은 어느 정도 알았고, 아리앨라 덕분에 마력의 조정 방법도 대강은 익혔어. 이젠 독학으로 해결하면 돼.’

애리얼은 더 이상 선생을 구하지 않기로 했다. 무하 공작가와 엮일 일도 이걸로 끝이다.

그렇게 애리얼이 독학을 마음먹은 다음 날이었다.

이제는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선생을 자처하며 아리앨라가 그녀의 방에 나타났다. 그나마 백작의 허락은 받은 건지, 카논을 비롯한 사용인들은 아리앨라를 태연하게 대했다.

애리얼에게 다가선 아리앨라는 두고 간 옷을 돌려주러 왔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다. 그런 주제에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에는 애리얼이 지닌 강한 마력과 재능을 향한 열망이 피어 있었다. 진흙 속의 진주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한, 애리얼을 갈고닦아 완성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집념이 보였다.

애리얼은 경계심 어린 얼굴로 그녀가 건넨 옷을 받아 들었다. 그녀를 보자 어제 렉시우스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무하 공자 서하께서 마저증이라 마법사를 모으신다고요.”

“들으셨군요.”

“네.”

“하지만 저는 애리얼을 실험체로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저는 애리얼이 뛰어난 마법사의 재목이기에 순수한 목적으로 추천한 거랍니다. 애리얼 같은 재목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낭비하겠어요!”

아리앨라는 애리얼에게 제 결백을 주장했다. 거짓이 아닌 건 확실했다. 단순히 애리얼을 꾀어낼 목적이라면 실험이니 뭐니 하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줄줄 뱉어 낼 필요는 없을 테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아리앨라는 지금 무하 공작가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 건가요? 모은 마법사를 실험하는 일인가요, 아니면 훌륭한 마법사의 재목을 추천해 교육하는 일인가요? ……둘 다인가요?”

“음……. 둘 다 어느 정도 관여하긴 해요. 하지만 제가 무하 공작가에서 맡은 일은 교육이나 실험이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저주의 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병의 치료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저증의 치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확하게는 그쪽이 맞겠죠. 네, 맞아요. 저는 무하 공자의 마저증을 치료하기 위해 고용된 마법사예요. 그 전에는 다른 이유로 고용되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쪽이 주된 업무예요.”

“그러면 아리앨라는 의사 같은 건가요?”

“아뇨. 의사랑은 조금 달라요. 저는 저주나 방해, 장애 등 해로운 효과를 제거하는 마법에 특화된 마력을 가졌거든요. 불필요한 것을 지워 버리고 원상태로 복구하는 방식이에요. 정확하게는 해제 마법이라고 불러요.”

“원상태로 복구……. 해제 마법은 물건에 거는 것도 가능한 건가요?”

“당연하죠! 제 전문이에요.”

“어떤 물건이라도 가능해요?”

“네. 저는 형태에 구애받지 않아요.”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에 애리얼은 휴대폰을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휴대폰 속 프로필 창, 오류가 난 데본시아의 호감도를 떠올렸다.

‘해제 마법을 쓴다면 호감도 오류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가능성이 떠오르자 애리얼의 관심은 곧장 그쪽으로 쏠렸다. 익혀 두면 여러모로 유용할 마법이었다. 겸사겸사 팔의 브레이슬릿도 풀 수 있으면 좋고.

“해제 마법은 어떻게 쓰는 건가요?”

“이건 배운다고 가능한 게 아니라서…… 적성과 재능이 가장 중요해요. 해제 마법은 마법 중에서도 굉장히 특수한 편이거든요.”

독학이 불가능한 마법이라는 소리였다. 해제 마법을 써야 할 일이 있다면 해제 마법사를 고용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애리얼은 시무룩해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리앨라는 해제 마법에 뛰어나다고 하셨죠?”

“당연하죠! 해제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무척 희귀해요. 저 같은 실력자는 제국 역사를 돌아봐도 몇 없을걸요?”

아리앨라가 자랑스레 말했다. 하기야 무하 공작이 그녀를 고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해제 마법사 중에서도 특출난 인재임이 틀림없다.

애리얼은 그녀에게 휴대폰을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오류를 해결하자고 휴대폰을 바로 보이는 건 위험했다.

애리얼은 망설이다가 소매를 걷고 왼 손목을 들어 보였다.

“그러면 이것도 가능할까요?”

흰 손목을 감싼 검은 브레이슬릿이 아리앨라의 앞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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