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99)화 (99/264)

아리앨라는 브레이슬릿을 제대로 눈에 담자마자 흠칫 놀랐다. 그 물건의 위력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물건을 해제해 달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보았던 경이로운 마력의 집합체.

“죄송하지만, 이건…… 저주도 방해도 아니어서 해제 마법이 아닌 파괴 마법으로 풀어야 해요.”

그녀는 조심조심 상황을 설명했다. 해제 마법에 제일이라며 자랑스러워하던 표정은 난감하다는 듯 변해 있었다.

“그마저도 제 수준으로는 불가능하고요. 압도적인 마력으로 아주 첨예하게 조립된 마도구라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면 안 될 거예요. 솔직하게 부수지 못한다고 단언할게요. 누가 와도 안 돼요. 제국 유일의 신성 마법사이신 황태자 전하라면 또 모르겠지만요.”

안타깝게도 그 인간에게 부탁하는 건 애리얼도 이미 해 봤다.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물건이에요. 그분께 부탁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거라고요?”

“네.”

“그런데 왜 해제를……? 그 마도구는…… 애리얼, 그건 일종의 보호구…….”

아리앨라는 횡설수설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도구는 강력한 방어술로 만들어진 보호 장치였다. 그러나 그 탓에 애리얼의 마력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황태자가 애리얼에게 건 보호이자 저주였다.

아리앨라의 얼굴이 다소 창백해졌다. 아무리 마력과 마법에 미쳐 있는 그녀지만 황태자라는 인물 앞에서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 유일의 신성 마법사 앞에서는…….

그녀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애리얼은 천천히 주머니에 든 것을 꺼냈다.

“그럼 이것 말고, 다른 부탁이 있어요, 아리앨라.”

아리앨라의 눈이 애리얼의 손을 향했다. 보라색 눈동자가 직사각형 모양의 희고 얇은 물체를 담았다.

애리얼이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에게 내리신 하사품입니다.”

거짓말이 술술 뱉어졌다.

황태자라는 인물에 대한 공포를 아는 그녀는 휴대폰을 함부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 외부에 발설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과 마력에 미친 그녀는 이 독특한 마도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에 문제가 있어요. 일종의 방해로 비롯된 과부하 같아요.”

“……해제해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황태자 전하께 감히 하사품에 문제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대로 쓰기에는 불편해서요. 아리앨라가 비밀리에 해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애리얼은 용건을 전부 전했다.

아리앨라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굳어 버린 얼굴과 창백한 안색. 그러나 그녀의 눈은 숨기지 못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애리얼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리앨라는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켜서 오류가 난 데본시아의 프로필 창을 띄웠다. 그 상태로 아리앨라에게 내밀었다. 아리앨라의 눈은 변한 화면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서 느껴지는 강한 마력은 인지했다.

아리앨라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애리얼은 그대로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아리앨라는 건네받은 물건을 가만히 보았다. 손안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마도구에서 기이한 마력이 느껴졌다. 한평생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함. 브레이슬릿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에 버금가는 압도적인 마력. 그 마력의 강도만큼 비틀린 강력한 방해의 기운.

그녀는 제 적성대로 날뛸 수 있는 상황을 만나 환희를 감추지 못했다.

첨예한 마법 도식이 그녀의 손에서 구현화되었다. 정체 모를 하얀 물체는 숨이 막힐 정도로 어려운 구조였고 그만큼 마력도 많이 들어갔다. 그녀가 여태껏 맡았던 수백 건이 넘는 해제 의뢰 중 최상위에 이르는 난도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도구가 기함할 정도로 복잡해서 그렇지, 틀어진 부분이 대단히 크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마력만 조금 많이 쏟아부으면 된다.

아리앨라가 그렇게 여기고 도식에 따라 마력을 방출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진득한 액체가 그녀의 기관지를 적시며 역류했다.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온몸에 열이 확 치솟으며 전신이 벌벌 떨렸다. 마력 발작의 증상이었다.

아리앨라는 입 안에 고인 것을 뱉어 냈다. 적지 않은 양의 피가 그녀의 코와 입으로 쏟아졌다.

애리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놀라 벌어진 입이 그녀를 불렀다.

“아리앨라!”

아리앨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휘청거리며 휴대폰을 떨어트리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애리얼이 급하게 뛰어가 아리앨라를 부축했다. 아리앨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 피를 뱉어 냈다. 마도구의 방어 시스템에 피해를 입은 데다 마력의 과부하가 겹쳐서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아직 기절할 수는 없었다. 아리앨라는 피를 줄줄 흘리는 입으로 말했다.

“애리얼, 저 마도구……! 확인해 봐요! 해제는 성공했지만 오래는 못 가요! 빨리!”

아리앨라가 다급히 말했다. 애리얼은 그녀를 부축한 채로 엎어진 휴대폰을 뒤집었다. 아까 켜 두었던 데본시아의 프로필 창이 떠올랐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 ……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시스템 창이 지지직 진동하고 화면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러더니 금세 화면이 바뀌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늘 보던 오류 난 프로필 창이 떠오르며 화면의 지직거림이 멈췄다.

털썩거리며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피 흘리던 아리앨라가 결국 기절에 이른 것이다. 무너지는 그녀의 무게에 못 이긴 애리얼이 함께 바닥으로 엎어졌다.

“카논!”

애리얼이 다급히 소리쳤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카논과 함께 하녀들이 들어왔다. 분주한 움직임과 놀란 소음이 뒤엉켰다.

***

사태가 수습되고 아리앨라는 응급 처치를 받은 뒤 객실에서 잠들었다.

백작은 놀란 얼굴로 자초지종을 물었고, 애리얼은 몸이 좋지 않은 아리앨라에게 자신이 마법을 보여 달라 졸랐다고 둘러댔다. 실제로도 그 비슷했으니 아예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백작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례하고 위험한 행동이었다며 애리얼을 조금 나무란 뒤 방으로 올려 보냈다.

애리얼은 사과를 전하고 싶으니 아리앨라가 일어나면 불러 달라는 요청을 남기고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오자 겨우 가장했던 침착이 깨어졌다. 팔다리가 벌벌 떨렸다.

잠깐이지만 오류가 걷혔던 데본시아의 프로필 창.

‘봤어! 봤다고!’

애리얼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좋아서가 아니었다. 충격적인 사실에 비명을 지르는 것에 가까웠다.

잠깐 사이였지만 호감도가 보였다. 분명히 하트가 있었다. 찰나였으나 정확히 보았다. 최소 세 개 이상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찰나 스치듯 봤던 호감도 창을 떠올리자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들이켠 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다섯 개.”

였던 걸로 보였다.

***

아카데미 후학기가 시작되기 1일 전.

솔렘 공작저의 거대한 지하 홀에는 커다란 관과 같은 침대가 있었다. 벨벳이 깔린 검은색의 틀. 그리고 그 안에 죽은 듯이 잠든 금발의 소년. 그 소년에게로 누군가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어두웠던 공간에 조명 빛이 눈이 아플 정도로 명멸했다. 이윽고 하얀 벨벳에 눕혀진 소년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미동도 없이 누웠던 소년이 별안간 허억 숨을 들이쉬었다. 이어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복잡한 마법 도식이 새겨진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이 드리운 그림자의 주인을 마주했다.

소년과 닮은 것이라곤 피부와 눈동자 색뿐인 남자가 보였다. 솔렘 공작저의 주인이었다.

“일어날 시간이다.”

공작이 깨우는 소리는 늘 그렇듯 무미건조했다.

“상태는?”

묻는 말도 늘 같다.

“괜찮습니다.”

레이신의 대답도 늘 똑같았다. 그는 이 정해진 틀을 맴도는 대화가 싫었다.

갑작스럽게 든 감정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 번쯤은…… 걱정해 주시면 안 됩니까.”

“상태는 매번 물어 오고 있다. 나 역시 지장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어.”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당연한 것에 칭찬을 바라는가?”

“네, 칭찬도 좋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칭찬받길 바라서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요지는 아버지께서 저를 신경이나 쓰고 있으신 건가 하는 겁니다.”

“너는 차후 솔렘의 가주다. 신경 쓰고 있음이 당연하지. 그렇기에 장녀인 엘레드라를 저버리고 너를 차후 공작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건 그저 제 마력이 솔렘에 적합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지?”

“가주 자리는 제가 원한 보상이 아닙니다. 한 해의 반 이상을 지독한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 기어코 한 달씩 잠들어 버리는 저에 대한 존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걸 바라는 겁니다!”

레이신은 간만에 그답지 않은 소리를 했다. 지독하게 잠들고 나서 일어났을 때의 그는 늘 예민했으나, 그 예민함을 말로 꺼내는 일은 적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기생 생물에 빨리는 숙주처럼 마력을 가져다 바치며 잠드는 일이 참을 수 없이 지긋지긋해졌다. 숙주라 영광이지 않냐고, 혈연인 이들에게 같잖은 질투와 부러움을 받는 것도 짜증이 났다.

“고작 일 년에 두 달이다.”

하지만 그의 아비는 냉담했다.

“역대의 모든 가주가 끝없이 해 왔던 일이지. 어리광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야. 당연한 의무를 존중받으려 하다니, 우습구나.”

“고작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얹기도 어렵습니까?”

“푸념이 길구나. 빨리 일어나서 내려와라.”

공작은 이마를 짚는 아들을 두고서 등을 돌렸다.

레이신은 숨을 고르더니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팔월 한 달 동안 줄곧 잠들어 있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몸이 무거웠다. 늘 소지하는 유지 장치 덕에 욕창 같은 병에 시달릴 일은 없었으나, 물에 잠긴 듯 흐린 정신이 문제였다.

휘청이며 일어난 그는 침대를 나와 벽을 짚었다. 금발이 부스스 흘러내리고 기울어진 몸을 따라 볼로 타이가 흔들렸다. 그는 목을 조이던 순록 모양의 슬라이드와 넥타이를 뜯어내 바닥으로 버렸다. 셔츠에 밴 섬유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한 달 내내 갈아입지도 못해 정복 차림이었다. 황성에 다녀왔던 차림 그대로 이 지하 홀에 넣어져 팔월을 보냈다. 그를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날 그대로 보존된 것이었다.

완전한 방치였다.

유지 장치가 있어서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처사임은 바뀌지 않았다.

그게 새삼스럽게 씁쓸하다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익숙하며 공허했다. 그래서 이제는 감정을 쏟기가 귀찮았다. 다만 이 졸음과 수면으로 빼앗기는 시간이 아까울 뿐이었다.

레이신은 구겨진 정복 차림으로 비척비척 계단을 올랐다. 지독한 솔렘의 굴레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

***

아카데미 후학기가 시작되기 1일 전, 오후.

허클리 백작저로 황성의 검은색 세단이 도착했다. 상석에서 매끈한 정장을 갖춰 입은 데본시아가 내렸다.

연락도 없이 등장한 압도적인 권력의 앞에 백작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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