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표정 변화가 별로 없던 백작마저 안색이 새파래져서 뛰어나갔다. 황태자는 여유롭게 백작을 맞아 말을 나눴다.
애리얼은 한참 전부터 제 방의 창 밑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둘의 말을 엿듣기 위해 몰래 창문을 열었다. 아쉽게도 대화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왜 오신 걸까?”
애리얼이 창틀 아래로 몸을 웅크린 채 카논을 향해 물었다. 카논이 친절하게 몸을 숙이고서 귓속말을 하듯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아가씨를 데리러 오신 거겠죠?”
“……아니라고 해 줘.”
“그러면 뭐가 달라져요?”
애리얼은 침묵하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불행히도 카논의 말대로였다.
똑똑똑, 애리얼의 방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황태자께서 부르신다는 전언이 날아들었다. 후학기를 앞두고 미리 기숙사에 데려가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제 그녀의 편입 추천인이 된 그가 베푸는 황송하다 못해 졸도할 듯 과한 친절이었다.
애리얼은 숨기를 멈추고 긴장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머릿속에는 데본시아의 프로필 창이 끝없이 떠올라 도배되었다. 무려 다섯 개나 되는 하트가 나타났었던 창. 끝없이 잘못 본 것이라 치부하고 또 치부했으나, 꿈에도 떠오를 정도로 선명했던 그 화면.
‘적어도 하트가 세 개 이상인 건 확실해.’
그렇다는 건, 데본시아가 그녀를 좋은 체스 말 정도로 대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선명한 호감을 보이며 얼굴을 붉히던 스카이라, 그 이상의 감정이라는 의미였다.
‘믿을 수 없어. 아냐…….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애리얼은 수없이 부정하며 되뇌었다. 도움말에는 하트가 네 개 이상이면 개인 루트에 진입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데본시아의 루트에 진입한 거였다. 그리고 그의 루트엔 굿 엔딩이 없다. 첫 번째 분기로 이미 모두 삭제되었다.
애리얼은 창백해진 얼굴로 출입문에 다다랐다. 이 문 너머에서 데본시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발견한 하녀가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여기서 계속 미적댈 수는 없었다. 애리얼은 결심한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열어 줘.”
그제야 하녀가 문을 열었다.
노을이 지는 백작저의 정원이 보였다. 멋들어진 풍경을 등진 데본시아가 애리얼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애리얼은 불안감을 누르며 그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안녕, 애리얼.”
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의 친근한 행동에 백작저의 모든 인물이 놀라 굳는 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를 전처럼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구는 게 다…….’
호감도 칸을 가득 채우던 연분홍색의 하트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데본시아가 미려하게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는 눈이 많은 공간, 그를 거절할 수 없는 애리얼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를 상석으로 에스코트하고서 옆자리에 탔다.
데본시아가 작은 창으로 눈짓을 보내자 운전기사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달리는 세단의 뒤로 백작저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앞좌석과 연결된 작은 창이 탁 닫혔다. 상석은 조용히 밀폐된 상태가 되었다.
차 내부에서 풍기는 은근한 베르가모트 향과 함께 옅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고 싶었어.”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제 무릎만 보고 고개를 숙이던 애리얼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데본시아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우아한 눈웃음이었다.
“보니까 좋다. 내 생각보다 더.”
“아…… 그……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감사해요.”
평소보다 말이 늦게 나왔다. 애리얼은 도저히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데본시아의 모든 행동을 연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여기면 편했다. 가짜 감정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가 진심으로 좋아서 저러는 거라고? 저 말이 다 진심이라는 거야?’
피하고 피하던 그의 본심이, 그때의 그 심연이, 진심인 감정이었다고? 연기가 아닌 진짜 호의였다고?
그런데 왜 그의 굿 엔딩은 전부 사라진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데본시아가 진심으로 애리얼을 좋아하는 거라면, 오히려 배드 엔딩이 사라져야 했다.
“내가 무서운 말을 했나?”
“……네? 아뇨…….”
“그런데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
그는 평소와 같이 웃었다. 애리얼을 떠보고, 친근하게 굴고, 곁을 내주며 다가오길 종용하고.
“오랜만에 뵈어서 긴장했나 봐요.”
애리얼은 겨우겨우 대답했다.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도 걸쳤다.
“그래? 그럼 자주 만나자.”
“……네. 여, 영광입니다.”
“정말? 나랑 자주 만날 거야?”
데본시아가 몸을 훅 기울여 다가왔다. 매끈한 손가락을 뻗어 애리얼의 뺨을 감쌌다.
갖은 생각으로 긴장해 있던 애리얼은 갑작스레 다가온 감촉에 황급히 상체를 뒤로 물렸다. 데본시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거짓말하면 못써.”
그가 장난치듯 말하고는 물러났다. 미미한 미소를 걸친 모습이 평소와 같았다.
애리얼은 이제 그의 말 한마디를 그냥 흘릴 수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주도면밀히 살피게 되었다.
아직 데본시아의 루트에 들어갔다는 알림은 없었다. 그 원인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시스템상 루트 진입은 알림이 일일이 오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다. 둘째, 그의 호감도가 오류라서 시스템이 인식하지 못했다. 셋째, 애리얼이 그의 호감도를 잘못 봤다.
우선 첫 번째일 가능성은 적었다. 호감도 상승을 일일이 알려 주는 섬세한 시스템이 루트 진입을 무시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 휴대폰이 문제이거나, 애리얼의 눈이 문제였거나.
만약 그가 애리얼에게 정말로 마음이 있다면, 아까 애리얼이 보인 행동으로 그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조금도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지독한 포커페이스였다. 계기가 없다면 표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을 거다.
‘시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본심을 파헤치기로 했다. 적어도 그 일면이라도 볼 수 있는 반응을 끌어내야 한다. 그녀의 눈이 잘못 보았던 건지 아닌 건지, 그 확신이 필요했다.
그를 유혹을 해서라도 알아내야 했다.
“데본시아.”
애리얼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이름을 들은 그가 놀란 얼굴로 애리얼을 보았다. 평소와는 꽤 달랐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애리얼이 평소와 다르게 굴었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으니까.
보다 확실한 감정적인 반응이 필요했다.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그러면 자주 올까?”
“네. 그래 주세요.”
“…….”
“기다리고 있을게요.”
“진심이니?”
“진심이에요, 데본시아.”
애리얼이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미소를 짓고는 있는데 눈빛이 시렸다. 동시에 그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낮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 웃음소리마저도 한숨이 섞여 우아하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조용히 속삭인 그가 애리얼의 손목을 덜컥 붙들었다. 하필 왼손이었다. 브레이슬릿이 그의 손에 눌려 피부를 파고들었다. 애리얼은 움칠 떨며 눈을 크게 떴다.
데본시아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그 화려한 얼굴의 반짝거리는 오드 아이에 압도된 사이 그가 이마를 붙였다. 애리얼의 허리를 당기고 그녀의 상체를 뒤로 무너트렸다.
“저…… 황태자 전하!”
당황했음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로 애리얼이 외쳤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균형이 무너져 넘어가는 그녀의 위로 몸을 겹치듯 기울였다. 좌석 시트에 애리얼의 등이 닿았다. 그가 그녀의 얼굴 옆을 손으로 짚고서 몸을 숙였다. 베르가모트와 시더우드 향이 뒤엉킨다.
휘둘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지배자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유혹해?”
“……안 그랬어요.”
“자꾸 거짓말하고,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네. 무슨 일 있었어?”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접혔다. 그녀의 속내를 속속들이 끄집어내 볼 듯 첨예한 눈빛. 그는 도무지 속일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아냐. 괜찮아.”
그가 웃었다. 애리얼이 밀어내도 그는 더 다가오기만 했다. 그녀의 접힌 팔꿈치가 시트로 밀려났다.
“나 가지고 싶어? 휘두르고 싶어?”
몸을 낮춘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휘둘려 줄까?”
아찔한 음성과 연분홍색 하트가 교차했다. 잠깐 엿보았던 그의 호감도 창이 애리얼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었다.
“난 휘둘리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 그래도 너한테는 당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이 말이 전부 진심이라고.
“왜요?”
애리얼이 반발적으로 물었다. 쏟아지는 그의 언행들이 진심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게. 왜일까?”
애리얼의 물음에 오히려 반문했다.
“네가 준 걸 종일 보관하고, 네 추천인을 자처하고, 너와 단둘이 식사를 하고, 널 데리러 오고.”
서서히 답을 유도하면서.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마지막으로 묻는다.
좋아해서 그러지.
그런 답이 속삭여진 것 같았다.
쿵쿵쿵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의 것인가? 애리얼은 극도로 긴장한 자신의 심장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