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본시아는 정말 날 좋아하나?’
그렇다면 정말로 하트 다섯 개만큼의 마음일까?
애리얼은 금방이라도 입 맞출 듯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상냥하고 음험하고, 전부 가짜 같은 사람. 발갛게 단 그의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온기가 느껴지게 달아오른 이건 진짜일까? 옅게 붉어진 피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가 입꼬리를 휘었다.
“계속 유혹하네. 난 생각보다 인내심이 얕은데.”
“……진심이신지 궁금해요.”
“난 언제나 진심이야.”
“못 믿겠어요.”
애리얼은 별장에서와 달리 떨지 않고 물었다.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도리어 더 당돌해졌다.
애리얼이 상상하던 그의 심연이, 그녀의 생각처럼 위험한 것이 아니라면. 끝까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답을 알고 싶었다. 잠깐 보았던 그 호감도가 정말 진실인가.
이미 일을 벌였으니, 확신을 얻고 싶었다.
“저를 좋아하세요?”
물었더니 그가 웃는다.
“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의미심장한 소리를 속삭이더니, 데본시아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멀어졌다. 애리얼은 시트로 무너졌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척에 있는 그는 언제라도 다시 그녀의 위를 차지할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입꼬리에 남은 미소마저 서서히 지운 얼굴이 생소했다. 데본시아는 웬일로 여유가 없어 보였다.
“세워.”
그가 명령했고, 차가 멈추었다. 그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인내심이 다 떨어졌어. 혼자 타고 가.”
말하는 목소리는 상냥했으나 행동하는 건 매정했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을 남겨 둔 채 문을 닫았다.
그렇게 애리얼만을 태운 세단이 다시 출발했다.
혼자가 된 애리얼은 넓어진 좌석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데본시아는 지금 차에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문 쪽으로 몸을 붙여 앉았다. 방금의 상황을 상기하자 당돌하게 구느라 미뤄 두었던 혼란이 밀려들었다.
데본시아의 감정, 그걸 향한 무성한 추측……. 사실 추측이 아니었다. 애리얼은 제가 본 것을 내내 부정하고 있었다. 그를 향한 거부감과 공포심 때문에 받아들이기를 피했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여유가 없어진 데본시아. 닿아 온 몸의 체온, 시끄러운 심장 소리. 그러다 결국 먼저 피하기까지 한 그의 행동은 도무지 연기라고 보기 어려웠다.
방금의 일을 겪고서 추측은 확신으로 기운다.
‘데본시아는 날 싫어하지 않아. 가볍게 여기지도 않아.’
데본시아는 애리얼에게 사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산재해 있었다.
그는 여태 호감도 상승 알림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알림이 호감도 창처럼 고장이 났거나, 혹은 처음부터 다섯 개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후자라면, 데본시아는 애리얼을 처음 본 순간부터 하트 다섯 개분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다.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그 정도 호감을……. 그럴 수가 있다고?’
아니다. 알림이 고장 난 것이 분명했다.
애리얼은 그렇게 여기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좀 이상해. 스카이라나 렉시우스도 아니고, 왜 데본시아의 호감도가 저렇게 높아진 거지? 내가 뭘 했다고?’
이유 모를 과도한 애정은 부담을 넘어 공포였다.
‘만약 호감도 창이 오류가 나지 않았다면…… 난 지금 배드 엔딩뿐인 데본시아 루트를 탄 상태겠지?’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개별 루트에 진입하면 타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리기 어려워집니다.』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도움말 중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애리얼은 이제 호감도 창이 고쳐지지 않길 바랐다. 적어도 레이신의 공략이 끝날 때까지는 고쳐지지 않아야 했다.
폭탄을 안은 기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일부터는 페널티가 시작된다. 사망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우려스러운 와중에 그래도 그나마 긍정적인 점이 하나 있었다.
애리얼은 이제 데본시아를 공략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내 편입 추천인이 데본시아로 바뀌어서 엮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불안이 발밑에서 수런거린다.
***
익숙한 기숙사의 전경 뒤로 검푸른 밤의 하늘이 덮쳐 오고 있었다.
애리얼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을 마중 나온 데본시아와 마주쳤다. 어둠을 등진 그의 금발이 유난히 밝은 색으로 대비되어 반짝거렸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떻게 마주쳐야 더 극적인지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아까는 먼저 가 버려서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애리얼은 그를 향해 익숙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탐탁지 않아 하는 데본시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말을 더 얹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애리얼은 잠깐 멈칫하다가 그의 손을 잡고서 고개를 들었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같이 저녁 먹을래?”
그가 물었다. 별장에서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애리얼은 거절할 구실이 없었다. 입맛이 없다고 둘러대고 주린 배를 움켜잡은 채 기숙사에 틀어박히는 건 너무 손해 같았다. 게다가 그는 기민한 눈치로 애리얼의 거짓말을 곧잘 간파하는 인간이었다.
“영광입니다.”
애리얼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짙어졌다.
둘은 고요한 기숙사로 나란히 들어갔다.
애리얼은 사용인조차 몇 없어 보이는 적막한 기숙사가 거북했다. 데본시아와 단둘뿐인 것 같았다.
적요한 복도를 울리는 두 개의 발소리가 서로 겹쳐 울렸다. 애리얼의 속도에 맞춰 걷던 데본시아는 하얀 문 앞에 도달하자 걸음을 멈췄다. 3층의 오른쪽 끝에 있는 방이었다.
그가 금색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흰색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조각한 방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의 개인 기숙사실이었다. 화려한 것과 별개로 쓰지 않은 티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소였다.
그는 방의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애리얼을 데려가 앉힌 후 맞은편에 착석했다. 기숙사 건물에 있는 줄도 몰랐던 시녀들이 그제야 문을 열고 나타나 식사를 차렸다.
7종으로 이루어진 코스 요리가 이어지는 동안 데본시아는 애리얼만 가만히 응시했다. 애리얼이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그의 눈은 묘한 감정으로 충만해졌다. 종종 제 접시의 요리를 덜어 애리얼의 접시에 얹어 주기도 했다. 애리얼이 사양해도 그는 웃으며 더 먹으라고 권했다.
데본시아가 후식으로 나온 초콜릿무스케이크마저 크게 덜어서 애리얼의 접시에 올려 주었을 때였다. 애리얼이 포크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전하…… 이렇게 많이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런 기호 이전에 전하의 몫까지 먹어 버리는 것은 실례인 것 같습니다.”
“실례?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건데, 그럴 리 없잖아.”
“…….”
“좋아하는 거 사양하지 말고 먹어.”
그는 무척 다정한 얼굴로 상냥하게 권했다.
“……감사합니다.”
애리얼은 제 앞에 놓인 무스케이크 조각을 거절하지 못했다. 입 안에서 녹아 없어지는 케이크의 달콤한 맛이 몹시 취향이었다.
그녀는 무리 없이 접시를 비웠다. 좋아하는 게 아니냐던 데본시아의 물음대로였다. 애리얼은 이 케이크가 좋았다. 그걸 알아챈 그의 귀신같은 눈썰미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식사 시간 내내 그랬다. 애리얼이 코스 중에 조금이라도 더 맛있다고 생각한 요리만 골라서 덜어 주었다.
데본시아는 자상하되 위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친절하다. 그 이중성은 두려움과 동시에 그를 향한 선망과 이끌림을 만들어 냈다. 당근과 채찍처럼. 그는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손쉽게 찍어 누를 힘을 갖췄다.
그리고 애리얼은 그런 이의 총애 아닌 총애를 받는 위치였다.
그걸 인지한 순간 애리얼은 위험할 정도로 고양되었다. 데본시아는 압도적으로 강한 권력을 지닌 제국 유일의 신성 마법사다. 대부분의 위협은 간단히 쳐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지켜 달라고 하면, 지켜 주지 않을까?’
손이 떨렸다. 애리얼은 빈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도 그럴 게, 날 좋아하잖아……? 하트 다섯 개만큼 날…… 좋아하잖아?’
흘긋 바라본 창밖은 어느새 깊어진 어둠에 잠식되었다.
내일이 지척이었다.
바로 내일부터, 죽을지도 모를 페널티가 발동된다. 상시로 그런 위협에 놓이게 된다.
애리얼은 두려웠다. 아닌 척해도, 태연한 척 가장해도, 그녀는 몹시 두려웠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공포. 홀로 맞서야 하는 외로움. 페널티가 닥칠 시간이 임박해 오자 애써 무시한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순간 부정적이고 나약하게 되어 버린 감정은 편한 길을 찾아서 눈을 돌렸다.
“황태자 전하.”
애리얼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데본시아가 따스한 눈빛으로, 무슨 말이든지 들어 줄 것 같은 자상한 분위기로 애리얼을 보았다.
“응. 말해 봐.”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로 고충을 다 헤아려 줄 듯이 그렇게 말했다.
애리얼은 홀린 것처럼, 혹은 어딘가에 몰린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려는 찰나였다.
가만히 애리얼을 응시하던 그의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 웃고 있음에도 웃는 것 같지 않았다. 온화하던 오드 아이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허공을, 이곳보다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애리얼이 그를 부르려는데, 갑작스레 소음이 난입했다. 똑똑똑. 더블 도어를 두드리는 노크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시녀의 음성.
“황태자 전하, 황성에 문제가…….”
“알아. 지금 갈 거야.”
데본시아가 차갑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장 표정을 바꾸었다. 쓴웃음을 지은 그가 애리얼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자리 좀 비울게. 미안해.”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그는 아쉬움이 가득한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떠나는 그의 뒤로 문이 닫혔다. 탁, 소리와 함께 빈방에 적막이 드리웠다.
애리얼은 어깨를 움츠리다가 양손을 꽉 맞잡았다. 입술과 턱이 가늘게 떨렸다.
‘하마터면 데본시아한테 부탁할 뻔했어.’
아무리 그의 호감도가 높다고 한들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공포에 잠식된 사고가 판단을 흐렸다. 순간적으로 그에게 홀려서 무작정 매달릴 뻔했다. 가까스로 무마되어서 망정이지. 애리얼은 자신이 하려던 행동을 상기하며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페널티를 유발한 원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뭘 믿고 의지하려 했단 말인가.
애리얼은 자신의 왼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스카이라와 아리앨라가 이 고리를 향해 보였던 반응이 교차하며 머릿속을 지나갔다. 부수려 하다가 결국 실패했던 스카이라. 자신의 힘으론 부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하던 아리앨라.
현재 겪고 있는 마력 불균형은 아마도 이 브레이슬릿에서 기인했으리라. 심지어 첫 번째 분기를 끝장냈던 것도 이 물건이었다. 이걸 착용하고서 받은 결과는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설령 이것이 강력한 방어술을 지녔다 한들 찝찝하고 불쾌한 물건임은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걸 준 인간도 믿을 수 없다.
애리얼은 냉정하게 떠올렸다.
‘데본시아는 굿 엔딩이 없어.’
따라서 그와 가까워진다는 건 배드 엔딩에도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를 의지하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해야 해.”
애리얼은 조용히 다짐했다.